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회계탐구
지현미.최은실 지음 / 삼영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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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따른 감가상각률도 함께 보여주다니 미 자동차 광고는 체계가 섰다. 합리적 소비를 가능케 해주는 정보 제공되면 실질 가치 있는 상품과 기업이 대접 받고 부실과 사기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줄어들 것. 그렇다면 세이브포인트 광고는 근본적 다시 설정해야. 대형병원 ABC시스템은 큰 고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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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방 - 4000명 부자의 방을 보고 알아낸 공간의 비밀
야노 케이조 지음, 김윤수 옮김 / 다산4.0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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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 집은 가족, 배우자, 애인. 그렇게 아끼고 가꿔라 2) 작은 소품 하나를 사도 아름다움이 제1조건 3) 화장실은 누워도 될 만큼 깨끗하게 4) 집안에 남에게 자랑할 만한 공간을 마련하고 타인과 나누라 5) 사람들을 초대하여 진심으로 삶을 공유하라 6) 잠자리가 명당이면 승리한다. 최적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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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방 - 4000명 부자의 방을 보고 알아낸 공간의 비밀
야노 케이조 지음, 김윤수 옮김 / 다산4.0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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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고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은 대체로 상담이나 미팅, 독서, 집필 등 일의 목적에 맞게 장소를 구분하여 이용한다. 창의력이 필요할 때, 깊이 집중해야 할 때,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을 때 등 각각의 목적에 따라 자신에게 잘 맞는 장소를 찾고 그곳을 적극 활용한다. (29)

CEO가 된 지금도 그녀의 초대는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집설계를 의뢰할 때도 여러 사람이 함게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자리에 최대한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사장이 몸소 사적인 공간을 내주어 마음을 열고 함께 식사를 하면 초대받은 사람들은 감동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면 서로 간에 유대감이 깊어지고 신뢰가 쌓인다. 경우에 따라 직원을 질책할 때도 개인적으로 집에 초대해 식사를 하며 부드럽게 타이르면 당사자 또한 기분 나빠하지 않고 `사장이 나를 진심으로 대해준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그녀가 사장으로 있는 보험회사 직원들은 그녀를 따르고 본받아 정직하게 영업하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 회사는 가족처럼 친절하게 보험을 추천해준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에서 매출 1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83)

왜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일과 인생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걸가? ...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일은 내가 스스로 한다`는 마음가짐이 습관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에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사실상 독립은 `사업을 하나 새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
놀랍게도 나는 계속 부모의 곁에 살면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을 잃어 일시적으로 본가에 들어가 사는 사람도 있다. 또 병든 부모를 모셔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2년 후에는 꼭 독립을 하겠다`는 식으로 기한을 정하는 편이 좋다. 처음에는 잠시만 본가에서 지낼 거라 생각해도 부모의 곁에서 살다 보면 의지하는 마음이 커져 좀처럼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99)

부자들은 집을 꿈을 이루기 위한 장소로 정의함과 동시에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행 투자`라고 생각한다. 선행 투자란, 현재 시점에서는 가치를 측정할 수 없지만 미래에 발생할 이득을 위해 투자하는 일을 말한다. 즉 지금 당장 주변 물건보다 싸서 혹은 역에서 가까워서러는 직접적인 가치로 집을 구하지 않고, `그곳에 살면서 내가 장차 이루고 싶은 일을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가치를 기준으로 집을 구입한다. (100)
......
최고의 장소에서 겪은 경험은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처럼 공간에 선행 투자하는 일은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최대의 자기 투자인 셈이다. (103)

내가 아는 유명한 상장 기업의 오너는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방에서 모든 소리를 차단한 채 잠을 잔다. 그는 일본이든 해외든 세계 어느 곳에 출장을 가더라도 호텔에 의뢰를 해 반드시 집과 동일한 수면 환경을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시간 안에 잠을 청하고 양질의 수면을 취한다.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지 탐욕스러우리만큼 잠에 집착하는 부자들의 일면일 뿐이다. 실제로 수면은 양기...가 아닌 음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은폐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편이 좋다. (134)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부자들은 집을 `인간관계를 다지고 강화하는 장소`로 여기고 사용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려면 집이나 별장에 초대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입을 모은다. 집은 사적인 공간으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행위는 곧 `마음을 연다`는 의미다. 사람은 응당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깊은 관계를 쌓을 수 있다. (136)

