알 카포네 - 암흑가의 대부
루치아노 이오리초 지음, 김영범 옮김 / 아라크네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알 카포네(1899∼1947)만큼 자신과 거리가 먼 학술문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그가 조직폭력배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주제로 책과 논문을 썼고, 영화와 텔레비전 특집물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량은 많지만 아쉽게도 그의 마피아적 폭력성을 그린 말초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루치아노 이오리초의 <암흑가의 대부 알 카포네>는 당대 1급 악인으로 낙인찍힌 카포네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미디어에 노출되거나 법정에 기소된 죄목은 물론 때로는 미국 하층민의 희망의 상징이라고까지 불리던 그의 생활사 이면까지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다. 다만 ‘하층민의 희망’은 다소 부풀려진 것이지만.

이탈리아 산(産) 카포네가 유명해지기까지는 미국 미디어가 일등공신이다. 물론 카포네는 이민 2세대지만 마피아라는 이름과 결부해서는 이탈리아 산 꼬리표를 피할 수 없다. 1920년대 미디어는 피의자인 카포네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적 세부사항까지 신경 쓰거나 고려하지 않았다.

카포네의 기소 이유는 잔챙이급 범죄

그때부터 기자들이나 라디오 진행자, 영화제작자들은 카포네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책은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그가 뉴스 가치를 담보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인물이었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힐 만큼 그의 범죄 혐의가 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현대 미국의 ‘오만과 편견’이 역사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지난 2002년 부시 대통령은 반테러 전쟁의 제2단계 표적으로 이라크·이란·북한을 지명하면서 그들을 총칭해서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이에 앞서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 당시 구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칭하는 등 세계 질서를 지배하려 들었다.

악의 축이라 일컬어지는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 무기가 발견되지 않았고 북한은 6자회담을 위해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초청했지만 미국이 이를 거부했다. 이란 역시 농축 우라늄 관련 ‘이란판 6자회담’ 가능성을 여는 등 미국의 시선과는 달리 세계는 악을 지탱하는 축 따윈 없는 듯 하다.

괜한 편견으로 공공의 적이 된 카포네 역시 최근의 이라크, 이란, 북한과 마찬가지로 뉴스메이커였으며 가끔은 미디어로 인해 슈퍼스타가 되기도 했다. 카포네 역시 과장된 자신에 대한 평가를 알고 있었지만 철저히 그것을 즐겼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미디어에 이어 정부까지 그를 띄운 사례는 1930년 시카고 범죄위원장인 프랭크 뢰시가 카포네를 공공의 적 1호로 지목했을 때였다.

카포네의 죄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소박(?)해서 그를 1급 악당으로 부르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탈세, 도박, 금주법 위반 정도로 벌금을 물거나 징역을 살았다. 물론 법정 증거부족으로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나갔지만 살인, 매춘, 주류밀매, 도박에 빠진 조직폭력배 두목이라는 데 작가나 기자들이 의견을 같이했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다. 왜 유독 그만이 미디어에 의해 이렇게 침소봉대 됐는지.

마피아는 미국 미디어가 만든 허상

밀트 힌턴의 회고

금주령 시기 카포네의 고객에게 술을 배달하던 중 배달원 밀트 힌턴은 차사고를 당한다. 이 사고로 힌턴은 손가락을 포함해 온몸에 유리 조각이 박힌 채 병원으로 실려간다. 재즈클럽에서 베이스 연주를 하기도 하는 그의 손가락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걱정대로 의사는 손가락을 절단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 함께 있던 카포네는 그럴 수 없다며 의사를 설득해 손가락을 접합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의사는 카포네의 말에 따라 손가락을 꿰매 붙이는데 성공했다.

힌턴은 그로부터 70년 가까이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고 무수한 밴드에서 베이스를 도맡아 지금도 녹음에 가장 많이 참여한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힌턴은 지난 2000년 9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가락 접합수술과 수술 비용을 전부 대준 카포네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무자비한 평가 이면을 볼 수 있는 작은 일화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밀려오면서 ‘마피아’까지 들어온 것으로 생각한 미국인들의 환상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된다. 1900년대 초 미국에 이주한 이탈리아인 중 45세 이하가 100만 명 이상 됐다. 이들 중 일부가 자생적 마피아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 마피아가 직접 건너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이탈리아계 범죄자는 곧 마피아로 인식됐다.

두 번째 잘못 인식된 것은 조직범죄에서 카포네의 역할을 미디어가 과장한 것이다. 카포네는 사실 나폴리 출신이기 때문에 시칠리아 출신만이 가능한 마피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언론과 작가 등 미디어는 그를 상업용 조폭 두목으로 분장시켜 우려먹기 시작한다. 실제로 법원의 판결기록에는 단 한 줄도 나와 있지 않지만 미디어는 그를 잔인하고 짐승 같은 살인자로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성 발렌타인 대학살’(1929년 2월 14일 경찰복장을 한 일곱 명의 괴한이 기관총을 들고 벅스 모런(경쟁 밀주업자)의 본부로 알려진 한 차고로 들어가서는 신분을 확인하지도 않고 전원을 사살한 희대의 사건)에서처럼 자신은 플로리다 태양 아래 일광욕을 즐기면서 부하들에게는 비열한 짓을 시키는 악당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조직에는 쓴맛만 있는 것이 아니다. 씁쓸하고 어두운 곳만 알리는 글쟁이들이 있는 반면 달짝지근하고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들은 카포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견제했고 결코 옹호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폭력과 부패의 시대, 대공황의 시대적 산물쯤으로 여긴 것이다.

가정적이면서 하층민의 희망으로 평가되기도

이들은 카포네를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거의 이탈리아적 가치를 신봉하며 부모, 형제, 주변 인물들에게 헌신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첫 감옥살이 1년을 마친 1930년에 석방된 카포네는 자신이 운영하는 시카고 수프키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했다. 어떤 이들은 19세기 미국 농촌에서 영웅시됐던 살인자이자 도둑 제시 제임스(은행·열차강도로 서부의 로빈 후드로 불림)를 카포네와 비교했다.

카포네는 분명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생활, 방탄유리와 장갑판 차체를 가진 자동차들,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여인들을 끼고 도시를 활보하는 모습, 맞춤 양복과 진주색 중절모 등은 그가 가진 부의 상징이며 권력과 등호가 성립되는 재화다. 이러한 요소와 카포네의 작은 선행이 어우러지면서 그는 불황기에 억압받는 하층민의 희망적인 존재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쟁쟁하고 떵떵거리던 그도 20대 풋내기 재무성 요원에 의해 탈세혐의가 입증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는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처블>은 그의 마지막 몰락을 그린 영화로 유명하다. 이후 그는 매독 증세가 심해지면서 1942년 페니실린 치료를 받은 최초의 민간인 중 한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병세를 되돌리기엔 상태가 너무 악화돼 있었다. 1947년 1월 시카고 공공의 적 1호 또는 하층민의 희망, 알 카포네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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