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풍경 -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4년 3월
장바구니담기


이번에는 내 인생을 바꾼 사람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 싶다. -10쪽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하찮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 권위자가 됐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 일부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인간이 덜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인간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의 대리인의 역할을 향상시키지 않았고, 정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역사상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역사를 사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묻는 세속적 자각이 생겨났다. -22쪽

카를 읽어보면, ... 마르크 블로크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과학을 역사가가 지향해야 할 모델로 보았으나, 그것은 역사가가 더욱 더 과학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든지 혹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보기에 과학자가 역사학적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 과거에도 늘 그런 형태로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또한 그 물체와 유기체가 언제나 동일한 형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해왔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과학자는 과정에서 구조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과학에 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 그렇다면 역사는 과학인가? 나는 예일 대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았는데, 그중 한 학생의 대답이 일리가 있었다. 그는 "그것보다 어떤 과학이 역사적인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를 판별하는 기준은 실질적인 반복 가능성--실험실에서 실험을 다시 돌릴 수 있는 것--을 가상적 반복 가능성과 구분하는 선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그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67쪽

푸앵카레의 통찰력이 위대했다는 것은 선형적 관계와 비선형적 관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동일한 시스템이라도 그 안에서 단순성과 복잡성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애덤스는 이것이 역사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다가, 그만 두 손을 들어버렸다. 이 도깨비 같은 상황을 자기가 아는 과학 언어로 특징지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덤스는 푸앵카레의 작업이 후일 과학이 새로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푸앵카레가 제시한 새로운 길이란, 예측 가능한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을 구별하는 것,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축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변수 간의 상호종속성을 인정하고 즐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결국 과학이란 역사와 대단히 닮은 것이었다. -121쪽

그러나 굴드가 제기한 바와 같이, 전술한 견해들은 미래 예측이 아주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들이 다루려는 복잡계에서는 과거를 테이프 돌리듯 재실행하더라도 두 번 다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를 단순화하겠다는 환원주의는 복잡계에서는 쓸모가 없으며, 우리는 여기서 다시 옛날 식의 서술적 역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라는 과학 개념이 역사가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과학자가--또한 대부분의 역사가조차--인정했던 것보다도 더 세련된 연구 도구로서 새로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28쪽

이와 반대로, 역사가는 전혀 추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방법론적으로 자기네들의 섬 안에 행복하게 안주해왔다. 대다수 역사가가 그런 추세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수평선을 세심히 바라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마르크 블로크나 E.H.카와 같은 소수의 역사가만이 다음의 역설을 알게 되었다. 인간사라고는 전혀 다루지 않는 '순수'과학이라는 배가 역사가를 향해 다가온 반면, 정작 사회의 과학을 만들겠다고 떠들어대던 배는 역사가의 시야에서 멀어져깄다는 역설을 목격하 것이다. 그러나 블로크는 미처 이런 주장을 확대해 나가기도 전에 1944년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의 손에 죽고 말았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개정판에서 이런 주장을 해보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 역시 이 과업과 관련된 단편적인 메모만을 남긴 채 1982년 세상을 떠났다. -141쪽

역사란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나름대로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신세대 역사가는 오래된 문제에 새로운 해답을 내는 데 만족하지 말고 문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역사적 문제의식이란 담보할 수 없는 강물과 같아서, 설혹 일정 기간 단일 주제를 연구하는 동일한 역사가라 할지라도, 오래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면 그 문제가 예전과 다름을 깨닫는다. -15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

