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이 미즈마루 -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지음, 권남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스런 그림, 놀라운 인격(대충주의). 하루키 글과 어떤 점에서 맞았는지 감은 오는데 그래도 하이쿠畵가 더 어울림. 교육 통한 체계화 반복 통한 숙련을 거부하나 反지성이 아니라 超지성. 익숙한 연장 연마된 구상 버리고 우연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식으로 일하면서 빵도 잘 벌었다니 럭키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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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이 미즈마루 -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지음, 권남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저는 반쯤 놀이 기분으로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더군요. 진지함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일본에서는 별로 없는 스타일이죠. 일보인에게는 진지한 것이 좋고, 진지하지 못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의 태도로, 진지하게 그림과 마주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냉수 마찰을 하고 불단에 기도를 한 뒤 작업에 들어가는 도예가가 있는가 하면, 저는 휘파람을 불면서 작업 선반을 걷어차며 일을 하는 편이라고 할까요(웃음). (102)

전에 무라카미 씨가 오이시에 새집을 지어서, 그 집 장벽화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86년). 하얀 벽을 마주하면 무언가 그릴 것이 떠오르겠지 하고, 사전에 아무것도 구상하지 않고 갔습니다. 현장에서 무라카미 씨가 연습용으로 헌 신문을 잔뜩 갖고 와서, 그걸 천천히 읽었습니다. 바로 휙 그리면 고마움을 모를 테니.
장벽화를 그리는 것은 처음이었죠. 너무 복잡한 것을 그리면 실패할 수 있으니 간단한 것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후지산을 그렸더니, 무라카미 씨 왈. "이거 푸딩인가?" (120)

신타니: 미즈마루에게는 한 가지 미학이 있었지. 그건 절대로 세탁물에 다림질을 하지 않는 것. 상의도 셔츠도 전부 꾸깃꾸깃,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
히라다: 트렌치코트를 새로 사면 입은 채로 샤워를 했었죠.
신타니: 맞아, 일부러 쭈글쭈글하게 만들었지. 그래도 청결하긴 했어. 대체 그건 왜 그랬던 걸까.
히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낡은 옷을 좋아한다고. (241)

신타니: 나는 잘 몰라서 처음에는 부인이 집안일을 안 하나 생각했었지. 딱하구나 하고(웃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철저한 사람은 본 적이 없네. 특유의 미학이랄까. 기호가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난 부분이었어.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있거나,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것도 거의 본 적이 없네. 그런데 서른다섯 살까지 회사를 다녔으니, 제대로 된 인사도 하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었을텐데. 회사원의 대응력도 있으면서 프리 지향도 있어 양다리를 걸쳤던 것도 마찬가지겠지. 꾸깃꾸깃한 셔츠지만 품질 자체는 정통파였어. 블레이저는 기본적으로 갈색 기본형이었고 실은 아주 스탠더드한 사람이었던 거야. (242)

신타니: 맞아. 일찍 가서 좋은 자리 맡아놓고 시간될 때까지 로비에 있다가, 엔쇼의 만담만 듣고 끝나면 바로 돌아왔지. 엔쇼란 말만 들으면 태풍이 와도 갔었으니. 롯폰기의 하이유좌, 닛세이 극장, 가부키좌…… 그야말로 사방 쫓아다녔네. 맞아, 미즈마루 씨한테는 엔쇼 같은 인상도 있었어. 웃으면서 무서운 소리를 하거나, 등이 꼿꼿이 펴지는 설교를 하는 분위기가. 나하고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세살은 위로 보이기도 하고, 아버지 같은 느낌이 있었지. (244)

다들 완벽하게 준비가 돼 있는데, 미즈마루 씨만 좀처럼 작품을 갖고 오지 않아서 말이야. 제일 마지막에 전시된 걸 봤더니, 색지 한복판에 빨간 동그라미만 달랑 그려져 있었지. "뭐야, 이거?"하고 물었더니 "우메보시. 또 한 장의 네모는 두부." 이러는 거야. 뭐?하고 깜짝 놀라서 "당신, 이거 오늘 그렸지?" 그랬더니, "들켰나……" 이러더군. "평소에도 의뢰 전화 받으면서 그리는 거 아냐?" 그랬더니, 그 말에도 "들켰나." 이러고(웃음). (246)

그림체가 그런 분위기니까. 데생 같은 것도 안 했고. 그 사람은 공들여서 하는 것을 믿지 않았지. 이 책을 읽는 학생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지만. (246) …… 그리고 되풀이해서 그리면 잘 그려지는 것이 싫다고도 했었지. 교토에서 펜촉을 바꿀까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을 때, … 바로 바꿀 수 있다더군. 펜에 익숙해져서 생각대로 선이 그려지면 재미없다고. 난 그때 우연을 믿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고 할까, 철학적인 얘기여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247)

