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과 노벨novel의 결혼: 근대 중국의 소설 이론 재편 서남동양학술총서 16
이보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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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른바 반영론에서 요구하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전통적 사유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낯선 것이었을 성싶다. 전통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대단원주의,’ 전통 시론의 핵심인 ‘온유돈후…’의 시교… 등은 우주적 ‘화해…’라는 상상을 환기시킴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게끔 했다. 20세기 1920년대 중반 이후 반제국주의의 과제가 아무리 절실했다고 하더라도 구호성의 ‘혁명 문학’에 그렇게 쉽게 넘어갔던 것과, 사회주의 체제 시설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같은 체제의 구소련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정 또한 이와 무관할 수 없다고 하겠다. (22)

중국 내부로, 주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론이 서구적 근대화가 세계사적 근대화의 유일한 도정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됐다는 점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폴 코헨도 스스로 인정했듯이 중국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은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한 분석을 약화시킬 뿐더러 그것을 도리어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중국에서 유형처럼 출판되고 있는 ‘지방 문학사’가 근대화 과정에서의 특정 지방의 특권이나 역할을 과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등, ‘중심-주변’의 논리를 오히려 강화하는 데로 빠지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또한 ‘억압된 현대성’에 대한 복원은 중국근현대 문학사의 ‘실상’을 가림으로써 또 다른 ‘억압’을 낳고 있다. 누가 뭐라고 사더라도 중국 근현대 문학사는 좌익 문학의 주류성에 의해 지배되어온 것이 엄연하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만청 시기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실제 역사를 은폐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것을 왜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말이다. 국내의 연구자들이 ‘다양성’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가상되는 개념으로 결론짓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 속에 있다 하겠다. (35)

그런데 소설 ‘이론’에 대한 연구라고 했지만 왕꾸어웨이의 <홍루몽 평론…>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서…, 발문…이거나 신문 광고 형식을 띠고 있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론’의 구성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글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테면 ‘근대’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비평’이나 ‘이론’에 미치지 못하는 직관에 의지한 ‘감상’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인 글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단순함’ 속에서 역사적 의미에서의 ‘동력학’을 읽어내야 한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만청은 말할 것도 없고 5.4, 그리고 신시기에 씌어진 글들이 지니고 있는 외면적인 ‘졸렬함’은 외국인 독자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이 당혹감은 그와 같은 ‘졸렬한 글’들이 중국 문화의 ‘생명’을 이어주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과 동시에 맛보게 되는 감정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어쩌면 직관적 감상적 비평의 함의를 제대로 읽어내는 길이 중국적 ‘문학’의 진정한 함의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이며, 동시에 ‘제도’로서 지나치게 자율화되어버린, 그리하여 인문학의 사명을 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서구적 근대 문학 개념을 반성적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적 진단을 가져보기도 한다. (44)

청이 세워질 당시만 해도 신사의 계층적 성격은 대다수가 지주였으나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행정 전문가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신사의 자치권이 차츰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달리 말하면 다음 세기의 정치 세력이 될 자격을 하나하나 갖추어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만청 개혁의 주창자들 중에 지방의 신사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명 청 이래의 권력 분점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하겠다. 이들은 기군, 구호 사업, 지방 관개 공사, 공공 질서의 보존 등의 역할을 맡으면서 정치 수업을 착실히 쌓아나갔던 것이다. 청말 백련교도의 난은 물론이고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왕권이 이들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에서 신사들이 독립적인 군사 기구까지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7)

꺼자오꾸앙…이 평가한대로, 불교의 ‘개공…’ ‘유식…’은 주체의 ‘자기 동일성에 대한 집착…’을 와해시켜 고유 관념을 해소하고 지식인들의 사유의 개방을 촉진시켜주었다. 다시 말하면 지고지상의 지배담론을 부정하고 새로운 틀을 중건할 기점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 문화의 최대 이점은,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중국 정통 학문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구 문화를 흔쾌히 받아들이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었다는 데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불교 문화권은 유가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 사이에 있었으므로 불가 사상은 서…도 아니고 중…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중국의 대승 불교는 당대 이래 이미 중국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70)