관객이 자신의 연극에 도취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던 브레히트의 철학을 두 세기 앞서 선취한 자가 바로 디드로다. 많은 작가들이 독자들이 작품에 푹 빠져들기를 바랐던 반면, 디드로는 작가에 대한 독자의 기대에 번번히 맞서며 독자와 끊임없이 논쟁하겠다는 확고한 정신을 갖고 있었다. <운명론자 자크>는 독자를 실망시키고 놀라게 하면서 지연된 서사와 변덕스러운 형식으로 소설 구조의 가능성을 저 멀리까지 시험해 보는 진귀한 작품이다. 그는 진실한표현을 강조하는 프랑스 내 사조에 반발하여 영국 문학에서 시도된 실험적 문학들을 옹호하였고, 더 근본적으로는 소설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기존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가기를 원했는데, 이 맥락에서 그는 <운명론자 자크>의 후반부에서 <트리스트럼 샌디>를 아예 베껴 썼노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운명론자 자크> <트리스트럼 샌디>의 유사성은 더 깊은 데 있고, 이 더 깊은 층위에 놓인 여러 이슈들을 점검해 보면 둘의 입장이 다시 선명하게 갈리는 지점이 존재한다. 여하튼 이 두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현대의 맥락에서 보면 운명이라는 단어로 수렴되는데, 주의할 것은 운명론자 자크가 대변하는 운명론은 자진하여 일을 맡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엄격한 결정론과 개별자의 자율의지는 서로를 증명하며 강화한다. 쉽게 말해 운명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개별자가 굳건한 의지를 갖고 전심전력으로 실천을 해봐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연성을 체념이나 수동성과 연결 짓는 흔한 사고와는 다르게, 디드로는 필연성과 자유를 짝패 개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운명론자 자크>결정론과 자유라는 주제로 손쉽게 한정되는 작품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의 전개는 본질적으로 산만하고 제멋대로인데, 바로 이런 형식이 디드로의 생각을 대변해준다. 그의 글쓰기는 삶도, 진실도, 철학도, 문학도 결코 한 마디 교훈으로 축소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렇게 우화화된 삶, 진실, 철학, 문학에 디드로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디드로의 글쓰기야말로 진정으로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 김희영 역, 민음사, 201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1)

 

Ø  국내에 번역된 디드로의 작품

, 많아~

<백과사전>, 이충훈역, (b), 2014

<미의 기원과 본성>, 이충훈역, (b), 2012

<배우에 관한 역설>, 주미사역, 문지, 2001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규현역, 창비, 2010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라모의 조카>, 환현상역, 고대출판부, 2006

<달랑베르의 꿈>, 김계영역, 한길사, 2006

<수녀>, 이봉지역, 지만지, 2013

<맹인에 관한 서한>, 이은주역, 지만지, 2010

<입싼 보석들>, 정상현역, 고대출판부, 2007

<회화론>, 백찬욱역, 영남대출판부, 2004

<쌀롱>, 백찬욱역, 영남대출판부, 2007

 

* <자크와 그의 주인: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 밀란 쿤데라 저, 백선희 역, 민음사, 2013 (밀란 쿤데라 전집 15)

 

Ø  참고할 작품, 자료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

 

 

자마리아 오르테스

18세기 합리주의적 유럽인들은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하되 오직 인간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섭리만은 거부했다. 이러한 세속 사회를 교회 안으로부터 바라보았으되 신이 아니라 이성의 수호자가 되기를 원했던 베네치아의 수도승 오르테스는 형식논리와 양적 계산을 통하여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파악하고 싶어 했다. 그가 보기에 이 힘은 욕망과 쾌락이었고, 욕망을 좇는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계산을 할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되고, 이 능력이야말로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오르테스는 계산법이 계층과 계급에 따라 달라지며 활동과 민족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난다고 가정하고 이를 공시적 구조로 보며 분석해 나갔다. 이 분석은 분명 보편학문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지만 경험의 구체성에 대한 고려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여러 유명한 쾌락주의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오르테스는 수학광이었고 금욕적이었으며 합리적 방법론에 대한 확신 밑으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 밖에 없음을 깨달은 자의 우울함이 짙게 피어 올랐다. 그는 인간이라는 종을 경멸하면서도 자신이 그 종의 일원임을 자각하였고, 이 종이 느끼는 기쁨과 고통을 실질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계량화하여 보다 나은 결과를 얻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인간의 삶에 있어서 쾌락과 고통의 계산>, <음악극에 대하여>

 

Ø  국내에 번역된 오르테스의 작품

  없음.