가벼운 건 말이지, 미즈마루는 의식적으로 그림에서 설명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지.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 선을 지워버려. 그걸 감각으로 할 수 있는 힘, 즉 센스가 있는 사람이었어. 보통 일러스트레이터는 기초가 중요하지만, 기초 없이 그만큼 인기가 있고 일을 많이 하고 생활이 돌아갔던 사람은 드물어. 호리우치 세이이치 씨도 가벼운 그림이었지만, 모든 훈련을 거친 뒤의 가벼움이었지. 뭐 역시 스탠더드야. 미즈마루 씨의 작품은 하이쿠화라고 할까. 그의 속에 어떤 텍스트를 만든 다음에 그걸 그리고 있어. 그래서 그림에 하이쿠를 넣으면 완성된다고 할까,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언어가 태어나게 하는 그림이란 느낌이 들지. (258)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고민할 것 없다." (291)

수업 이상으로, 수업을 마친 뒤 식사나 술자리를 가지며 들려주신 세상 사는 이야기들이 지금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술 마시는 법도 배웠죠. 비유 훈련에서 "술맛, 음식맛을 설명해봐."라고 해서 비유가 서툴면 "넌 안 되겠네…"라고 놀리기도 하셨죠. 사물에 관한 사고법이나 단어 선택의 중요함도 배웠습니다. 다면적인 견해나 탐구심을 기르기 위해, 그림에만 빠지지 말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으라고 권하셨지요. 기술이 있어도 인간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매력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 지론이었습니다.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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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장을 보다 피더덕을 본 순간 오늘은 더덕생채에 도전하기로 즉흥 결심하고 네 뿌리를 샀다. 5천원.

 

레시피를 숙지하고 배숙과 동시에 도전해 보았다.

 

잊지 않고 타이머도 옆에 앉혀 놓았다.

 

'땡'하는 환청과 함께 시작!

 

그런데 더덕을 까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그 다음엔 더덕 포 뜨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더덕 길게 찢기였다! 이것, 정말 쉽지 않다. 엄지손톱 밑으로 더덕이 파고 들어가고, 허리는 점점 굽어진다. 더덕 두 개를 다 찢어내는 동안, 허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 양념에 더덕을 무치는데, 떡지지 않게 골고루 무치려니 이것도 뜻대로 안 된다. 笨手笨脚!

 

다음에는 배숙과 씨름.

 

마침내 두 요리를 다 완성한 순간, 타이머를 멈추었다.

타이머 숫자를 바라보며 든 생각은 '정말 쉽진 않겠구나.'

거의 아무 잡념 없이 동동거리며 매달렸건만 마감시간은 지났고 허리는 (과장해서) 끊어질 듯 아프다.

 

11월부터 1월까지 매달 출장이 잡혀 있어 주말을 이용해 한식조리사 요리를 다 해볼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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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배운다 - 비틀린 문명과 삶, 교육을 비추는 니시오카 쓰네카즈의 깊은 지혜와 성찰 나무에게 배운다 1
니시오카 쓰네카즈 구술, 시오노 요네마쓰 엮음, 최성현 옮김 / 상추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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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로 여든여섯이 되었습니다만, 이제까지 민가는 한 채도 짓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조차도 다른 목수분이 지어 주셨습니다. 민가는, 아무래도 얼마에 언제까지는 일을 끝내야 한다든가, 벌이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는 해 나갈 수 없어요. 저는 할아버지가 저의 스승이셨습니다만, 할아버지는 "절대로 민가를 지어서는 안 된다"하고 엄하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건, 벌이가 되는 일로 내달리게 되면 마음이 혼탁해지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논밭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이 없을 때는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을 거두어들이라는 것이었지요. (15)

그런데 성깔이라는 것도 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방법에 달린 문제입니다. 성깔이 있는 나무를 쓰자면 번거롭지만, 잘 사용하면 그쪽이 오히려 좋은 일도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기질일 강한 자일수록 생명력 또한 강하지요.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성깔이 없는 부드러운 나무는 약합니다. 힘도 약하고 쓸 수 있는 기간도 짧습니다.
오히려 개성을 파악해서, 그것을 살려서 쓰는 쪽이 강하고 오래 갑니다. (28)

학자가 있고 건축물이 있는 게 아니라, 건축물이 있고 비로소 학문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스카 양식이라든가 하쿠호 양식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뒷날 붙여진 이름이지요. 그렇지요. 뭐든지 계산이나 형식에 끼워 넣어 생각하기 때문에 매사가 사리에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79)

목수가 존경받지 못하게 된 것은 1867년부터 19812년까지 이어진 메이지 시대 때부터입니다. 그 시대에, 건축물과 건축학자로 나눠지고, 일꾼과 학자로 갈라진 뒤부터입니다. 서양 학문이 들어오고 건축학이라는 것이 위세를 떨치며, 직접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아닌 사람들, 곧 설계사들이 설계를 하게 되고부터입니다. 하여간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건축학자라는 것이 생겼고, 건축 설계 사무소가 생기며 분업이 됐습니다. 설계는 설계 사무소, 견적은 견적이라는 식의. (78)