20세기 초의 중국인들은 반봉건과 반제국주의라는 양자 사이에서 반봉건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새로운 것’으로서의 ‘서’에 대한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 사유의 독특한 점은 전통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하여 새로운 세기를 열겠다는 열망이 대단히 강렬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20세기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을 조절하는 기제는 ‘동’에 있었다는 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것’이 ‘동’을 조절하는 일방적인 주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88)

언어와 문자가 합일된 상태는 한갓 몽상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와 문자 사이에 놓인 만리장성을 제거하려는 시도 자체를 헛된 것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고 한다면, 20세기 초 지식인들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양자의 분리를 당연시했던 고전 시대의 상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언어와 문자의 분리가 인간의 감수성을 어떻게 제한하고, 또 그것을 표현해내는 데 얼마나 장애가 되는가 하는 점은 전혀 안중에 없다. 실제로 고문으로 이러한 것들—인간의 감수성, 실제적으로 지식인의 감수성—은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백화는 다만 ‘대중성’이라는 목표 속에서만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40)

그런데 루쉰의 "이용하지 않는 것의 쓰임(不用之用)"과 왕꾸어웨이의 "무용의 쓰임(無用之用)" 사이의 갖고 다름을 잘 새겨 따져볼 만하다. 축자적으로 살펴보면 후자는 무용 그 자체가 바로 유용이라는 말이며, 전자는 문학이 본래적으로 무용한가의 여부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측면이 있으며 그 유용함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통해서 유용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즉 문학의 도구적 사용에 대한 의식적인 부정을 통하여 참다운 ‘소용’에 도달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하겠다. 문학의 무용함을 전제했을 때 빠지기 십상인 ‘유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근간이 바로 이 ‘불용’이라는 사고 속에 담겨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161)

따라서 서구 근대적 인간형이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하여 자신의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이른바 시민의 ‘공공 영역’을 형성해나간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근대’적 인간형은 보다 자각적으로 전체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선택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오히려 필연적으로—시민의 ‘공공 영역’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근대’적 영웅은 전자의 부정적 측면인 ‘단자…’화된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게 가지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으나, 민족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에 대한 보다 철저한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아Q’의 열근성을 극복한 인물이 아니라 집단에 쉽게 굴복하는 <아Q정전>이 예기한 대로, ‘아Q’ 그 자체로 되돌아가기 십상이었음을 그들의 현대사가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252)

소설 이론가들은 "내면의 발견," 혹은 주관성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가 있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의식적인‘ 거부라고 하는 것은 만명 이래 주관성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고 있었고 <홍루몽>이 작품으로써 그것을 반영하고 있었음에도 외려 외면하려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소설 이론가들의 ‘여성적인 것‘에 대한 배제 전략은 적어도 ‘중국 현대(문학)사‘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하겠다. 1920년대 낭만주의 경향이 한때 중국을 휩쓸어갈 때 잠시 잠깐 그것에 탐닉하려는 시도들이 있긴 했지만 이내 ‘혁명의 물결‘ 속에서 여성 스스로마저도 그것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국 여성 해방론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정치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억압된 ‘여성적인 것‘을 복원하는 데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중국의 ‘근대‘ 소설은 근대 서구 사회에서 소설을 ‘가정‘ 혹은 ‘개인‘의 독서로 묶어두기 위해서 서정성 내면성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흘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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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사람 2 -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 22인의 목소리 그리고 이야기 작가라는 사람 2
엘리너 와크텔 외 지음, 허진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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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어 안에서 음악을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24)

저는 책을 쓸 때마다 그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여야 하는지, 그것이 타당한지, 무엇과 관계가 있거나 없을지, 어떻게 출판될지, 사람들이 읽긴 읽을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책 속의 문장들 안에서만 살고, 거기서 나오는 것은 책이 끝날 때뿐입니다. (34)

당시에는 이것이 징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F를 받아서 기분이 무척 나빴지요. 규칙을 어겼으니까요. 저는 나중에서야 규칙 위반이 픽션의 생명이자 영혼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금지된 것을 접하지 않으면 가치 있는 것을 쓸 수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41)

"나는 노스다코타 주 작은 마을에서, 한때 와페턴-시세턴 수족의 땅이었지만 오랫동안 인디언이 아닌 농부들에게 임대되고 팔린 땅에서 자랐다. 우리 가족 아홉 명은 마을의 거의 끝부분에 살았다…. 몇 킬로미터나 걸어도 밭, 더 많은 밭, 그리고 완벽하게 죽 뻗은 흙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글을 쓸 때 그 마을의 경계—하늘, 높이 솟아 대열을 계속 바꾸는 구름들, 너무나 아름다운 빛을 받은 텅 빈 허공—가 자주 보인다." (44)

