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잘 먹는 것 - 삼시 세끼 속에 숨겨진 맛을 이야기하다
히라마츠 요코 지음, 이은정 옮김 / 글담출판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채소 튀김에 레몬, 수프에 레몬, 볶음밥에 레몬, 생선구이에 레몬, 흰 살 생선회에 레몬, 찐 채소에 레몬, 찐 감자에 레몬, 아이스크림에 레몬. (23-4)

집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창문을 연다. 현관을 연다. 그러면 바람의 움직임이 생긴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살랑살랑 가늘게, 어떨 때는 두껍게, 가끔은 몰래, 또는 세차게 다양한 바람이 지나간다. 거기 어디쯤 장소를 정해서 가늘게 자른 무, 푸른 잎, 배를 가른 생선, 작은 베리류, 고깃덩어리 등등 생각나는 대로 뭐든지 말린다. 요즘은 배추꼬랑이에 푹 빠져 있다. 채에 펼쳐서 며칠 동안 말린 다음 그것을 잘게 채 쳐서 된장국에 넣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44)

젓가락도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이리로 돌아오세요."라고 양팔을 벌려 기다려주는 젓가락 받침이 있기에 젓가락은 자유자재로 밥상 위를 돌아다닐 수 있다.
......
그러니 허세를 부리지 말자고요. 내 젓가락 받침 1호는 계곡 근처에서 주운 돌멩이였고, 2호는 태국의 푸켓 해안에서 흰색 산호 조각이었다. (87)

감잎 다음은 연잎이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여름이 가까이 와 있을 무렵, 차를 마시러 오라는 지인의 초대를 받았다. 차 쟁반을 들자 거기에는 연잎과 그 위를 또르르 굴러가는 물방울이 있었다. 계절의 도래를 알리는 잎이 찾잔 뚜껑으로 등장한 것이다.
......
원래부터 잎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다. 만주를 올리고 치즈를 올리고 건과일을 올리고 초콜릿을 올린다. 나는 무엇에든 사용한다. 잎은 그릇과 음식 사이에 잠깐의 여유를 만들어준다. 손바닥에 올려서 그릇 대신으로 사용하며, 그 옛날의 느긋함과 평화로움을 맛본다. (118)

교훈이라면 도마는 그늘에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복구된 은행나무 도마에 뺨을 비비며 나는 나무는 재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180)

칼로 양배추를 삭삭삭, 양파를 통통통, 호박을 툭툭 썰면 도마에는 불규칙한 칼자국이 생긴다. 수분과 습기를 흡수한 나무는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르고 표면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가 건조되면서 다시 아문다. 칼등으로 훑으면 상처 속의 찌꺼기가 밖으로 나온다. 들이마시고 내맽으며 도마는 스스로 자신을 손질하고 수리한다. 하루의 주방 일을 끝내고 한쪽에 세워두면 저절로 물이 빠지면서 다음 날 아침에는 바짝 말라 있다. (182)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무 찜통으로 찌면 맛이 깊어진다. 잡스러운 맛이 사라지고 투명해진다. 튀는 맛이 사라지고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건강에 좋다‘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맛이다. 대나무가 여분의 수분을 훌륭하게 흡수하고 증기의 힘이 식재료의 맛에 새로운 장을 연다. (187)

에도 시대, 유카타는 매년 여름에 새로운 것을 장만했다. 금방 지은 천만이 가진 팽팽한 느낌을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일까? 물론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런 이유였다. 여름에 유카타로 입다가 낡으면 잠옷으로 입는다. 잠옷으로 입다가 더 낡으면 작게 잘라서 게타...의 끝으로 사용한다. 크게 잘라서 걸레로도 쓴다. 걸레로 수명이 다하면 태워서 재로 만든다. 그 재를 어디에 쓰느냐, 바로 천을 염색할 때 염색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매염제로 사용한다.
한 필의 면이 생활의 곳곳을 돌고 돌아 다시 천 염색으로 되돌아온다. 면이라는 천이 가진 진실함과 정직함이다. 면과 친해져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서민들의 지혜다. 그 원점과 같은 무명천을 맘껏 활용해서 생활 속에 활기를 불어 넣고 싶다. (209)

"어머나, 이런 리넨도 있어요?"
안쪽에 꽁꽁 감춰둔 리넨은 스위덴 출신이다. 달빛 정도가 아니라 마치 특수 가공 처리한 것 같다. 표백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빳빳하고 땅땅하고 딱딱한 느낌이지만...... 흡수하고 또 흡수하고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수분을 얻으면 순식간에 섬유가 숨을 들이쉬듯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고 꽉 짜서 펼치면 몇 분도 안 돼서 보들보들하게 말라서 잘난 척 폼을 잡는다.
"나, 리넨이야."
아름답게 빛나는 달빛을 머금은 한 장이 있다. 억세 보이지만 늠름한 야생이 느껴지는 한 장이 있다. 그야말로 매력적인 리넨의 정수다. (234)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순리. 설거지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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