 

Ø  참고할 작품, 자료

  스키너의 행동주의와 이오윌슨의 사회생물학

 

 

스탕달과 먼지구름으로서의 지식

선 굵은 서사를 추구하는 열정적 소설가로서의 스탕달의 이미지는 과연 적절한가? 그것은 분명 적절하다. 다만 이 이미지만 적절한 것은 아니며 그것 아래에는 다른 것이 있다.

스탕달의 <연애론>은 패턴화와 추상성을 지향하는 철학도, 순환하는 에너지와 영속하는 세계를 재현하는 소설도 아닌, 불안정하고 불연속하는 점으로서의 어떤 시-공간성, 의 이질적이고 미세한 표면을 있는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현상학적 방법론을 택한다. 이 방법론은 그것으로써 탐구하려는 주제에 맞추어 개발된 것이다. 이 책이 탐구한 주제인 정념으로서의 사랑은 비합리적으로 생겨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먼지구름 같은 것이었다. <연애론>의 방법론은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에서도 이어진다. 이 자서전에서 스탕달은 가장 모호하고도 사적인 순간들의 이미지에 닿는 점상형 기억들을 좇아 다닌다.

그럼 이 먼지구름 같은 스탕달의 의식으로부터 어떻게 저 단선적이고 개성 강한 인물들이 탄생한 것일까? 그들은 모두 스탕달의 증식하는 자아, 그 단호한 얼굴 밑에 존재하는 들끓는 가능성들이 육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인물들 자신도 온전히자기 자신일 수는 없다. 작품 속에서 그들 하나하나는 자신에게 잠재하는 에너지들을 실현하기 위하여 다시 가면을 써야 한다. 가면은 수준을 달리하면서 수평으로 연속된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순간들에 대한 스탕달의 몰두는, 작품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의 지도를 명확하게 그리고 그 지도에 인물들을 세밀하게 배치하는 글쓰기에서도 드러난다. 또 스탕달의 문학 전체를 두고 보면, 그가 머물렀던 실제 공간들이 각기 다른 잠재성의 결정으로서 각자의 문학적 역할과 위치를 배당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밀라노, 파리, 런던, 그리고 독일이라는 불연속하는 질적 차이의 공간들을 오가면서 스탕달이 추구하고 때로 누렸고 결국 글을 통해 되살렸던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고 그나마 오래 지속될 일도 없는 먼지구름 같이 덧없는 행복이었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연애론>(권오석역, 홍신문화사, 2010)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스탕달이 50세에 쓴 자서전이라는데 번역본 못 찾겠음

<뤼시앵 뢰뱅>, 스탕달의 작품 중 가장 원숙한 자라는 데 번역본 못 찾겠음

<에고티슴 회상록>, 스탕달의 파리 회고록(밀라노에서 실연한 뒤 파리로 돌아와서의 기록), 역시 못 찾겠음

 

Ø  국내에 번역된 스탕달의 작품

<적과 흑>, 여러 종이 있음

<파르마의 수도원>, 2, 운원수 외 역, 민음사, 2001

 

Ø  참고할 작품, 자료

몽테뉴 <수상록> 중 일부 신체의 자발성에 관한 부분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의 새로운 독자들을 위하여

