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내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그와의 대화를 통해 엮은 이 한 권의 책으로 선입견과 잘못된 정보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이 싱가포르에 대해 새롭게 호기심을 품을 수 있도록 자극하고, 과거의 정치적 틀에서 탈피하여 참신한 시각으로 이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성공이든 실패든, 아니면 또 다른 측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한 번 평가를 내릴 기회를 주고 싶다는 곳이 이 책에 대한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44)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아버지와 비슷한 성격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 역시 다가서기 어렵고 농담이 잘 통하지 않으면서 리콴유와 같이 위협적으로 똑똑했다. 이후 뉴욕매거진과 타임지, 그리고 그밖에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언론사에서 일하면서도 나는 `아버지는 답을 알고 있다`를 신봉하는 고압적인 상사들과 지내야 했다. 그들 모두 명령 내리기를 좋아하고, 실수에는 가차 없고, 지나치게 까다로운 성격이면서 짜증날 정도로 똑똑했다. 그러나 내겐 그런 사람들과 편안히 지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리콴유도 그런 부류에 해당한다. (55)
민족, 또는 국적이 다른 집단이 서로를 잡아먹도록 그냥 방관하는 태도를 리콴유는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고립이 고착화되는 흐름을 막고 지속적으로 사회적 통합을 일구어나가야만 경제적 발전은 물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한다. (79)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도전하는 것은 리콴유의 실용주의적 원칙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다수가 선호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숭배도 어울리지 않는다. 리콴유는 스리랑카가 다수결 민주주의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떠한 정치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돌아가고 있기만 하다면 그는 절대 비판을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지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최소한 미국보다는 더 일관성 있어 보인다. 미국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라는 딱지를 붙일 때라야만 지지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비난은 물론 그보다 더 심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리콴유는 현실적인 기반이 부족한 정책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이유만으로 옹호하지도 않는다. (81)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가 바로 우리가 중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중국은 이미 뛰어난 인재들로 넘쳐나고 있고, 이제 그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닐 겁니다. 그 누구도 그들이 캠코더를 들고 싱가포르를 촬영하면서 우리 시스템을 공부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돕는 편이 낫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에 정치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96)
리콴유는 문화유산이라는 존재를 국가를 이루는 DNA로 보고 있다. 수술만 가지고는 DNA를 바꿀 수 없다. 환경 변화와 위기에 잘 대응해나간 문명들은 진화에 성공한 반면, 그러지 못한 문명들은 위축되거나 사라졌다. ... 1994년 인터뷰에서 리콴유는 문화는 운명이라고 하는 토인비적 견해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 견해는 그가 평론가들에게 종종 한 국가의 `출발점`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145)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강한 리더는 이를 활용하는 반면, 약한 리더는 변명에 급급하다. 리는 이념을 떠나 성과를 보여주는 인물을 선호한다. 그리고 초점이 단순하고 명백한 서구 인권단체들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위해 사업을 강행하는 군사정권은 물론, 싸움이 그칠 날 없는 의회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도 오로지 국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존경한다. 반면 실질적인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그 어떤 인물이나 체제도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것도 이념 자체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실용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173)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넘어갈 점은, 수하르토가 병실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외국의 고위 인사들이 거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음에도 리콴유만큼은 그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리가 찾아가고 2주일 만에 수하르토는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리는 수하르토가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분명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자신의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이 역시 전형적인 유교적 태도라고 여겨진다. (183)
먼저 리는 내게 인도네시아 부총리의 방문 때문에 늦어져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부총리는 최근 대통령과 갈등이 있었고 기와 관련하여 리콴유로부터 조언과 위로를 듣고자 싱가포르를 방문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동남아시아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인사들이 리의 의견과 조언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리콴유의 집무실은 세계적인,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VIP 정치인들이 찾는 외래진료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98)
리의 선조들이 겪었던 분명한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19세기의 유럽 국가들, 그중에서 특히 영국은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강요했다. 유럽 국가들로 인해 아직 완전히 썩어 들어가기 전, 중국은 아편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게 바로 아편전쟁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편전쟁을 알고 있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으며, 유럽 국가들 역시 역사 교과서에서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리콴유의 의식 맨 밑바닥에 자리를 잡고 그 불편한 역사적 진실은 틱 증상처럼, 또는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기침처럼 발작적으로 드러난다. ...... 싱가포르의 사형제도를 비난하는 미국 인권단체들의 격렬한 목소리에 리는 일체 대응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들이 과거에 영국 정부가 중국에 아편을 강요했던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무지하다고만 지적할 뿐이다. (220)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데 리가 고개를 저으며 먼저 말을 꺼낸다. "나는 요란하게 사람을 사귀는 그런 성격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번 맺은 우정은 보통 평생을 가는 편이죠." 어색한 그의 말이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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