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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내용을 같은 평면에 놓고 일대일 대응시키는 소위 전기적 독법은, 탁월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한 십중구구구구는 그 우둔함과 게으름으로 '독법'이라 불릴 만한 높이에도 도달하고 있지 않다고 봄. 그러나 이 책의 본문을 지나 뒤의 해설을 보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작가와 작품을 겹쳐 떠올리며 쓸쓸한 맘을 금할 수 없었음. 문인들 팔자 기구한 거야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이 작가의 경우는 특별히 더 마음이 쓰임.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갈 때의 작가의 심경을 예언하고 있는 듯함.
벤애멘타 학원에는 그 희귀한 우둔함을 더욱더 갈고 닦기 위해 들어온 듯싶다. 그는 이곳에서 지내면서 예전보다 훨씬 더 부지해질지도 모른다. 그의 무지가 더욱 만개하면 안 될 이유는 뭐란 말인가? ... 그것은 훗날 내가 페터와 같은 그런 주인, 통치자, 그리고 상관을 모시게 될 거라는 느낌이다. 페터처럼 무지한 사람들이야말로 승진, 출세, 유복한 삶, 그리고 명령을 내리는 일에 적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처럼 어떤 면에서 볼 때 영리한 사람들은 그들의 훌륭한 열망을 누군가의 시중을 들면서 꽃피우고 쇠진시켜야만 한다. (47)
그는 과묵하고, 비밀들을 함부로 지껄여대지 않는다. 그는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그의 고용주가 느낄 만족이 곧 그에게는 천국이며, 그와 반대되는 슬픈 상황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지옥이다. 그는 누구든 그가 행하는 일과 그에게 만족할 거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그에게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이다. (58)
크라우스가 외모의 장점들, 신체적인 우아함을 지니지 못한 이유, 왜 자연이 그를 그렇게 난쟁이같이 찌그러뜨리고 볼품없이 만들었는지를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그를 데리고 뭔가를 하려고 한다.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 자연은 처음부터 그를 데리고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크라우스라는 인간은 자연에게 너무나 순수한 존재였을 것이고, 그 때문에 자연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외적 성공들로부터 그를 보호할 목적으로 그를 볼품없고, 왜소하고, 추한 육체 속으로 던져버렸던 것이다. (90)
신은 이 세상에 심오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꼐끼를 내주려고 크라우스와 같은 인간을 보낸 것이다. 그 수수께끼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봐라,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수수께끼를 풀려는 노력을 보이는지. ... 다시 말해 어느 누구도 그 수수께끼를 풀고자 애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인간도 이 무명의 초라한 크라우스에게 그 어떤 과제, 수수께끼 혹은 그토록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뭇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는 진정한 신의 작품이며, 무(無)이며, 하인이다. 크라우스는 교양 없고, 매우 고된 일을 수행하기에나 적합한 자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런 판단이 틀린 데 없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91)
이게 자유란다. ... 자유란 겨울 같은 것이다. 오래 견뎌내기 힘든 거야.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것처럼 몸을 항상 움직여야 한단다. 자유 안에서 춤을 춰야 해. 자유는 차가우면서도 아름답다. 다만 자유와 사랑에 빠지지만은 마라. 그건 너에게 슬픔만 안겨줄 거야. 왜냐하면 자유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잠시 동안만 머무를 뿐, 그 이상 오래 머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봐라, 우리가 떠다닌 저 멋진 길이 서서히 녹고 있는 것을. 이제 눈을 뜨면 자유가 소멸해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앞으로도 가슴을 조이는 이런 광경에 자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114)
그리고 우리는--나와 `그 사람`, 당연히 어느 누구도 아닌 벤야멘타씨는--사막 한가운데 와 있었다. 우리는 사막을 떠돌며 원주민들과 교역을 했다. 우리에겐 매우 독특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것은 냉철하고 숭고한 만족감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유럽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부터 우리 두 사람은 영원히, 아니면 적어도 아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벗어난 것 같았다. "아아." 나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거였어!"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그 수수께끼를 난 풀 수가 없었다. (182)
그리고 여기서 만약 내가 산산조각이 나고 파멸해간다면, 무엇이 부서지고 파멸하는 것일까? 부서지고 파멸하는 것은 어느 영(零)일 뿐이다. 나 개인은 그저 어느 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 펜도 던져버리는 거다.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나는 벤야멘타 씨와 함께 사막으로 간다. 보고 싶다. 황야에도 삶이라는 것이 있는지 보고 싶다. 호흡하고, 존재하고, 정직하게 선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지 보고 싶다. 밤에 잠을 자고 꿈을 꿀 수 있는지도 알고 싶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이제부터 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신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신은 생각하지 않는 자와 함께 간다. 자, 이제 그럼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벤야멘타 학교여.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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