1839년 발표된 <파르마의 수도원>은 스탕달 자신의 예언 대로 40년 뒤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이 책이야말로 최고의 소설임을 알아볼 새로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칼비노는 이 책을 평생 애독하였는데, 그 자신이 정치적 변혁기의 아이들로서 이 작품의 모험적 인물들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르마의 수도원>은 왕정복고를 이룬 부르봉 왕가와 손 잡고 국가로 변모해 가는 이탈리아를 그리고 있다. 스탕달은 실제 인물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의 주인공 파브리스를 창조하였다. 파브리스는 이탈리아에 갓 도착한 프랑스인 장교(스탕달)의 눈에 비친 생기로 빛나는 이탈리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물론 스탕달도 천천히 이러한 얼굴 뒤에 감추어진 불안과 의심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파브리스는 감옥에 갇혀서도 절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해맑으며, 감옥은 곧 그가 사랑과 지지를 나누는 최적의 환경으로 화한다. 감옥에서 내려다 보이는 북부이탈리아의 풍경은 장차 펼쳐질 이탈리아의 역사를 예견하며, 파브리스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는 여러 인물들은 현실 정치 속에서 순식간에 부패하고 마는 정신세상 어디서나 전개되는 일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점은 이 모든 것들을 참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파르마의 수도원>

 

 

발자크와 소설로서의 도시

발자크는 파리라는 대도시의 구역과 거리들이 그토록 다양하면서도 전형적인 파리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고 있음을 소설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소설에서 진짜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신비롭고도 강렬한 입김을 뿜어내는 살아 있는 괴물, 파리였다. 도시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조건이자 현대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 발자크는 <페라거스>를 포함한 많은 작품들을 통하여 이 도시의 소설화 실험을 계속한다. 다만 발자크의 소설로서의 도시에서 각 인물의 얼굴은 아직 선명한 윤곽을 가지고 있는데, 불과 20년 뒤 보들레르가 시로써 도시를 창조할 때, 군중은 이미 익명의 흐릿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발자크로부터 보들레르로 이어지는 도시 미학의 탯줄을 눈 밝은 두 독자였던 파베세와 벤야민은 선명하게 감지한 바 있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페라거스>, <르뷔 드 파리>, <금빛 눈을 한 소녀> à 다 번역 안 된 듯.

 

Ø  국내에 번역된 발자크의 작품

  생각보다 많지 않음. 고리오 영감, 인간희극, 사촌 베트, 잃어버린 환상, 나귀 가죽, 골짜기의 백합 등.

 

 

찰스 디킨스의 <우리 서로의 친구>

칼비노는 <우리 서로의 친구>를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는다. 천상 대중문학가이었던 디킨스는 이 작품에서 대도시의 풍경에 대한 탁월한 묘사를 통해 그 풍경이 말없이 의미하는 것, 즉 계급들 간, 그리고 계급들 내부의 갈등을 비할 바 없이 섬세하게 표현해내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악과 선 사이에 그어진 가상의 수평선 위에 위치한 강렬한 인상을 지닌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소름 끼치는 죄악, 계급 상승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광기, 잔인함을 간신히 가리는 위선과 가식을 더없이 실감나게 형상화하는 악인들을 배경으로, 이들에 맞서는 빛천상의 순수함과 흔들림 없는 선의지, 그리고 타고난 슬기로움의 인물들이 독자의 관습적 기대를 깨뜨리는 기이한 육체들을 움직이며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실력을 발휘한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우리 서로의 친구> 번역이 안 되었나? 못 찾겠음!

 

Ø  국내에 번역된 디킨스의 작품

  다수!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 등

 

Ø  참고할 작품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

 

 