하지만 나무는 살아 있습니다. 계산대로는 되지 않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성질이 다릅니다. 그것이 본디 나무의 모습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난 장소나 기후, 바람과 햇볕을 받은 양이나 세기가, 그리고 성질까지 다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모두 똑같은 것으로 계산하고, 그 설계도대로 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어진 건물은 그 뒤 몇십 년, 몇백 년, 건물에 따라서는 천 년 넘게 서 있도록, 남겨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백나무를 써서 탑을 지을 때 적어도 삼백 년 후의 모습을 생각해 가며 짓습니다. 삼백 년 뒤에는 설계도 같은 모습이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까래와 들보를 올리는 것입니다. (80)

선인의 경험을 하나의 지식으로, 그것을 양식으로 삼아 그 위에 쌓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험은 말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경험은 바닥부터 기초를 쌓고, 반복 속에서 익혀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인이 되기란 무척 힘겹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러한 것을 모르는 어머니가 많습니다. 우리 애는 머리가 나쁘니 목수라도 시켜야겠어요, 라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제힘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기기를 모자라게 생겼으니 장인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학교에 가는 쪽이, 회사에 들어가는 쪽이 좋습니다. 조직 속이라면 조금쯤 근성이 부족하더라도 목을 움츠리고만 있으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99)

그리고 사람이란 한 번 칭찬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이의 눈을 의식하며 `이건 어떨까?`라든가 `어디 한번 내 솜씨를 보여 볼까?` 하는 흐트러진 생각 아래 일을 하게 되기 쉽다는 거지요. 이런 생각을 하며 지은 집이나 건물에는 제대로 된 것이, 변변한 것이 없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며 연장이 진보하자 그런 건물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화려함으로 달려갑니다. 그 때문에 구조가 희생됩니다. 중심을, 우선시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지요. (128)

대목장의 마음가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백 가지 말을 하나로 모으는 기량이 없는 자는 조심스럽게 대목장 자리에서 떠나라."
여러 가지 구전 중에서 가장 제 마음에 드는 구전입니다만, 정말 그렇습니다. 수많은 장인을 하나로 조화시켜 갈 수 없으면, 자신에게 대목장 자격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라는 것입니다. (135)

그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농업 학교는 오 년제와 삼 년제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오 년제 학교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년제 농업 학교는 학문 쪽으로 치우쳐서 진짜 농부의 일은 모른다, 그러니 삼 년제의 실습이 많은 학교에 보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3)
......
"좌우간 성실하게 공부해라. 농사를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땅의 생명을 잘 보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144)

"너희들 농업 경제라는 걸 배웠지?"
"예, 배웠습니다."
"최소의 노동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고 배웠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서양식 사고다. 우리 일본의 농민은, 자기 한 사람의 노동으로 몇 사람을 먹일 수 있느냐가 기본이 돼야 한다. 이런 방향에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146)

그 뒤 오가와가 오지 않았다면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을 테지만, 상당히 패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뒤 오가와는 불단...을 만드는 집에 견습공으로 들어갔고, 또 다른 곳에서 도면 그리는 일을 하다가 제가 호류지 삼중탑 재건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약속대로 제자로 삼아 달라며 왔던 것입니다. 오가와를 보고, 이 사람의 각오를 알고, 그때 처음으로 제가 제 자식에게 할 수 없었던 것을 이 사람에게 해 보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대목장으로 키워 가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자식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남의 집 자식이지만 내 뒤를 이을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윗사람 대접을 해라, 밥 먹을 때도 내 옆에 앉힌다, 이렇게 식구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156)

좋은 시대를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모두 수업이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왔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고, 학자들과도 대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았고, 일도 납득이 가는 자리에서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조금만 시대가 어긋났더라도 야쿠시지 건립은 불가능했습니다. 빨랐더라면 제게 힘이 없었을 것이고, 늦었더라면 나이가 들어 체력이나 정신력이 따라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176)

선조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서 이어지며 남겨진 것이, 제 대에서 꽃을 피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어림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긴 실에 꿰여 있고, 그 끝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천삼백 년 전에 지어졌으나 지금까지 견뎌 온 사찰이 남아 있고, 우리가 세운 탑이나 당도 이제부터 시간의 시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백 년이나 이백 년이 지나서 우리들이 지은 당이나 탑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어 왔습니다. 그때는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삼백 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세운 석탑이 등탑과 나란히 서 있으면, `제대로 했구나.`라며 그때 바로소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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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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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내 `아기` 작은오빠의 상급 버젼이자 나를 `아기`로 아껴준 유일한 사람. 폭력 세상과 광기 가정에서 다정하고 우아하고 나약했던 사람. 나는 그 남자 죽이면서(그의 욕망을 가져가고 그를 떠남--상황상 불가피) 나 자신도 죽인 것. 진짜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깨닫는 불멸성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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