집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집을 통해 꿈을 이루는 부자들은 반드시 집 안에 자랑하고 싶은 장소나 물건을 마련해둔다. 그리고 누군가를 초대하면 "이것 좀 보세요"라며 그 장소로 안내한다.
......
또 집을 아주 좋아하는 부자들은 자랑하고 싶은 장소 외에도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 하나를 살 때조차 `자랑할 만한 것`을 구입하기 위해 심사숙고한다. `싸니까,` 금방 부서질 거라서`라는 이유로 타협하기보다는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촉이 올 정도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나야만 지갑을 연다. 자신의 주변에 좋아하는 물건이 가득 차 있으면 그로 인해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 더 의욕적으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1)

온도뿐만 아니라 습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느 계절이든 사람이 느끼는 가장 쾌적한 습도는 40~60퍼센트다. 습도를 관리하지 않으면 여름에는 70퍼센트 이상, 겨울에는 30퍼센트 이하가 되어 쉽게 불쾌해진다. 온도와 마찬가지고 습도 역시 건강과 관련이 깊다. (160)

내가 방문한 부자들의 집은 하나같이 화장실이 아주 깨끗했다. 어제 막 새 아파트로 이사온 양 반짝반짝 빛났고 누워서 잠을 잘 수도 있을 만큼 청결했다. 게다가 마치 남에게 드러내놓고 자랑이라도 할 기세로 공을 들였거나, 방이나 거실과 인테리어가 자연스럽게 통일되어 있었다. (166)

실제로 내가 만난 많은 부자들 중에는 화장실을 깨끗이 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남들이 꺼리는 화장실 청소를 묵묵히 함으로써 겸허한 태도를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도움을 받지 않았나 싶다. (167)

가까운 예부터 소개하자면, 그들은 마음에 드는 카페나 호텔 라운지 두세 군데를 정해두고 중요한 미팅 때마다 그곳을 이용한다. 또 자주 기차를 타고 출장을 간다면 `특실`을 예약해 깊은 생각이 필요한 업무나 기획거리를 처리한다. 출장이 잦은 관리직 종사자 중에는 아예 옆자리까지 모두 예약을 해서 철저히 집중할 수 있도록 사무실처럼 꾸미는 사람도 있다. ...
이처럼 내가 만난 성공한 부자들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 기획안을 작성해 승진했거나, 호텔 라운지에 가서 매년 새해 계획을 노트에 적거나,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거나, 피트니스 클럽에서 땀을 흘린 뒤 샤워를 하며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등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고 즐겨 찾는 외부 공간에서 성공의 밑바탕을 다졌다.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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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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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공작대에는 농민들로부터 비난과 모욕, 구타를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해야 할 희생자 수가 할당되었으며 이를 위해 증오로 가득 찬 분위기 속에서 수백 명의 농민들이 동원되었다. 200만 명에 육박하는 일명 <지주>들이 당과 가난자들 사이에 피로 맺어진 계약에 의해 숙청되었다. 지주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는 그들의 이웃보다 상황이 별반 나을 게 없는 이들도 많았다. 부주석인 류샤오치가 허베이 성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생매장을 당하거나 결박된 채 분시...를 당하거나 교살을 당했다. <어린 지주>라는 이름으로 어린아이들이 도륙되기도 했다. (10)

공산당 정권이 단순한 폭력과 위협만으로 수립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의 역사는 약속과 약속의 파기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잡기 전까지 구애 작전을 펼쳤다. 레닌과 볼셰피키당처럼 마오쩌둥은 각각의 불만 세력에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약속함으로써 정권을 잡았다. 농민에게는 땅을, 소수 민족에게는 독립을, 지식인에게는 자유를, 사업가에게는 사유 재산의 보호를, 노동자에게는 보다 높은 생활 수준을 약속했다. [여성에게는 성평등을 약속하기도 했지...] 중국 공산당은 신민주주의라는 기치 아래, 즉 가장 강력한 정적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에게 협력을 약속함으로써 다수를 규합했다. 통일 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민주당 같은 수많은 비공산주의 조직들이 공산등의 지배를 받으며 정권에 동조했다.
이러한 약속들은 하나씩 파기되었다. (12)

1948년 공산주의자들은 창춘을 5개월 동안 포위했고 도시의 성벽 안쪽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당 수비대를 굶주림 속으로 내몰았다만. 승리의 대가는 엄청났다. 봉쇄 기간 중 최소 16만 명의 민간인들이 아사했다. 해방 직후에 공산당 군대는 아무런 묘비나 명패, 간단한 표식도 없이 무수히 많은 시체를 합장했다. 중국이 평화롭게 해방을 맞았다는 수십 년에 걸친 선전 때문에 공산당이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8)