플로베르의 <세 편의 이야기>

이 조그만 책에는 플로베르 문학의 정수에 속하는 특질들인 원초성, 구어성, 민간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시에 이 짧은 책은 가시성의 역사가 플로베르에게서 도달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재현예술은 인간과 사물을 가시적으로 만드는데, 플로베르 이전의 소설에서는 오직 인간의 마음만이 가시화되었고, 플로베르 이후 반 세기부터는 영화가 소설과는 다른 종류의 가시성을 제안한다. 플로베르의 문학이 달성한 것은, 독자가 인물의 마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의 펜 아래 단어와 이미지가 이상적으로 결합되면서, 인물의 마음이 인식하는 일상의 현실, 세상, 그리고 그 마음이 언제나 이미 비추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역사까지도 우리는 느끼게 된다. 심지어 <수도사 성 쥘리앵의 전설>에서는 쥘리앵의 눈으로 자연을 보는 데서 더 나아가 쥘리앵을 둘러싸고 압박하는 야생의 눈이를 테면 부엉이의 눈으로 인간세상을 보게 된다. 타인 나아가 타자와의 일체화는 플로베르가 평생을 걸쳐, 아무런 종교에도 기대지 않고, 추구해 간 미학적 목표였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수도사 성 쥘리앵의 전설>, <순박한 마음>, <에로디아스> à 서문당의 <플로베르 단편집>(서문문고12, 1996)에 다 실려 있음.

 

Ø  국내에 번역된 플로베르의 작품

  당연히 다수. 보봐리부인, 감정교육, 통상관념사전, 성 안투안느의 유혹 등.

 

 

톨스토이의 <두 경기병>

칼비노는 <두 경기병>을 톨스토이 문학의 추형(雛形)으로서 주목한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에서 독자들이 인생이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톨스토이의 세심한 철학이 조형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변화의 표면을 따라가는 문학에 반대하면서 변화의 본질, 즉 사람과 사회를 움직여 역사가 만들어지는 원동력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두 경기병> 19세기 초반과 19세기 중반에 속하는 두 사내둘은 부자지간이다를 통하여 그 힘의 변화를 포착한다. 아버지 터빈 백작은 거침 없이 행동하며 위압적으로 명령하고 자연스럽게 연애한다. 관습적 도덕 따위는 그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는 도덕을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도덕을 만든다. 그의 야만성은 미신적이지도 악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러시아 귀족사회의 원초적 건강성을 상징한다. 소설의 나머지 반은 반 세기 뒤 터빈의 아들을 그린다. 그는 아버지에 비해 온화하고 예의 바르지만, 실상은 옹졸하고 불안과 의심이 많으며 매사에 서투른 인물로 아버지의 자연스러움과 위대함에 비추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정교한 철학과 진보의 대가를 저울질하고자 하였고, 이 작은 실험은 훗날 <전쟁과 평화>에서 잊을 수 없을 만큼 장엄한 표현을 얻게 된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두 경기병>: 작가정신에서 2010년 나온 <톨스토이 중단편선2>에 수록되어 있음

 

Ø  국내에 번역된 톨스토이의 작품

  당연히 다수

 

 

마크 트웨인의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마크 트웨인은 천생 대중작가이었고 스스로도 이 점을 자랑스러워하였으나 이는 반()지성주의적인 관습의 맹종과는 무관하다. 어떤 논자들은 다재다능했던 마크 트웨인이 소설의 형식만큼은 관습을 따랐다고 믿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독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화자를 통해 미국 구어를 문학 속으로 들여왔으며, 글 속에서 어떠한 주제와 상황으로도 유머를 창조해냈고, 독자를 속이는 글쓰기의 달인이었고, 각종 비문학(예를 들면 통조림 공급 보고 문서나 소득세 신고서)을 문학으로 들여오는 데 대가적인 창조성을 발휘하였다. 이로써 미국인들의 구체적인 일상은 비로소 실감나는 문학적 표현을 얻게 되었는데, 트웨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일상을 거꾸로 추상화하여 표현하는 실험 또한 멈추지 않았다.

