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서는 신분에 따라 먹는 음식에 대해서 세분화된 원칙이 있었다. ... 요리에 관한 계층별 원칙 중 일부는 신흥 부유층의 등장과 그로 인한 사회적 경계의 침범에 대비한 기성 상류층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신분에 따라 의복의 유형을 규정한 일명 사치 금지령, 혹은 윤리 규제 법령도 실상 그런 불편한 심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 실제로 음식에 대한 선택권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계급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편의적인 예측을 심화시켰다. ... 이에 대응하여 어느 프랑스 사회학자는 상류층이 하층보다 더 예리한 지적 능력을 소유한 것도 그들이 쇠고기와 돼지고기가 아니라 자고처럼 귀한 진미를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 더 이상 자고가 예전처럼 중요한 사회적 구별 수단이 아닌 지금도 이런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16)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도 내놓는다. 진정성을 향한 움직임이 전 세계 주요 수도에 거주하는 부유한 아마추어 미식 전문가들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며, 동시에 풍부한 요리 전통이 있지만 세계 경제 구조에서 아직 특권을 받지 못한 많은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그 식당이 진정성이 담긴 비약적 발전을 하여 여러 측면에서 에티오피아 국민들에게 유럽과 미국에서 대중들에게 제공하는 것, 그 이상의 혜택을 선사한다면 하나의 성과로 인정받을 것이다. 생태계 보호, 생물의 다양성과 더불어 아시아와 남미의 미식 전통과 관습이 부활하고 이런 요인들이 서로 결합함으로써 진정성을 향한 운동이 더욱 확산될 희망적인 조짐이 보인다. 먹을거리와 그 먹을 거리의 미래는 미각적 취향의 사안이자 동시에 인류 자유의 문제이다. 우리가 식품을 모아서 처리하고 팔고 사고 음식을 만드는 방식은 필연적인 산업의 형태이자,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인지 표출하는 일상의 예술인 것이다. (33)
중국 음식 문화의 정수는 다양한 형태의 판과 차이를 창의적으로 조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 중,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가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 차려 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경우에 해당했다. (108)
9세기 초반, 전설의 칼리프 하로운 알 라시드 통치 기간에 바그다드의 상류층은 이미 다양한 음식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단지 비싼 음식을 먹는 일이 아니라, 요리 기술에 관한 책을 읽고 쓰는 일, 심지어 요리 그 자체에 매료된 것이다. 그와 같은 쾌락주의 분위기 속에서, 좋은 요리는 컴컴한 부엌에서 노예 하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이 아니라, 심지어 칼리프에게도 합당한 고급스런 활동으로 발전했다. (140)
우리는 중세 무슬림들은 단맛이라면 무조건 즐겨 먹었다는 것만 알아 두자. 그들이 가장 즐겨 먹던 디저트로는 과일부터 견과류까지 갖가지로 속을 채운 일종의 크레페인 카타이프, 아몬드 간 것, 설탕, 장미수로 만든 마르지판과 비슷한 사탕과자 팔루드하즈, 그리고 밀가루, 달걀, 설탕, 가끔 버터를 넣어 만든 케이크 카크ka'k가 있었다(카크를 보면, 현대 어원학자들이 영어 cake의 어원을 '어떤 것의 덩어리'라는 뜻의 고대 노르웨이 어로 파악한 것은 실수였다. 오히려 cake는 페르시아 어와 아랍어 ka'k와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이는 심지어 케이크를 의미하는 고대 수메르 어와도 일치한다). 바그다드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동시에 사랑받던 또 하나의 패스트리는 카나와트였다. (159)
이런 이유 때문에 근대 초기의 유럽의 음식 역사의 중심에는 일련의 역설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음식 문화는 혁명적 변화에 직면하여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여러 가지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무너지기도 했다. 또한 유럽 대륙 전역에서 엘리트 계급이 갖고 있던 국제적 미각은 민족 국가 간의 요리 관습과 부딪히면서 분열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한편, 인문주의에 근거한 지식인의 문화는 고전 시대의 음식과 식단 유산을 유지하고 부활시키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를 역설하는 '근대'라는 압박은 새로운 음식과 지식 증가로 이어졌다. (197)
유럽 내 설탕의 성공은 카리브 해 노예 노동력의 착취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유럽의 음식 유산을 바꾼 여러 방식 중에 중상주의가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됨을 알게 해 준다. 플랜테이션 경제와 그에 따른 노예 사회가 막 시작될 때는 설탕의 증가세에 반대하는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채식주의자이자 노예 제도 반대 작가인 토머스 트라이언(1634-1703)은 노예제의 기반인 설탕 플랜테이션이 아프리카 노동자들에게 안긴 고통과 상처를 생각한다면 결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절 트라이언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조차 울리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219)
그렇다고 프렌치 퀴진이 계몽 시대에 다른 모든 형태의 요리를 절멸시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의 웅장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 어떤 나라의 요리 관습도 해 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그 시대 요리를 대하는 유럽의 사고 방식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요리 관습과 유럽의 오트 퀴진 간에는 특별하고도 독특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 유대 관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이 관계는 역시 프랑스 혁명 이전에 정립된 프랑스 철학 문학과 유럽 고급 문화 간의 관계보다 훨씬 더 굳건하게 유지되어 온 것 같다. (230)
19세기 말 시골 가정에 필요한 특별한 지역 요리책들이 나왔는데, 이런 형태의 요리 문학이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독일의 모든 미식 문화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최고의 레스토랑들은 평판을 생각해 항상 프랑스 요리를 메뉴에 넣고 싶어 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지방색이 강한 부르주아 퀴진을 주 메뉴로 삼았다. 지역 요리를 즐기려는 이런 트렌드는 점점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하나의 지향점을 필요로 하는 욕구와 부분적으로 맞물렸다. 그런 세상 속에서 국가주의, 세계주의 뿐 아니라 지리적사회적 이동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만들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그와 같은 지역적 정체성을 표출하는 이상적인 수단이었다. 19세기에 5만 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오랫동안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루었던 모국의 레시피를 함게 가져간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모국의 언어는 잃어 버렸을지라도 오랜 요리 메뉴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와 똑같은 형상을 과거 독일로 이주했던 오늘날 터키 가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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