덩샤오핑이라는 냉정한 당 지도자의 주도로 공산당은 대략 500만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 때로는 아이들까지 징용했다. 그는 각각의 마을에 엄밀한 할당량을 배정하고 자신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곡괭이와 삽을 든 이들 징용자들은 전선으로 식량이나 각종 물건들을 지어 나르며 병참 지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부대의 맨 앞 에서 행군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총알받이로도 이용되었다. 비무장 상태의 마을 주민들이 물밀듯 밀려오자 국민당군은 당황했다. 당시 일반 사병으로 국민당군의 참호를 지켰던 린징우는 수년 뒤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총을 쏘다가 손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비무장한 일반인에게 총을 쏜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으며 눈을 감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사격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58)

라싸가 신중한 태도로 나오자 1950년 10월 7일에 4만 명의 공산군이 티베트로 진입했고 4,000미터의 산길을 달려 황량한 티베트 고원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창두에서 무장 저항군을 궤멸시키고 자신들의 통제를 받는 나약한 신정... 정부를 세웠다. 1947년 이래로 독립국이 된 인도는 바로 얼마 전 인민 공화국을 승인한 참이었다. 이전부터 중국 공산당을 옹호해 오던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는 티베트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거라며 세계를 안심시켰다. 이제 중국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와 네팔로 들어가는 주된 통로를 모두 장악했다. 영국은 인도가 독립한 이래로 완충 지대로서의 이 지역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고 따라서 중립을 유지했다. 유엔의 개입도 없었다. 그들은 한국 전쟁만으로도 정신없이 바빴다. (72)

"그들은 과묵하고 속내를 잘 터놓지 않았으며 냉담했다. 아울러 불합리할 정도로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으며 사람들과 잘 섞이지 않았다. 사교적이지 않았으며 개방적이거나 흉금을 터놓지도 않았다. 공적인 일처리에 있어서는 한기가 느껴질 만큼 옳았지만 그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뿐더러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 그들은 간섭을 용납하지 않았고 제안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조언은 참견으로 간주되었고 도움을 제안하는 행위는 주제넘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이 의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범죄자였다."
마리아노 에즈펠레타의 말처럼 그들은 사람들에게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라고 역설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행동에는 동료다운 면이 전혀 없었다. (103)
......
그럼에도 그들은 본토에서 진행 중인 변화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공산당에게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무시해 버렸다.> (109)

이처럼 풍부한 사회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지주(디주)>라고 불린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용어는 19세기 말 일본에서 도입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마오쩌둥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자신보다 부유한 일부 이웃들을 차이주, 즉 부를 의미하지만 경멸적인 암시는 없는 명칭으로 부르던 농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였다. 물론 <큰 뱃집(다두쯔)>이라는 말처럼 조롱이 가득 섞인 명칭으로 불리던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코넬 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중국의 농무...> 발행인 둥스진이 이 당시에 한 말처럼 <중국에는 <<지주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각종 위법 행위들이 성행하는 와중에 생각 없는 땅 주인들이 권력을 남용했을 거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에는 융커나 대지주 같은 지배적인 계급이 없었으며 농노제에 상응하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121)

토지 개혁은 공산당의 통제 아래 농촌 마을을 피로 물들였다. 공작대들은 곳곳에서 묵은 원한을 들추어냈고 분노를 부채질했으며 지역의 불만을 계급 간의 증오심으로 바꾸었다. 또한 시샘을 폭발시키도록 선동된 폭도들은 곳곳에서 전통적인 마을 지도자들의 재산을 제 것처럼 도용했다. 위안바오의 경우에는 초기에 땅과 피를 맞바꾼 마을 중 하나였지만 1947년과 1948년 사이에 모든 마을이 비슷한 의례를 거쳤다. 즉 마을 주민들이 계급으로 나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증오심으로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었으며, 희생자들은 모욕과 폭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때로는 죽임을 당했으며 가해자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 (124)

결과적으로 중국까지 오게 된 유럽 난민도 10만 명이 넘었다. 1917년 이후로 8만 명이 넘는 백러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1930년대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에서 약 2만 명의 유대인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들어온 지식과 경험, 전문성은 중화민국의 사회 구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미용실부터 제과점과 유대인 음식점까지 온갖 종류의 사업을 했다. 개중에는 중국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도 있었다. (177)

평화에 대한 기대와 함께 해방이 찾아왔다. 1949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도감 반 경계심 반으로 인민 해방군을 맞이하면서 10년 남짓한 전쟁을 끝으로 이제 그들의 삶과 가족, 사업을 재건하는 데 전념할 수 있길 기대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한국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국민들을 또 다른 전장으로 내몰았다. (207)

