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지금 사연이 있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18)

가재도구도, 조리 기구도, 돈도, 갖고 있던 것은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게는 이 몸뚱이가 남아 있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레시피들은 매실이 들어간 머위 긴피라...도, 식초맛을 확실하게 살린 우엉조림도, 채소를 듬뿍 넣은 바라스시...도, 육수 맛을 잘 낸 부드러운 계란찜도, 계란 흰자만으로 응고시킨 우유 푸딩도, 콩가루 만주도 모두 내 혀에 남아 있다.
커피숍, 선술집, 꼬치구이집, 유기농 레스토랑, 인기 카페, 터키 음식점....... 다양한 음식점에서 수업을 쌓아온 경험도 내 몸에, 피와 살과 손톱 사이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설령 옷을 벗겨 알몸이 된다 해도 나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할 수 있다. (31)

그런 일련의 준비를 자기 일처럼 지원해 준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 첫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재회한 구마 씨였다. 구마 씨는 아주 오랫동안 이 곳에서 살아 온 터라 인맥이 넓고, 또 자연에 대해서도 아주 박식해서 내게는 든든한 조언자였다. 곤란한 일이 생겨도 구마 씨에게 부탁하면 어지간한 일은 모두 해결됐다. (54)

모계 가족의 기질은 반드시 대를 걸러 유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엄마는 너무도 정숙한 외할머니에게 반발하여 그것과는 정반대로 파란만장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반발하여, 또 그것과는 정반대인 평범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오셀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가 하얗게 칠한 부분을 딸은 열심히 검게 덧칠하고, 그걸 그 딸인 손녀는 다시 하얗게 칠하려고 노력한다. (60)

길가에 뒤집어져 있던 공벌레...를 구해주는 것이 나는 행복했다. 닭이 막 낳은 달걀을 뺨에 대고 온기를 느끼는 것도, 아침 이슬에 젖은 풀잎 위에 맷힌 다이아몬드보다 예쁜 물방울을 발견하는 것도, 대나무 숲 입구에서 발견한 레이스 컵 받침처럼 아름다운 비단 무늬 버섯을 겨된장에 넣어서 먹는 것도,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뺨에 감사 키스를 보내고 싶은 사건들이었다. (66)

내게는 좀 자랑할 만한 특기가 있다. 그 사람이 홍차를 좋아하는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커피 중에서도 지금은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은지, 얼굴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아마 도시에 나가서 처음 몇 년간, 규모가 큰 커피 체인점에서 카운터를 담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님의 얼굴을 잠깐 보고 주문을 받는 동안에, 무엇을 주문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예측은 대체로 95%의 확률로 적중했다. (79)

이윽고 닭은 얌전해지고, 양계장 남자에게 잡힌 채 어이없이 절명했다.
지금 이 요리를 만들기 위해 살아 있던 닭 한 마리가 희생된 것이다.
그러니 목슴을 내어 준 토종닭을 위해서도,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소금을 더 넣으며 간을 보기 시작했다. (88)

"허어, 재수 없는 놈에게는 만들어주지 않겠다, 그건게벼. 너, 니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에스카르고... 식당의 주인이라고? 농담도 쉬어가면서 해라. 손님을 고르는 건 프로가 아닌 거여. 아가씨 혼자 하는 소꿉놀이, 혼자 용쓰는 스트립쇼지, 그건. 멍청하게 있지 말고 네오콘 님이 맘마를 먹고 싶다 하시니 뭐라도 만들어!" (173)

어쨌든 중요한 것은 무심해지는 것. ...
싫어하는 감정은 반드시 맛에 반영되니까, 어쨌든 마음도 머리도 비우기로 했다.
"초조해 하거나 슬픈 마음으로 만든 요리는 꼭 맛과 모양에 나타난단다. 음식을 만들 때는 항상 좋은 생각만 하면서, 밝고 평온한 마음으로 부엌에 서야 해." (176)

게다가 계절은 1초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머위의 어린 꽃줄기는 지금 캐지 않으면 앞으로 1년을 먹을 수 없고, 막 나기 시작한 야생 아스파라거스는 갓 딴 것을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파드득나물, 땅두릅나물, 뱀밥, 쑥, 민들레, 두릅 싹, 고사리....... 산으로 둘러싸인 이 토지는 봄이 먼 대지의 은혜로 넘쳐난다.
다행히 엄마의 용태도 그리 긴박하지 않아서, 엄마는 엄마대로 화려한 의상에 짙은 화장을 하고 전과 다름없이 아무르 카운터에 마담으로 서 있었다. 병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한 걸음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고통스러운 몸짓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프로 근성이 강하다. (189)

엘메스는 절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저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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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잘 먹는 것 - 삼시 세끼 속에 숨겨진 맛을 이야기하다
히라마츠 요코 지음, 이은정 옮김 / 글담출판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장보기에서 설거지까지, 부엌 살림의 어느 고리도 진지하고 아름답고 격조 있는 작업임을 보여주는 작품. 플러스, 고액 쇼핑을 부르는 작품, 하하. 식재료는 물론이요 식기도 자연에서 고스란히 받아 쓰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지 알지. 아는데 비싸요. 은행나무도마 나무찜기 편백식기,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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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잘 먹는 것 - 삼시 세끼 속에 숨겨진 맛을 이야기하다
히라마츠 요코 지음, 이은정 옮김 / 글담출판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채소 튀김에 레몬, 수프에 레몬, 볶음밥에 레몬, 생선구이에 레몬, 흰 살 생선회에 레몬, 찐 채소에 레몬, 찐 감자에 레몬, 아이스크림에 레몬. (23-4)

