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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의 책:
오버스토리
l 2019년 7월 29일(토) 아침 9시반, 서현역
카페
방학이 막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다. 사회인인데 방학과 무슨 관계냐 하면, H가 그 동안 토요일에 대학원
수업을 청강했기 때문. 그 수업이 종료된 덕분에 토요일에 쉽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벌써 한 해의 반이 갔다며 함께 탄식하였다.
H가 이번 책이 재미있었다고 말해주니
기뻤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방 평대에서 보고 덥석 집어 든 녀석이라 더욱 그렇다. 왜 집어 들었냐 하면 ‘환경 소설’로서
어떻게 정보 및 계몽성과 문학성을 조화시키는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대한 것은 정보/계몽성은 거의 느껴지지 못할 만큼 소설 안에 녹아 있는 것이었다. 읽어보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나무들의 삶이라는 아주 새로운 콘텍스트로 독자들을 끌어오기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이 너무 뚜렷하여 생경할 정도로 설명적인 부분들이 꽤 있었다.
반면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부분들도 있다. 일단 일단위 초단위로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스케일이 아니라 나무의
스케일—최소 기백년의 시간과 일정 삼림군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버드아이뷰—을 접하고 그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하면 나무의
관점으로 인간사가 다시 쓰여지는 것이니, 이 책은 미국 환경사, 환경을
테마로 한 미국 현대사 (미국 자체가 현대이지만)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중국 이민자 가족을 데려와 20세기
전반부 세계사 스케치를 시도한 부분은, 시도는 갸륵하나 결과는 참 어설펐다는 데에 H도 나도 의견을 같이 하였다.)
숲의
식물들이 제각각이면서도 자연의 섭리 안에 있듯이, 이 소설의 스토리라인을 아술아슬 이어가는 9명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서로 하등의 관련이 없이 살아온 그들은
각자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나무의 삶에 눈을 뜨게 되고 나무와 함께 하는 삶에 투신하는 과정에서 한 순간 조우한다. 그리고 흩어진다, 영원히. 그들이
‘투사’가 되는 과정에서 계몽성은 전혀 없다. 그들 각자는 너무나
다른 계기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나무를 보는 눈, 그들과
대화하는 가슴을 거의 물리적 수준으로 장착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들
중 우리가 특별히 사랑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과학자—H가
그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그녀가 속절없이 재난을 당하고 자연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발 없는 숲이 다가오는 화마를 어쩌지 못하고 다 타지만 또 시간과 함께 다시 생명의 기지개를 켜는 것과 닮았다. 나에게는 해피엔딩을 맞은 저 과학자보다 더 마음을 울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결국’ 범죄자로 생을 마치게 된 교수이다. 속세에서 이룬 모든 것을 잃게 된 순간에 드러난 그의 의연함은, 숲에
대한 그의 사랑이 한 때의 말과 치정이 아니라 몸 자체, 삶 자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