  이 두 교차하는 경향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이다. 점잖고 정돈된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마을 해들리버그 전체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어떤 보이지 않는 자가 마을로 막대한 황금을 보내자 주민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일순간에 타락한다. 돈은 위대한 현대문학 작가들이 천착하는 주제 중의 하나인데, 이 작품에서 돈은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에 사로잡혀 몸싸움을 하게 만들지만 사실 그 자체는 텅 빈 것이 뿐이다. 해들리버그의 타락은 인간의 타락과 신의 은총이라는 오래된 이야기의 복제판에 불과하다. 은총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타락을 경험할 필요가 있고, 이런 한바탕 소동을 통하여 오히려 부의 정직성이라는 미국적 신념은 다시 한 번 지켜진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칼비노는 지적한다, 마크 트웨인이 감지하는 미국의 죄는 돈이 아닌 다른 데에 있다는 의심을 거두기가 어렵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The Man That Corrupted Hadleyburg>, 국역본 없음

 

Ø  국내에 번역된 마크 트웨인의 작품

  당연히 다수 + 자서전

 

Ø  참고할 작품, 자료

<3만 달러짜리 유산>, 마크 트웨인, 국역본 미상

<100만 파운드 은행수표>, 마크 트웨인, <>(에디터, 2012)에 실렸음

<헨리 애덤스의 교육>, 국역본 없음

버스터 키튼: 미국의 무성영화 배우, 찾아서 볼 것.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

이 소설은 헨리 제임스의 다른 여러 작품들과 유사하게 유럽이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는 미국인들의 모습과 거꾸로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유럽의 모습을 다룬다. 유럽은 문화와 책임의식을 지닌 귀족 사회와 문란하고 속된 사회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신생국가 미국에서 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생명력이 넘치고 순수하지만, 유럽과 비슷하게 윈터번 같이 청교도적이고 실용적인 유형과 밀러가 사람들과 같은 자유로운 유형의 둘로 나뉜다. 이야기는 윈터번의 눈을 통해 전달된다. 유럽을 여행하는 미국인들은 장소에 따라 상이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은 스위스를 거쳐 로마로 가는데, 깨끗한 자연과 금욕적 분위기로 미국인들의 자제력을 다잡아주었던 스위스와 달리 로마는 그 특유의 유해한 분위기로 밀러가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데이지는 추문의 주인공이 되지만 그녀를 구해줄 만한 사람은 출현하지 않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이윽고 여러 가지 불행의 가능성 중에서 결국 실현되어 그녀에게 죽음을 선사한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가능성이었던 말라리아의 발병이었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009 (다른 번역본들도 있음)

 

Ø  국내에 번역된 헨레 제임스의 작품

  <여인의 초상>, <나사의 회전>, <아메리칸>, <밝은 모퉁이 집>, <워싱턴 스퀘어>, <친구 중의 친구>, <에스펀의 러브 레터>

 

Ø  참고할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만, 홍성광 역, 열린책들, 2009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해변의 별장>

<해변의 별장>에서는 형제처럼 서로 닮았고 친구이자 적이기도 한 두 남자가 스코틀렌드 해안가를 배경으로 일종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 스티븐슨은 주어진 지형을 가장 즐거운 놀이터로 만들기 위해 천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처럼 스코틀랜드라는 배경에 활력을 불어넣기 딱 알맞은 장치들을 소설에 배치한다(두 여성혐오자 남성을 경쟁자로 만드는 천사 같은 여인, 이 여인의 아버지는 순도 100% 악당, 두 남자가 모두 공개적으로는 적대하지만 양심상으로는 동정해마지 않는 비밀결사 등).

스티븐슨은 이 작품을 잡지에 발표한 뒤, 화자와 주변 인물들의 거리를 재조정하여 다시발표한다. 한 출판사는 이 작품은 실패작이며 그나마 그 첫 번째 판본이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비노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그는 스티븐슨의 두 번째 판본이 더 우월하다고 보며, 두 판본의 차이는 바로 작가 스티븐슨의 짙은 망설임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스티븐슨의 이러한 망설임은 어떤 면에서,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잘 알지만 어떻게든 다시 불러오고 싶은 유년 시절을 다룬 이 이야기 속에서 그가 자기 자신과 벌이고 있는 숨바꼭질 놀이와 근원적으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해변의 별장> (1996년 펀앤런이라는 곳에서 번역출간하였으나 현재는 절판)

 

Ø  국내에 번역된 스티븐슨의 작품

  <보물선>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포함하여 다수!

