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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6일간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딱 하나 걸리는 것. 난 왜 이런 게 이리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그 섬나라에 가서 '이곳이 태평양 전쟁 때 점령지라서 사람들이 아직도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더라, 일본어도 많이 섞어 쓴다더라'고 하는 부분.
일본 사람들끼리는 이런 식의 말, 많이 하는 것, 안다. 일본이 전쟁에 패해서 전범재판도 받았고(패하지 않았다면 법정에도 안 섰고 유죄판결도 안 받았을 거라는 논리. 즉 패했으니까 유죄가 된것이라는 주장.) 게다가 그 재판도 아주 불공정하게 받았다, 는 식의 말도 많이 하고.
물론 독일 전범재판에 비하면 엄청 엉성하고 부조리한 재판이었다. 아시아의 가해자는 그야말로 대충 다룬 거지. 아시아의 피해자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었고. 아시아에 대한 무시보다 더 중요한 건 당시 미국이 중소를 이미 적으로 보면서 일본을 자신들의 기지, 즉 '내 편'으로 삼은 것과 관계 있는 거고, 그래서 일본 주요 전범들(천황 등)은 무사히 빠져나간 거고, 한마음으로 전쟁 수행하던 일본인들(물론 극소수의 내부 저항세력도 있긴 했다. 중국과 조선의 독립을 돕고자 만주로 와서 싸운 일본 공산주의자들 같은 이들. 초극소수.)은 금새 원자탄 피폭 운운하며 본인들이 바로 피해자라고만 믿어 버린 거고.
자기들끼리, 그저 지나가는 말로는, 이런 말 한 두번 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말로 끝나는 것과 다르게, 글로 남기는 것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저자의 감수성에 감동하며 즐겁게 책을 읽던 중이었기 때문에, 저자가 아무 생각 없이 흘리고 지나간 위의 말에 더욱 속이 상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들도 점령 당한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타민족에 점령 당하고 통치 당한 것이 좋아서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가 본인들의 어라고 젊은 시절이라 기억이 생생하고 그리운 점도 있고, 그래서 떠올리다 보면 일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설마 자신들을 통치한 그 시절의 일본과 그 연장선인 오늘의 일본을 좋아하는 것이겠나.
대만에 대해서도 잘못 아는 사람들 있던데, 대만도 역사 의식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국가로서의 일본 좋아 안 한다. 그 시절 일본도, 오늘의 일본도. 다만 분명히 일본에게는 아직도 살 것도 배울 것도 많고(이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님?), 지리적으로 가깝고, 식민지 시절부터 경제적으로도 긴밀히 연결된 부분 있고, 일본도 대만(은 일본의 첫 해외식민지였다. 그만큼 초기에는 각별함이 있었다. 점령과 강압 통치는 50년에 달했다)에 한 짓이 있어서 잘 알기도 하고(일본의 동남아학 상당히 발달함.), 보면 친절히 대하고(옛 식민지 사람을 볼 때는 약간 어린아이 보듯 한다. 이는 서양 사람들도 마찬가지. 인도네시아인에게 네덜란드인이 오늘날에도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어보라.), 대만 사회가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더 복잡하면서 성숙한 면도 있고(특히 다민족-다문화 사회로서),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본 강점 전후로 중국이 대만에게 너무 못했기 때문에, 남보다도 더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지난 패악질에 대해서 대만 사람들이 굳이 열 내며 싫은 감정 드러내지 않는 것 뿐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박하지만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빛. 색이 그대로 음악이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눈물샘이 왠지 느슨해졌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 내가 이곳을 찾지 않은 동안에도 자연은 이 자리에 있었고 내가 돌아간 후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16)
어제 와주세요. 어제, 와주세요. 어제 이맘때 와주세요. 그리고 어제의 얼굴로 만나요. 나는 언제나 어제 속에 있으니까. (43)
이런저런 생각에 앞서 풍경 그 자체로 머리와 가슴이 한껏 채워진다. 오랜만에 온몸에서 손가락 끝까지 행복으로 가득하다. 생글생글 웃다가 근처에 있던 아카키와 씨와 눈이 마주친다. 지금은 여기에 와서 이것을 보고 있는 자신에게 `정말 잘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다치바나 씨에게 "정말 아름답네요"라고 말해다. 더 꾸밀 것도 없이 정말 그랬다. 다치바나 씨는 마치 자신이 가꾼 정원을 칭찬받은 사람처럼 부끄러워하면서도 진심으로 기쁜 듯 웃었다. (93)
너도밤나무의 열매가 익을 무렵,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때 곰들이 나무에 올라가 여기저기에 있는 곰 선반에서 식사를 한다. 일동, 그 큰 나무 밑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었다. 그러나 자연의 일상과 마주하자 모두 말수가 줄었다. 감개무량한 상태로 나뭇가지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102)
그때 사향노류 씨--무나가타 마치코 씨와 재회했다. 규모가 큰 서점이었기 때문에 우연히 만난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 이야기를 마친 후 슬쩍 이름을 꺼냈더니 시가... 코너 담당이라고 한다. 일반 서점에서는 무리지만 대규모 서점이라면 자신의 코너에 개성을 드러내는 게 가능하다. 가보지 정말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가는 모르겠다. 그래도 추천하고자 하는 책을 진열하는 방식부터 다른 지점에는 없는 향기가 있었다. 보통은 잘 보이지 않는 시가 관련 잡지의 과월호도 적지만 비치해두고 있었다. (177)
문들 고개를 들자 멀리 푸른 산들과 그 조금 위를 옆으로 지나가는 한 줄기 하얀 구름, 커다랗게 펼쳐진 하늘이 보인다. 이런 장엄한 풍경 속에 인간은 오직 나 하나다. 그것이 불안하지만 또한 사랑스럽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스며드는 것만 같다. 생각지도 못한 길을 걷는 일이 있어도 지금이 좋다. 나 자신으로 있는 게 좋다. (205)
오른쪽도 왼쪽도 파도가 쓸고 가는 바다다. 문득 일본 산의 어두운 능선을 걷고 있을 때 이런 장면을 상상했던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른쪽도 왼쪽도 안개가 낀 절벽, 유일한 길 저편에서 하라다가 온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낸 환상일 것이다. ...... 하라다의 모습이 점차 분명해지고 커진다. 긴 시간이 흘러 헤어졌던 두 사람이 저쪽과 이쪽에서 지금의 이 길을 똑같이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나고 스쳐 지나가야---한다고 내 속의 무언가가 말하고 있다. (224)
그때 하라다와의 만남을 돌이킨다. 한없이 밝은 남쪽의, 끝도 없는 퐁경 속에서 서로 다가가는 우리. 눈을 피하면 후회한다. 이것은 하늘이 내게 준 기회다. 한마디라도 좋다. 도망치지 말고 우리라는 이야기에 시간의 방점을 찍자. ... 이제 곧 지나친다. 하라다는 아직 뭐라고 이야기할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 사람답다. 그때 내 마음에 살짝 단어가 내려왔다. 나는 가볍게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면서 파도의 레이스를 밟았다. 그리고 말했다. "살이 쪘네." 하라다는 조금 입을 벌리고, 잠시 후 씩 하고 웃었다. 아주 좋은 미소였다. 그대로 우리는 하루의 놀이를 마친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듯 헤어졌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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