마오쩌둥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지만 병사들의 희생이 엄청났다.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곤두박질하는 극한의 날씨에서 전투가 치러졌는데 얼어 붙는 듯한 바람과 깊은 눈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빴다. 대부분의 병사들에게는 두툼한 신발이 없었다. ... 손이나 발이 동상에 걸린 병사들도 많았으며 부대원 전원이 동사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전체 군인의 3분의 2가 참호족에 시달렸고 나중에는 괴저로 발전하기도 했다. 병참선이 절망감이 들 정도로 확대되고 그마저도 먹이감을 찾아 떠도는 적 항공기에게 끊임없이 공격 받으면서 굶주림 또한 만연했다. 어떤 중대에서는 영양 결핍 때문에 병사들이 여섯 명 중 한 명꼴로 야맹증을 앓기도 했다. 여러 질명 중에서 이질이 가장 흔했으며 아편이 처방되었다. 들떴던 처음 몇 주가 지나자 병사들은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에 육체적 한계를 느꼈으며 사기가 떨어졌다. 일부 병사들은 너무 지쳐서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215)

많은 병사들이 국공 내전 중에 투항한 국민당 군대 출신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한반도의 사지로 몰면서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3년 전 쉬저우에서 공산군과 싸울 때 공산군이 인간 방패로 이용한 비무장 민간인에게 어쩔 수 없이 총을 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현대식 무기를 상대로 피와 살점을 뿌리면서 차례로 적의 총알을 소진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218)

애완견은 공중 보건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타락한 중산 계급의 상징으로서 비난을 받았다. 소수의 특권층 외교관이나 고위 관료를 주인으로 둔 경우를 제외하고 머지않아 도시에서는 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일부 농촌에서는 이후로도 수년 간 저항이 계속되었다. 1952년에는 광둥 성에서 성난 농민들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기를 듦으로써 개를 도태시키려는 운동이 역풍을 맞았다. 지주를 죽이는 것과 농민에게서 개를 빼앗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개는 집과 농작물, 가축을 지켜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거의 집집마다 개를 기르던 산둥 성에서도 이 운동은 연거푸 실패를 거듭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농민들도 정부의 시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241)

1944년까지 1만 5,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작원이나 스파이로 몰렸고 정체가 탄로났다. 마오쩌둥은 공포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면서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거리를 두는, 그럼에도 인정 많은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얼마 뒤 폭력성을 제한하기 위해 그가 개입했고 캉성에게 그 동안의 책임을 돌렸다. 공포 정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정풍 운동은 향후 펼쳐질 수많은 운동의 표본이 되었다. (248)

공산주의자들은 룽이런을 환영했다. 비단 룽이런뿐 아니라 1949년 당시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남아 있떤 수많은 상인과 은행가, 무역업자, 기업가를 환영했따. 신민주주의가 공식 구호였으며 공산당은 이제 <민족적 시민 계급>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람들에게 사유 재산제를 바탕으로 기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안심시켰다. 실제로는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 국가들처럼 신민주주의는 공산당이 이 초기 단계에서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세력들과 맺은 거짓 연합에 불과했다. 1949년에 마침내 정권을 잡았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극심한 인력 부족이 시달렸고 따라서 재계의 상공업적 능력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해방 뒤에도 존속한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동안 해오던 일에 계속 매진하면서 새로운 정부를 위해 일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 (260)

죽임을 당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버트 루는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 시기에는 외출을 삼갔음에도 그는 두 번이나 그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관을 맞추려면 몇 주 전에 미리 예약해야 했다. 장례식이 두 배로 늘면서 한 공간에서 동시에 여러 건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무에 목을 매지 못하도록 공원마다 순찰도 행해졌다.) 베이징에서는 봄이 되면서 얼었던 시후... 호수가 녹기 시작하자 한 장소에서만 무려 열 구 이상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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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니 참 좋다 - 적게 소유하는 삶을 선택한 오후미 부부의 미니멀리스트 일기
오후미 지음, 조미량 옮김 / 넥서스BOOKS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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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그림이 따뜻해서 좋고, 버리는 데 가족이 마음을 합하니 또 좋다. 둘이 이렇게 살면 13평 집도 괜찮지. 도입할 것: 1) 가족 간 `**일`을 기해 선물 주고 받지 않기 2) 남에게 주는 선물은 오래 간직할 것이 아니라 바로 쓰고 버리는 것으로 3) 제트워셔 구매 고려. 도입 안 해: 모든 책의 PDF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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