 

Ø  찾아볼 것

카르보나리 당: 19세기 이탈리아의 정치 비밀 결사

 

 

파스테르나크와 혁명

칼비노의 <닥터 지바고> 읽기는 작품과 작가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작품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평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방가르드 조류(국제적 성격을 가진)와 관계 속에서 시를 썼던 파스테르나크는 조국의 문학 전통으로 돌아가 톨스토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향하면서 조국의 혁명을 그려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이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시할 것으로, 그러니까 혁명 전 시대에 대한 진한 향수를 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다. 그러나 칼비노가 보기에 작품은 과거를 우회하여 독자와 작가 공통의 현재,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세계를 끊임없이 환기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파스테르나크가 매달리는 문제는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이 작품에서 역사는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띤다. 1. 그것은 자연과 함께 인간의 삶을 감싸고 규정하는 하나의 연속체이며 신성하고 초월적인 어떤 것이다. 2. 인간은 이 자연과 역사를 변화시킬 만한 힘이 없거나, 그러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파스테르나크에게 바로 그 신성한 역사의 시간이었다.

파스테르나크가 보기에 역사에서 나쁜것은 추상성인데, 그 의미는 우연적이며 진정성을 가진 삶을 짓밟는다는 것이다. 이 추상적 역사는 곧 전쟁(삶에 대한 인위적인 파괴, 바로 1-2차 대전)과 변질된 혁명이다. 파스테르나크에게 혁명은 역사와 개인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는 것인데(전쟁의 추상성에 대한 반발로서의 혁명), 당연히 이러한 혁명이란 혁명초기에 엿보인 진정한 존재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이상적 사회를 말할 뿐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파스테르나크는 크게 현실 혁명에서 나타난 야만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혁명의 이상을 냉각시키는 관료주의라는 두 측면에서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이 야만성과 관료주의가 바로 생명을 죽이는 추상성의 내용들이다.

야만적인 폭력은 세계대전을 겪은 20세기 작가들이 천착한 공통의 대주제로서 작가들은 각자 폭력에 대한 고유한 태도를 갖고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폭력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로서 집중한 것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폭력에 지치고 그것을 증오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는 또한 공식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계급도 믿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반()이데올로기적인 본질과 특유의 양면성을 꿰뚫어 본다. <닥터 지바고>에서 작가의 공감을 받는 인물들은 모두 인텔리겐차들이며, 그들 중 하나인 지바고는 마지못해 혁명에 동참하게 되지만 그 냉혹함과 잔인성을 스스로 받아들이지도 용서하지도 않으며 그 속에서 살아남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지바고를 진정한 마음을 가진 숭고한 인물이라 믿고 있지만 정작 독자가 그 인물에게 반하는 이유는 그의 평범성망설임, 신중함, 조금씩 사랑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진정한 영웅은 오히려 온갖 끔찍함을 부드러움으로 헤쳐나가는 여성 라라이다. 라라는 곧 러시아를 의미하며,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인 코마로프스키, 안티포프, 지바고는 러시아에 주어진 세 가지 가능성이라고 읽을 수 있다. 로마로프스키로부터 야만성과 야비함을 포함한 세상의 맨 얼굴을 경험한 그녀는 안티포프와 지바고라는 폭력과 비폭력의 각 상징이 되는 두 남자보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그만큼 삶에 더욱 충실하며 스스로 삶-생명의 상징이다.

칼비노는 자신이 문학에서 찾아왔던 것은 지바고처럼 신성한 역사를 다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아니라 역사에 적극 뛰어들어 그것을 바꾸는 인간이었지만, 위대한 문학작품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인간 삶의 표상 그 자체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동시에 그는 묻는다, 러시아 사회는 이 작품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아니 과연 답할 수는 있을 것인가를.