집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창문을 연다. 현관을 연다. 그러면 바람의 움직임이 생긴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살랑살랑 가늘게, 어떨 때는 두껍게, 가끔은 몰래, 또는 세차게 다양한 바람이 지나간다. 거기 어디쯤 장소를 정해서 가늘게 자른 무, 푸른 잎, 배를 가른 생선, 작은 베리류, 고깃덩어리 등등 생각나는 대로 뭐든지 말린다. 요즘은 배추꼬랑이에 푹 빠져 있다. 채에 펼쳐서 며칠 동안 말린 다음 그것을 잘게 채 쳐서 된장국에 넣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44)

젓가락도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이리로 돌아오세요."라고 양팔을 벌려 기다려주는 젓가락 받침이 있기에 젓가락은 자유자재로 밥상 위를 돌아다닐 수 있다.
......
그러니 허세를 부리지 말자고요. 내 젓가락 받침 1호는 계곡 근처에서 주운 돌멩이였고, 2호는 태국의 푸켓 해안에서 흰색 산호 조각이었다. (87)

감잎 다음은 연잎이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여름이 가까이 와 있을 무렵, 차를 마시러 오라는 지인의 초대를 받았다. 차 쟁반을 들자 거기에는 연잎과 그 위를 또르르 굴러가는 물방울이 있었다. 계절의 도래를 알리는 잎이 찾잔 뚜껑으로 등장한 것이다.
......
원래부터 잎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다. 만주를 올리고 치즈를 올리고 건과일을 올리고 초콜릿을 올린다. 나는 무엇에든 사용한다. 잎은 그릇과 음식 사이에 잠깐의 여유를 만들어준다. 손바닥에 올려서 그릇 대신으로 사용하며, 그 옛날의 느긋함과 평화로움을 맛본다. (118)

교훈이라면 도마는 그늘에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복구된 은행나무 도마에 뺨을 비비며 나는 나무는 재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180)

칼로 양배추를 삭삭삭, 양파를 통통통, 호박을 툭툭 썰면 도마에는 불규칙한 칼자국이 생긴다. 수분과 습기를 흡수한 나무는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르고 표면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가 건조되면서 다시 아문다. 칼등으로 훑으면 상처 속의 찌꺼기가 밖으로 나온다. 들이마시고 내맽으며 도마는 스스로 자신을 손질하고 수리한다. 하루의 주방 일을 끝내고 한쪽에 세워두면 저절로 물이 빠지면서 다음 날 아침에는 바짝 말라 있다. (182)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무 찜통으로 찌면 맛이 깊어진다. 잡스러운 맛이 사라지고 투명해진다. 튀는 맛이 사라지고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건강에 좋다‘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맛이다. 대나무가 여분의 수분을 훌륭하게 흡수하고 증기의 힘이 식재료의 맛에 새로운 장을 연다. (187)

에도 시대, 유카타는 매년 여름에 새로운 것을 장만했다. 금방 지은 천만이 가진 팽팽한 느낌을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일까? 물론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런 이유였다. 여름에 유카타로 입다가 낡으면 잠옷으로 입는다. 잠옷으로 입다가 더 낡으면 작게 잘라서 게타...의 끝으로 사용한다. 크게 잘라서 걸레로도 쓴다. 걸레로 수명이 다하면 태워서 재로 만든다. 그 재를 어디에 쓰느냐, 바로 천을 염색할 때 염색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매염제로 사용한다.
한 필의 면이 생활의 곳곳을 돌고 돌아 다시 천 염색으로 되돌아온다. 면이라는 천이 가진 진실함과 정직함이다. 면과 친해져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서민들의 지혜다. 그 원점과 같은 무명천을 맘껏 활용해서 생활 속에 활기를 불어 넣고 싶다. (209)

"어머나, 이런 리넨도 있어요?"
안쪽에 꽁꽁 감춰둔 리넨은 스위덴 출신이다. 달빛 정도가 아니라 마치 특수 가공 처리한 것 같다. 표백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빳빳하고 땅땅하고 딱딱한 느낌이지만...... 흡수하고 또 흡수하고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수분을 얻으면 순식간에 섬유가 숨을 들이쉬듯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고 꽉 짜서 펼치면 몇 분도 안 돼서 보들보들하게 말라서 잘난 척 폼을 잡는다.
"나, 리넨이야."
아름답게 빛나는 달빛을 머금은 한 장이 있다. 억세 보이지만 늠름한 야생이 느껴지는 한 장이 있다. 그야말로 매력적인 리넨의 정수다. (234)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순리. 설거지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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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팥 인생 이야기
두리안 스케가와 지음, 이수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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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며 한참 울었던 기억. 사실 뻔한 설정이지만, 종이글로 봐도 여전히 가슴 아린다. ‘기술의 장인, 삶의 명인‘은 대단히 일본적 방식이고 한계도 알지만, 이 길 끝까지 걷는 자들 통해 더 나은 세상이 질서 있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앞당겨지는 것도 맞다. 삶의 명인이 역사의 은인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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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 예종.성종실록,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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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종의 족질은 대체 무슨 병? 성공으로 보이는 삶도, 코 앞에서 보면 크고 작은 실패로 모자이크 돼있고 세대 가로질러 내다보면 비극으로 가는 큰 한 걸음일 수 있음을, 성종에게서 다시 본다. 정희왕후는 청의 효장급인걸? 진짜 멋지고, 효장식 로맨스 하나 추가하면 히트작 주인공으로도 손색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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