저는 제가 얼마나 깊이 헤엄쳐 들어가고 싶은지 압니다. 그곳이 바로 저의 자리예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읽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저는 제가 책을 읽을 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따라서 책을 쓸 때 무엇을 원하는지도 압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오락을 위한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 저는 카프카를 무척 좋아합니다. 카프카는 책이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 영혼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요. 저 역시 책에서 그런 것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읽고 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책을 쓰는 유일한 이유 역시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죠. (81)

우리 문화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소유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입니다. 소설이 하는 일은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지, 그것을 정말 소유할 수 있는지, 소유 대상이 자율과 주체성을 주장하면 어떻게 되는지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유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지요. 하지만 소유 대상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전환이자 세상의 새로운 재건입니다. (99)

저는 아주 심오한 의미에서 셰익스피어가 우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셰익스피어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가 된 것 같습니다. ...문학에서 등장인물이 자기들끼리 말을 엿듣거나 엿들은 말을 갑자기 떠올리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독백이든 방백이든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든, 인물들이 엿듣기를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늘 그렇습니다. 혼잣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우리가 하는 말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거나, 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 충격을 받거나, 우리의 말 때문에 불행하거나 수치스러워집니다. ... 저는 그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해서 우리를 깜짝 놀랄 만큼 바꾸어 놓았는지 알려주는 단서 혹은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우리 내면에서 점점 자라는 자아라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는 조금 전의 주장으로 돌아가죠. (134)

그런 다음 에드먼드는 제가 절대 잊지 못할 놀라운 새 단어를 말합니다. ... "그러나 에드먼드는 사랑받았도다!" 그런 다음 에드먼드는 자신의 말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삶을 갈망한다. 내 본성은 그렇지 않건만 좋은 일을 하고 싶다." 그는 바깥으로 실려나가 무대 밖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는 에드먼드가 죽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 자신도 모릅니다. 애드먼드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되돌렸는지 아닌지 모른 채 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변화를 나타내지요. 극에서 자기 내면을 고찰하는 것은 정말 새로운 특징입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객관화한 결과이지요. 잊을 수 없을 만큼 독창적인 특징,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136)

제가 생각할 때 작가가 발전하는 방식은 가족과 무척 관계가 많습니다. 나중에 작가가 되는 아이는 부모님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모두와 절친한 친구 같은 사이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제일 책임감이 강하고, 기억을 잘하고, 의식적으로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아이죠. 심리적으로 가족이 사라지지 않도록 유지할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 아이들에게 가족의 생존은 일종의 임무이고, 그것은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하려고 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죠. 우리가 연락을 계속 하든 그렇지 않든 제일 첫 단위인 가족은 끝이 나고, 우리 모두는 성인으로서 그 상실에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상실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가 처음 가진 집과, 그리고 그 집을 배신하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과 항상 씨름을 하고 있어요. (163)

네, 저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면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머릿속에서 삶을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만들지 않는다면 저에게 삶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얇게 느껴질 겁니다. 삶은 적당한 모양을 취하고 있지 않아요. 제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하루하루가 엉망으로 쌓여 있었을 겁니다. 삶에는 다른 차원이, 스스로의 생각에 모양과 형태와 유머를 주는 다른 차원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정말로 느껴요. 작가가 아니고, 그런 차원이 없고, 이런 식으로 세상에 대해 자신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생각만 해도 공포에 질립니다. (256)

그러므로 저는 좋든 나쁘든 미국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제가 온 곳에 대해서 쓰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라면 어딘가에 망명 중이라고 하겠어요. 그게 미국의 멋진 점이죠. 미국에서는 스스로 망명자가 될 수 있어요. 남은 평생 미국에 살면서도 원래의 자신으로 남을 수 있죠. 미국은 그걸 허락해 줘요. 제 생각에 권리장전 외에는 모든 미국인이 동의하는 사나의 미국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권리장전은 정체성이 아니죠. 그건 사고방식이고 누구든 어디서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어요. (261)

