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사연이 있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18)
가재도구도, 조리 기구도, 돈도, 갖고 있던 것은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게는 이 몸뚱이가 남아 있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레시피들은 매실이 들어간 머위 긴피라...도, 식초맛을 확실하게 살린 우엉조림도, 채소를 듬뿍 넣은 바라스시...도, 육수 맛을 잘 낸 부드러운 계란찜도, 계란 흰자만으로 응고시킨 우유 푸딩도, 콩가루 만주도 모두 내 혀에 남아 있다. 커피숍, 선술집, 꼬치구이집, 유기농 레스토랑, 인기 카페, 터키 음식점....... 다양한 음식점에서 수업을 쌓아온 경험도 내 몸에, 피와 살과 손톱 사이에 나이테처럼 새겨졌다 설령 옷을 벗겨 알몸이 된다 해도 나는 요리를 만드는 일이라면 할 수 있다. (31)
그런 일련의 준비를 자기 일처럼 지원해 준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 첫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재회한 구마 씨였다. 구마 씨는 아주 오랫동안 이 곳에서 살아 온 터라 인맥이 넓고, 또 자연에 대해서도 아주 박식해서 내게는 든든한 조언자였다. 곤란한 일이 생겨도 구마 씨에게 부탁하면 어지간한 일은 모두 해결됐다. (54)
모계 가족의 기질은 반드시 대를 걸러 유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엄마는 너무도 정숙한 외할머니에게 반발하여 그것과는 정반대로 파란만장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반발하여, 또 그것과는 정반대인 평범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오셀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가 하얗게 칠한 부분을 딸은 열심히 검게 덧칠하고, 그걸 그 딸인 손녀는 다시 하얗게 칠하려고 노력한다. (60)
길가에 뒤집어져 있던 공벌레...를 구해주는 것이 나는 행복했다. 닭이 막 낳은 달걀을 뺨에 대고 온기를 느끼는 것도, 아침 이슬에 젖은 풀잎 위에 맷힌 다이아몬드보다 예쁜 물방울을 발견하는 것도, 대나무 숲 입구에서 발견한 레이스 컵 받침처럼 아름다운 비단 무늬 버섯을 겨된장에 넣어서 먹는 것도,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뺨에 감사 키스를 보내고 싶은 사건들이었다. (66)
내게는 좀 자랑할 만한 특기가 있다. 그 사람이 홍차를 좋아하는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커피 중에서도 지금은 어떤 커피를 마시고 싶은지, 얼굴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아마 도시에 나가서 처음 몇 년간, 규모가 큰 커피 체인점에서 카운터를 담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님의 얼굴을 잠깐 보고 주문을 받는 동안에, 무엇을 주문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예측은 대체로 95%의 확률로 적중했다. (79)
이윽고 닭은 얌전해지고, 양계장 남자에게 잡힌 채 어이없이 절명했다. 지금 이 요리를 만들기 위해 살아 있던 닭 한 마리가 희생된 것이다. 그러니 목슴을 내어 준 토종닭을 위해서도,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소금을 더 넣으며 간을 보기 시작했다. (88)
"허어, 재수 없는 놈에게는 만들어주지 않겠다, 그건게벼. 너, 니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에스카르고... 식당의 주인이라고? 농담도 쉬어가면서 해라. 손님을 고르는 건 프로가 아닌 거여. 아가씨 혼자 하는 소꿉놀이, 혼자 용쓰는 스트립쇼지, 그건. 멍청하게 있지 말고 네오콘 님이 맘마를 먹고 싶다 하시니 뭐라도 만들어!" (173)
어쨌든 중요한 것은 무심해지는 것. ... 싫어하는 감정은 반드시 맛에 반영되니까, 어쨌든 마음도 머리도 비우기로 했다. "초조해 하거나 슬픈 마음으로 만든 요리는 꼭 맛과 모양에 나타난단다. 음식을 만들 때는 항상 좋은 생각만 하면서, 밝고 평온한 마음으로 부엌에 서야 해." (176)
게다가 계절은 1초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머위의 어린 꽃줄기는 지금 캐지 않으면 앞으로 1년을 먹을 수 없고, 막 나기 시작한 야생 아스파라거스는 갓 딴 것을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파드득나물, 땅두릅나물, 뱀밥, 쑥, 민들레, 두릅 싹, 고사리....... 산으로 둘러싸인 이 토지는 봄이 먼 대지의 은혜로 넘쳐난다. 다행히 엄마의 용태도 그리 긴박하지 않아서, 엄마는 엄마대로 화려한 의상에 짙은 화장을 하고 전과 다름없이 아무르 카운터에 마담으로 서 있었다. 병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한 걸음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고통스러운 몸짓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프로 근성이 강하다. (189)
엘메스는 절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저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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