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교실에서 히라가나를 막 가르치려는데 누군가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 ...... 아이들에게 40분이든 50분이든 교실에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공책에 필기하는 일은 일종의 `고역`이다. 아이들은 이 `고역`을 교사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고통`이나 `인내`라는 형태를 취한 `화폐`를 교사에게 지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어떤 재화와 서비스를 `등가교환`하는지를 아이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41)
예전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을 한 중학생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던 평론가들이 할 말을 잃었던 사건이 있었다.... ......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라고 물은 중학생은 `자신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일 가능성`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왜 교육을 받아야 하나요?"라고 묻는 초등학생은 `자신이 배움의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만이 `예상 밖`의 질문을 입에 올릴 수 있다. (44)
"나는 정말 어떤 인간인가?"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가?"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질문을 쉽게 입에 올리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 만약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면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묻는 편이 훨씬 유용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외국까지 가서,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고, 그 결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고로 `나를 찾는 여행`의 진짜 목적은 `만남`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나에 대한 지금까지의 외부평가를 재설정하는 데 있다고 본다. (83)
"얼간이들이 사람을 몰라보는 거야." 그래서 얼간이들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서 외부평가를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잘될 리가 없다. ... 만약 `진짜 나`라는 것이 있다면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 내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기능을 다한 연후에나 주위 사람들이 인정함으로써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려면 "나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선언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의 역할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었을 때 비로소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기 찾기`라는 행위를 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을 포함한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85)
앞에서 리스크 사회에서 노력과 성과 간의 상관관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상관관계는 전 사회적으로 균일하게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으며, 어느 한 계층에서 집중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즉, 리스크 사회에서 리스크는 모든 사회 성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계층별로 리스크의 강도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노력과 성과가 상관하지 않는 리스크 사회에고, 그렇기 때문에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는 사람들은 가장 많은 리스크를 떠안고 있는 계층인 것이다. (100)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을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진다`는 것을 원리로 하여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121)
자립한 사람은 이런 것이 아니다. 자립은 속인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자립했어"라고 어깨에 힘줘봤자 이것만으로는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사람의 판단과 언행이 적절하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서 조언과 지원과 연대를 요구하러 오면 그 사람을 자립한 사람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 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자립한 사람은 적이든, 친구이든, 보호해야 할 사람이든 많은 타인을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조형하고, 해체하고, 재개정해서 격을 높여가는 사람이 바로 자립한 사람이다. (130)
나에 대해 좋은 감정 가지기feeling good about oneself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주창해 온 교육 이념의 하나다. ... 하지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는 것은 그들이 속하는 사회집단에서 지배적인 가치관에 일치할 때뿐이다. 예를 들어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가 예술성에 높은 평가를 주는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운동능력이나 사업 감각에 높은 평가를 주는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면 그 아이는 그다지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아이의 `자신감`은 아이가 속한 사회집단의 가치관과 행동준칙에 맞추지 못하면 `자신감`을 갖기 어렵다. 그리고 미국과 같이 소수 민족 그룹과 사회계급에 따라 집단별로 가치관과 행동 준칙에 확연한 차이가 있는 사회에서 자신을 갖고 싶어가는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적응할 가능성이 있다. (135)
`파랑새`를 찾으러 간 사람들에게는 눈 치우는 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주목받지 않는 일에 대한 혐오와 모멸이 동기가 되어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를 비틀거리며 배회한다.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창조적이고 보람 있는 일`이란 요컨대 당사자에게 커다란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는 일이다. 하지만 `눈 치우는 일`은 당사자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억지하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그 중요성을 헤아리지 못한다. ...... 그저 일에서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구하는 삶이 최고라는 말은 매스미디어에 흘러넘치지만, `주변 사람의 불이익을 사전에 배제하는`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일도 인간이 집단으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155)
조급한 경향은 앞에서 언급한 `유아기에 자기 형성의 완료`와 `눈 치우는 일`에 대한 무관심과도 통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징후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은 오로지 `무시간 모델`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 노동주체와 소비주체의 차이는 한마디로, 노동주체는 다른 사람드로부터 승인을 받을 때까지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인할 수 없고, 소비주체는 다른사람으로부터 승인을 받기에 앞서 화폐를 손에 쥔 시점에 이미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점에 있다. (160)
