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 그러니까, 대학은 학생의 노동력으로 행정 공백을 채우고, 그들이 내야 할 수업료를 일부 감면해주는 방식으로 인건비 지출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13)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어떤 장면이 있다. 첫 회의 때 모두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남았는데, 저건 누구지 하는 표정을 몇몇 운영위원들이 지었다. 회의를 진행하려던 연구소장은 아, 저기는 그냥 연구소 잡일 돕는 아이입니다 회의 시작합니다, 라고 했다. 잠시 호감을 눈빛을 보이던 운영위원들은 곧 아 그래요, 하는 표정으로 회의 자료를 들추었다. 그것으로 내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진 셈이었다. "잡일 돕는 아이", 그것만큼 내 석사 시절을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었다. (35)
허벌이 소주를 한잔 사겠다고 해, 홍대 기찻길 근처의 삼겹살집으로 갔다. 생삼겹살이 1인분에 만 원이 넘었는데, 그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당연한 듯, 1인분에 5,000원 하는 벨기에산 냉동 삼겹살을 시켰다. 나는 그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편했고, 정말 친구를 만나는구나, 하는 느낌이 자연히 들었다. (71)
대학원 수업을 학부 수업보다 편하게 여기는 교수들이 많다. 어떤 교수는 대학원 수업인데 담배 한 대 태우면서 편하게 합시다, 하기도 했고 또 어떤 교수는 지방대까지 출강이 힘들다며 격주로 수업하는 것이 어떤지 묻기도 했다. 이런 것은 `편함`이 아니라 `우스움`이다. 학생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석사 3기생만 되어도 첫 주차에 오간 몇 마디로 교수에 대한 내부 평가가 끝난다. 그가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가, 주목할 만한 신진 연구자인가, 혹은 그에 준하는 성과를 곧 낼 만큼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우리와의 수업에 진지하게 임할 것인가. 둘 모두라면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고, 하나만 충족해도 그런대로 좋은 일이고, 모두 아니라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81)
그런데, `노동`에는 사람을 `성찰`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타인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또 다른 나를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저에게 내제된 어떤 원초적 욕구`였던 것 같습니다. ... 모두 존경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자각, 이것은 몸을 수고롭게 해 `노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느껴보지 못했을 경험이자 감정입니다. 그에 더해 노동의 시공간은, 인간과 나 자신에 대한 사유를 놀랄만큼 확장해주었습니다. 워시장에서 설거지를 하며 정말 많은 논문의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가끔은 어떤 문단 내용이 통째로 떠올라 꾹꾹 담아두었다가 퇴근하자마자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어떠한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후 어떠한 삶을 살든, 몸이 허락하는 적당한 `육체 노동`을 반드시 하며 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128)
강의를 시작했던 학기에, 나는 서울로 대중 인문학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인기가 많은 강사여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수강생만 매주 100명이 넘었다. ... 하지만 난 곧 강사에게 실망했다. 그의 시야가 고작 20여 명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위해 세 번이나 손을 들었지만, 한 번도 그의 시야에 들지 못했다. 강사의 선택은 무척이나 즉흥적이었다. 나뿐 아니라 선생님이 여길 좀 봐주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수강생들의 반응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곧 수강을 그만두었다. 내가 강단에 서기 이전이었다면 별로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은 나를 볼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163)
"저는 강의를 위한 필기구를 지참하는 것은 교수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필기구도 없이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여러 학생들이 내 눈치를 살폈다. ...... 중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님들은 칠판 밑에 분필이 없으면 주번을 불러 화를 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좋은 선생님들은 속주머니에서 정갈한 분필 클립을 꺼냈고, 오래 닳아 쓰기 힘든 분필에 보조구까지 달아 판서를 시작했다. 돌이켜 보니, 그것은 참 보기 좋은 멋스러움이었다. 교수자로서 가르칠 필기구를 직접 준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자세다. (225)
"교수님은 무척 행복해 보이세요."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왜지?" "강의를 할 때 교수님처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분반 친구들과 가끔 교수님의 이야기를 해요. 우리도 열심히 공부해서 후배들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그런데로 행복한 삶일 것 같다고요." (224)
담당하고 있는 강의의 학생들뿐 아니라, 지난 학기의 학생들이 연락해 오는 일도 많다. 주로 취업과 진학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들고 찾아온다. 취업 시즌에는 자기소개서 첨삭만 몇 건씩 한다. ... 그래도 그러한 요청이 번거롭거나 무례하다기보다는, 그저 감사하다. 종강하는 날 나는 언제나 "인생에서 글쓰기가 간절히 필요한 어느 날이 생기면 제가 돕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핸드폰 번호를 공개해왔다. 한 학기 강의로 만난 인연일 뿐이지만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조금 더 나은 자기소개서를 완성해 자신의 꿈에 한번 더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228)
그리고 강의실에서만큼은 그러한 선들을 잘라내는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 그렇게 `갑`이 된 학생들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 모든 타인을 갑으로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가며, 그러한 사유로서 시대와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모두의 의식에 내면화된 어떤 `괴물`이 균열을 보일 때, 함께 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료 연구자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후속 세대가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그리고 모든 청춘이 더 이상 아픔이나 노력을 강요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이처럼 아팠음을 모두 기억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기를."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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