 

Ø  이 장에서 다루어지는 작품

<닥터 지바고>

 

Ø  국내에 번역된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지바고 외)

  <어느 시인의 죽음>, 안정효 역, 까치글방, 2011

<삶은 나의 누이>, 임혜영 역, 지만지, 2010

<스펙토르스키/이야기>, 임혜영 역, 지만지, 2013

 

Ø  참고할 작품

체호프 단편, <스텝the steppe> à 국역본 안 찾아짐. 구글에서 영역본은 쉽게 찾아짐.

숄로호프, <고요한 돈 강>, 동서문화사월드북, 2007

숄로호프, <숄로호프 단편선>, 민음사, 2008
 
파데예프, <범람>
à 국역본 없는 듯

체사레 파베세, <닭이 울기 전에> à 국역본 없는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환상공포물과 이론에 단련된 눈으로 보면 조끔 구식일 수 있지만, 정신에서 환상이 점하는 자리에 대한 문학적 탐험의 선구성을 인정할 수 있고, 탐험의 내용도 그만하면 흥미롭다. 어쨌든 귀신과 귀신아님 사이의 텐션을 끝까지 갖고 가니까. 이해하기 힘든 건 이런 번역을 그대로 출판하는 용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미유동 - 청나라 정부의 조기유학 프로젝트
후징초.첸강 지음, 이정선.김승룡 옮김 / 시니북스 / 2005년 5월
품절


(1872년 롱홍이 예일대학 총장에게 보낸 편지) 참으로 좋은 소식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작는 10월 1일, 그 어떤 압력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이미 어린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 완전한 교육을 받도록 할 계획을 최종 승인했습니다. 차후에 이 아이들은 중국으로 돌아와 정부의 각 부처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아이들이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군사, 항해, 의학, 법률, 건축공정 등을 배우기를 희망합니다. 특히 과학 방면에서는 화학, 자연철학, 지질학, 천문학 등을 학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고, 그곳에 영주할 수도 없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공부를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학비 및 생활비 일체를 정부에서 보조받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나 애너폴리스의 사관생도가 정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12쪽

유동들의 별명
- 차이사오지: 늙은 유태인
- 황카이자: 쾌활한 잭
- 쾅릉꽝: 양키 쾅
- 량루하오: 냉혈한
- 차이팅깐: 싸움꾼
......-136쪽

신 등이 조사한 바, 유동들은 어린 나이에 머나먼 타국으로 갔기에 행보를 종잡을 수 없고 그곳 습속에 물들더니 끝내 생각조차 본국과 멀어졌습니다. ... 외국의 좋은 기술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할 뿐더러 저들의 경박한 습속에 일찌감치 오염되어, 이미 유학사무국의 초김을 읽은 지 오래입니다. ... 점차적으로 철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완전히 사무국의 직무를 정지하는 것이 더욱 나을 듯합니다. 마땅히 남양대신과 북양대신에게 칙명을 내리시어, 각 국에서 사람을 써야 할 즈음에 유학생들을 모두 소환하십시오. -198쪽

유학프로젝트가 중단된 원인은 사실 그다지 또렷하지 않다. 아마도 중국 관리들의 근거 없는 부담감이 원인인 듯하다. 그들은 엄격한 전통교육을 받지 않은 청년들이 장래에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 노력할지 확신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무엇이 중국 정부로 하여금 이런 유학프로젝트를 시행하도록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이 유학 사업에 대하여 중국 정부가 룽홍 박사와 같은 원대한 안목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2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미유동 - 청나라 정부의 조기유학 프로젝트
후징초.첸강 지음, 이정선.김승룡 옮김 / 시니북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미국 시절이 저 유동들에게는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을까. 갑작스런 귀국 뒤로는 전쟁과 청조의 멸망, 건국을 둘러싼 이념 대립과 내전 속에서 시대가 안겨주는 무게를 끝없이 감당해야만 했다. 아시아의 근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 보시길. 다만 제목을 포함하여 몇몇 번역문제가 걸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