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 - 세계 화폐 인물열전
박구재 지음 / 황소자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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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폐 속에서 세상 밖을 응시하는 인물들의 눈빛을 들여다보자. 혹시 그들의 홍채 속에 머물러 있는 작은 역사가 보이지 않는가. 암울하고 고단했던 시간과의 싸움을 거쳐 끝내 삶의 승리를 거머쥔 그들의 눈빛은 오늘날 많은 이들의 땀내 나는 손을 거쳐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각국의 지폐 속에 새겨진 인물들의 열전인 <지폐, 꿈꾸는 자들의 초상>은 작은 위인전이다. 전 세계 22개국 39명의 지폐 초상 인물들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준다. 등장인물은 1인이지만 그들이 빚어낸 역사는 장대한 뮤지컬 이상으로 생동감 있고 역동적이다.

한 나라 경제력과 집약된 역사의 결정체라 일컫는 화폐. 특히 지폐에 초상으로 얼굴을 올린 이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들이다. 이들은 개인만이 만족한 삶이 아닌 인류공영과 문화인류를 지향한 업적을 남기고 사라지거나 현존한 인물들이다.

또한 지폐에는 인물뿐만 아니라 각국의 전통과 문화, 기술력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지폐의 역사는 위폐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 지폐 속에 촘촘히 담겨 있는 인물, 역사, 위폐방지 기술, 그리고 전통과 문화 등을 한 권의 책으로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책이 제공하는 정보는 짧지만 유익하다. 개인의 간략하지만 뚜렷한 삶의 궤적을 동행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또 인물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만나는 것은 봄비 같은 단맛이 난다.

아르헨티나 의학도 출신이면서 쿠바혁명에 가담해 임무를 완수한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의 질문을 잘못 들어 쿠바중앙은행 총재가 된 일화, 자습을 시키기 위해 1에서부터 100까지 모두 더하라는 덧셈문제를 내고 돌아 서는 선생님에게 즉답을 내놓은 10살의 가우스(독일 수학자), 자국에 오면 부귀영화를 보장하겠다는 스페인 국왕의 제의를 거절한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

이들 개인의 소사가 후일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는 표현만으로 모자라다. 어린왕자처럼 하늘로 날아간 생텍쥐페리, 인류에게 무상으로 라듐을 선사한 마리 퀴리, 동심에 정의를 심은 그림형제, 에베레스트 산 초등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 중국 인민의 붉은 별 마오쩌둥, 그리고 어린 백성을 긍휼히 여겨 눈과 귀를 열어 준 성군 세종대왕까지.

나라마다 인물초상 선정에 독특한 차이를 만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예술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는 유로화 사용 전까지 지폐에 정치인을 등장시키지 않고 문화예술인과 과학자를 새겨 넣었다. 생텍쥐페리(50프랑)를 비롯해 작곡가 드뷔시(20프랑), 화가 폴 세잔(100프랑), 건축가 구스타프 에펠(200프랑), 그리고 500프랑에는 과학자 퀴리 부부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 역시 유로화 이전인 1970년대에는 예술가, 탐험가를, 1985년 이후 발행권종에는 문화예술계 인사로 장식했다. 모차르트가 들어 간 오스트리아의 50실링 지폐는 1990년 유럽은행권 콘테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폐 디자인상을 받았다.

대통령 위주의 미국과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멕시코, 쿠바, 칠레 등 남아메리카 지역 지폐들에는 유독 좌파지도자, 혁명가들이 많다. 제국주의 지배에서 독립한 나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인물들이 과거의 초상이라면 영란은행(BOE)의 모든 권종에 새겨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현존 인물이다. 골프로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필드의 신'' 잭 니클로스는 스코틀랜드 5파운드 지폐를 장식했다. 인도네시아는 독재자 수하르토의 초상을 넣었다가 국민적 반감이 거세지자 통용중인 지폐를 회수하는 소동을 빚는 등 현존 인물에 대한 초상은 역사적 검증 부족으로 가급적 회피한다.

모양새도 나라마다 특성을 보인다. 대부분 가로 도안를 채택한 데 반해 스위스, 이스라엘 등은 돈을 세는 시각(視角)을 기준으로 세로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세로 도안은 은행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판단이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다. 다만 도안배치에 효과적이고 여백을 가득 메울 수 있는 장점은 있다.

싱가포르 은행권은 가로 18㎝, 세로 9㎝로 세계 평균인 14.8㎝, 7.05㎝보다 2~3㎝나 크다. 우리나라도 새로 발권된 5천원권이 기존보다 작아졌다. 이는 지폐가 커서 지갑에 넣기가 불편하다는 지적 때문이었다는데, 이 보다는 위폐방지를 위한 도안교체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지폐는 폴란드 은행권으로 가로 12㎝, 세로 6㎝이다.

지폐의 액면가는 소득수준, 지급결제 관행 등에 의해 결정된다. 최근 발행한 최고 액면가치는 싱가포르의 1만싱가포르 달러로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5799달러에 이르는 고액권이다. 또 이란의 1만리알은 1.3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액면단위가 가장 컸던 것은 1924년 독일이 발행한 100조 마르크. 1차 세계대전 후 전쟁배상금 마련과 경제부흥을 위해 무분별하게 고액권을 남발한 결과다.

이처럼 지폐 속에는 인물초상의 역사와 함께 한 나라의 정체성까지 엿볼 수 있는 쏠쏠함이 있다. 그리고 지폐 제조기술과 함께 발전하는(?) 위폐 범죄의 수법, 이를 방지하기 위한 신기술의 개발은 컴퓨터와 컴퓨터바이러스 간의 전쟁을 보는 듯하다.

미국의 대북 압박 수단으로 최근 이용하고 있는 슈퍼노트(100달러권) 위폐 논란에서 보여지 듯 위폐 제조와 유통은 한 나라를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다. 그러나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위폐 제조는 ''예술적 경지''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정교해 지고 있다.

12세기 영국에서는 위폐가 범람하자 헨리 1세는 조폐기관 직원들의 위폐제조 가담 혐의를 잡고 직원 100여명의 손목을 자른 일화가 있다. 위폐에 대한 응징이며 동시에 비극인 셈이다. 최근에는 인쇄기술의 발달로 전문가들도 위폐를 단박에 알아내기 힘들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14가지의 위조방지 장치가 들어 있는 스위스 지폐는 위폐범들이 몹시 싫어하는 돈인 셈이다. 지폐는 위폐에 의해 가끔 일생을 마감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지만 그 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역사는 어떤 위폐도 위조할 수 없는 영원불변성을 담고 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이유로 지폐에 인물 초상을 넣은 것이 아닐까.

경제부에 몸담았던 현직 기자가 엮은 책은 가장 세속적인 가치(돈) 속에서 철학과 문화적 가치(인물과 사상)를 끄집어냄으로써 ''돈''의 중요성을 새삼 깨우치게 한다. 매일 접하는 흔한 소재를 세계사와 버무림으로써 맛난 비빔밥이 됐다. 책을 다 읽을 무렵 느껴지는 포만감은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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