하지만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익히는 최고의 자질은 바로 이런 힘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자질을 향상시키는 능력. 교육의 목표는 이 능력을 습득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육의 `입구`에서도 `출구`에서도 시장원리가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 때문에 아이들도, 졸업생을 맞이하는 사회도 배움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배움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은 노동의 의미도 모른다. (191)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도 본래는 이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데 열중하는 이유는 교환이 안정적으로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교환의 장을 밑에서 받쳐주는 여러 제도들과 인간적 자질을 개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환 자체보다 오히려 교환의 장을 두텁게 해주는 것, 바로 여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교환의 목적은 등가의 물품을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싼값으로 고가의 물품을 사들이는 것도 아닌, 교환을 계기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197)
음악을 듣고 나서 리듬과 멜로디를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들리지 않게 된 악음`이 아직 남아 있고, `아직 들리지 않는 악음`의 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들려오는 악음만으로는 음악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음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음이 이미 예감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 중에 있을 때만 음악은 음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듣는 것은 `배움`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시간의 역동 속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4)
산다는 것은 이른바 하나의 곡을 일생 동안 연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한 갖가지 행동과 말의 진짜 의미는 그 곡을 마지막까지 듣지 않으면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개관사정...`, 즉 관뚜껑을 덮은 후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죽은 후에 비로소 그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모든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육예의 하나로 `음악`을 들었던 이유는 `시간 의식을 갖기`,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라는 것을 알기`가 지성의 기초라는 것을 고대의 성현은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205)
저는 제자로서 스승을 모시고 자신의 능력을 무한으로 초월하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무한으로 이어지는 긴 흐름 속에서 저는 하나의 고리였습니다. ... 제자가 스승의 기량을 뛰어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승을 뛰어넘어도 상관없습니다. 긴 사슬에는 큰 고리도 있고, 작은 고리도 있습니다. 두 개가 나란히 연결돼 있는 고리에 뒤에 것이 크다고 해도 사슬의 연속성에는 조금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가 "내가 스승을 뛰어넘었다"고 하면서 사슬에서 빠져나와 하나의 고리일 것을 그만두면 그때는 문제가 달라지지요. ... 스승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아나킨은 성장을 멈추지만 스승은 초월할 수 없다고 믿는 오비원은 성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성장`은 계측 가능한 기량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일종의 개방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 안의 어딘가에 외부로 이어지는 `문`이 열러 있습니다. 나이를 먹든, 체력이 쇠퇴하든 항상 나와 다른 것, 나를 초월하는 것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받아서 다음 세대에게 흘려보냅니다. (
전후 60년 동안 일본 사회는 약자의 안전망이었던 중간적인 공동체를 계속해서 무너뜨렸습니다. 지역공동체, 친족, 주종관계, 사제관계 전부 다 무너뜨렸습니다. ...... 지금은 고립한 개인과 개인이 중간적인 완충지대 없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 어딘가에서 실패하는 일도 있고 병에 걸리기도 하며 천재지변이 일어나 피해를 입는 일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되었을 때는 역시 이런 `약한 인간`을 정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해 주는 친밀한 네트워크가 있어야 합니다. 지연 공동첻s, 혈연 공동체든 어쨌거나 우리는 공동의 사람들로 구성된 상호부조 조직을 갖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리스크 헤지에 대한 많은 말을 했지만, 친밀권은 리스크 헤지를 위한 공동체에 관한 것입니다. ... 약자가 약자인 것은 고립해 있기 때문입니다. (238)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경제적 합리성으로 대처해 보았자 소용없습니다. ... 전부다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자신의 논리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자신의 삶을 `이대로 좋다`고 여기지 않더라도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자기 안의 순수함을 계속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돈이라는 `당근`은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어릴 때 최초로 각인된 `소비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어놓는 정신적인 경험이 없으면 니트라는 삶은 아마 절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247)
미안한 말이지만, 방금 말씀하신 "일본사회는 균질적이고 미국사회는 가치관이 다양하다"는 이 말 자체가 일본인의 균질적인 사고의 `견본`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균질적인 사회도 좋지 않은가?"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래도 다양성의 싹이 있는 셈이고, "균질적이니까 다양화하자"는 발상이 이미 절망적일 정도로 균질적입니다. (257)
앞으로 한두 개 남기고, 대학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충 다한 것 같아서 가능하면 대학 교수는 은퇴하고, 여생을 도장에서 지역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보내려고 합니다. 에도 시대 지방에 있었던 작은 동네 도장과 같은 것을 세워서 거기서 무도를 하고 싶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무도로 성공하고 싶은 젊은이가 있으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집에서 지내기 어려운 아이들이 있으면 도장에서 재우고 먹이는 대신에 청소와 가사 일을 하도록 해서 서생으로 쓴다, 학문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으면 원서강독을 한다, 철학과 문학도 가르친다, 주말이 되면 친구들을 모아서 연회를 하고 마작을 하는 등 이런 열린 학교 같은, 서당 같은, 도장 같은 커뮤니티의 거점을 만들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친밀권`이 언급되었지만, 내가 구상하는 `도장공동체`도 일종의 친밀권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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