그리고 아시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잖아요. "이게 내 이름이야"라고 말한 순간부터 친구들은 전부 그 이름으로 저를 불렀어요. 누구도 저에게 그게 제 본명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다들 그냥 받아들였지요. 미국이니까요. 여기서는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미국은 이 세상에 커다란 선물이에요. (273)

이런 식으로 단어 하나만으로도 차이를 알 수 있으니 훨씬 더 복잡한 것들--구문론, 다른 단어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과 당연하세 여겨지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농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다시 배워야 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다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 배우는 것이지요. 그전까지 제가 쓴 책은 부르주아나 노동자, 지식인, 예술가에 대한 것이었지 농민에 대한 글을 아니었으니까요. (303)

"삶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 나은 것에 대한 갈망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힘들 것이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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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즐거움 단순함의 즐거움
프랜신 제이 지음, 신예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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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재는 경험을 대신하지 않는다.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면 캠핑 장비, 스포츠용품, 물놀이 장난감으로 창고를 가득 채울 필요가 없다. 산더미 같은 뜨개실, 가득 쌓인 요리책, 몇 상자씩 되는 미술용품이 있다고 해서 창의성이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고 개인적으로 성자아시키는 데 극히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활동 그 자체다. (32)

자신이 가진 물건을 비판적인 눈길로 검토해보라. 우리 과거를 기념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대변하며, 상상의 자아에게 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안됐지만 이런 물건에 공간과 시간, 에너지를 너무 많이 바치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지 못한다.
기억과 꿈, 야망은 물건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담겨 있다는 걸 기억해야만 한다. (32)

잠시 숨을 돌리고 우리가 청소년 시절에 얼마나 근심 걱정 없이 행복했는지 추억에 잠겨보자.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그때가 물건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었던 시기일 것이다. 당시의 삶은 한결 단순했다. 담보 대출도, 자동차 할부금도, 보험에 들 모터보트도 없었으니까. 배우고 살아가며 즐겁게 지내는 것이 우리가 가진 물건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세상에는 무한한 기회가 열려 있었고 무엇이든 가능했다! 이제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그런 기쁨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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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부자들 - 100세 인생, 평생월급 500만원 만들기
이영주 지음 / 새로운제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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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500만원의 평생월급을 준비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택마련, 자녀교육을 선택하고 노후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월 500만원의 노후를 준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진다. 주택마련, 자녀교육 중 하나를 포기하면 된다.
...
내 집에 대해 욕심을 가지면 더 넓은 집, 더 좋은 집, 시내 중심에 있는 집을 사야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집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들이 더 들어간다. 내 집을 갖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상황에 맞는 집을 갖자는 것이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작더라도 행복한 노후를 위해 양보하자는 것이다. (6)

셋째,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 연금 수령액이 적다. 65세에 1억원의 주택을 담보로 종신연금 수령시 매월 27만원을 받게 된다. 참고로 동일한 조건에서 즉시연금은 40만원 정도를 수령할 수 있다.
...
따라서 주택연금은 풍요로운 노후를 위한 준비방법이라기보다는 집 한 채 말고는 노후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 선택해야 하는 방법이다. 또한 보유한 주택가격이 4~5억원 이상이라면 현재 주택에 거주하면서 주택연금을 받기보다는 주택가격이 저렴한 곳으로 이사한 후 주택연금과 즉시연금을 병행하여 노후를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66)

당당한 노후는 財가 아닌 産에서 나온다. (208)

행복한 노후를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평생 끊이지 않는 소득産을 준비하자. 이것이 바로 산産테크이다. 재테크가 통장에 있는 돈을 불려가는 것, 부동산이 폭등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산테크는 평생 할 일과 평생소득을 준비하는 것이다.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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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아름다운 집 인테리어 룰 - 동선.스타일링.수납
미즈코시 미에코 지음, 서영 옮김 / 이아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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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도 기본이 중요. 세부적인 리폼법이 아니라 언제든 기준 삼아 체크할 큰 원칙들 정리해 주고 샘플로 나온 집들 꾸밈새도 차분하고 정갈한 스타일이라 좋았음. 내가 기억할 것은 1) 평생 함께 할 가구를 찾아라 2) 동선을 최적화하는 구조 짜라 3) 공/사 공간 분리하라 4) 아이 스팟 창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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