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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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설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삶


아름다움의 선.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善’일지, ‘線’일지 궁금했다(영문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그래서 홀린 듯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맨부커상을 받은 최초의 퀴어소설’이란 타이틀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굉장하단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꾸미지 않은 듯해도 제목에 금박을 찍어 마치 대처 시대의 호황기 때 상류사회를 보여 주는 듯 책표지 또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띠었다.


첫 페이지부터 눈에 익지 않은 대처 시대의 풍경과 정치적 언어 때문에 사실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 한 페이지 넘기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걱정했던 대로 완벽하게 소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좀 더 배경 지식이 풍부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까.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상당히 애를 먹어 가며 약간은 억지스럽게 읽었던 것도 같다. 그래도 마지막 문장까지는 도달하고 싶었다. 저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은밀하게 숨겨 뒀을 것 같아서.


이 작품은 ‘흔해빠진 부모의 흔해빠진 아들’ 닉 게스트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그는 이성에게는 성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성연애자였던 것이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2018년인 지금은 동성연애가 공공연해졌기 때문에. 하지만 이 당시엔 꽤나 ‘저속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이성이 아닌 동성과의 연애는. 그리고 동성과 나누는 성행위까지도.


홀링허스트는 어쩌면 이렇게나 세세하고 섬세하게 그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던 걸까. 게이 작가의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까지 받았기에 가능했던 걸까. 그만큼 충분한 지식과 이해, 깊은 공감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또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캐릭터의 생생함과 노골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묘사에 감탄하느라 읽었던 문장을 또 읽고 읽었으니까.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작품 시작부터 글의 분위기는 썩 유쾌하거나 밝지는 않았다. 현실의 농밀한 반영 때문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 작품의 엔딩은 밝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총 세 번의 여름,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된 <아름다움의 선>은 총 670쪽 가량의 장편소설이다. 이렇게 두꺼운 책은 또 오랜만에 읽었다. 고등학생 때 읽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이후 처음이었다.


​제1부. 사랑의 화음(1983)

제2부. 자네는 누구에게 속하는 아름다움을 누리나?(1986)

제3부. 거리의 끝(1987)


목차와 같은 시간의 흐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닉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영문학도 청년이었다. 아주 파릇하고 싱그러운, 하루 종일 섹스만 생각한다던 그 혈기 넘치는 젊음을 누리고 있는 청춘이었다.


“그래, 그렇게.” 그가 계시를 받은 자의 달콤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더니 앞으로 내민 팔 하나에 기대서 빠르게 연타해 자위했다. 닉은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지만 절정에 이르기 직전 자기 자신의 모습이 짧게 스쳐갔다. 마치 나무와 덤불들이 굴러 사라져 버리고 런던의 모든 빛이 자신에게 향한 듯했다. 바윅 출신의 작은 사내 닉 게스트, 흔해빠진 부모의 흔해빠진 아들인 그가 밤에 노팅힐의 정원에서 낯선 사람과 섹스하고 있다. 리오의 말이 맞았다. 너무 나쁜 짓이었고, 그런 만큼 자신이 한 짓 중에 최고였다. -63쪽


낯선 남자와, 광고를 통해 만난 남자와 그리고 어떻게 만난 남자와 섹스 하는 건 닉에게 전혀 거침없는 행동이었다. 성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닉은 그렇게 몸에 취하고, 약에 취하고, 주어진 상류사회의 ‘가짜’에 흠뻑 취하고 만다. 진정 원하는 사람은 토비였지만 그는 절대 닉에게 뭔가를 줄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조울증을 앓는 토비의 동생, 캐서린, 이 몹쓸 고양이는 닉을 가여워 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울증이 올 때면 가족들 몰래 자해를 하고, 조증이 오면 필터링 되지 않은 솔직함으로 분위기를 산산조각 내곤 했다. 때로는 아픈 말고 닉의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하고.


“진짜로, 악몽 같네, 달링.”

“아주 신나는 상대이기도 해. 하지만……,”

“그러니까 네가 그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가 널 이런 식으로 취급한다면 난 네가 걱정돼. 사실 나는 네가 진짜로 그를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녀의 이 말이 습관적인 과장이라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척하며 자신의 연애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479쪽


닉은 페든 가족들과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는 그들의 가족이 아닌 ‘게스트’일 뿐이었으니.


분노는 닉에게도 감염되어 마침내 그는 작정했던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의 의도와 달리 저열하게 빈정거리는 투로 나왔다. “제가 오늘 이 집을 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척 가슴 아프시겠죠. 단지 그 말씀을 드리려고 들렀습니다.” 그러자 분노에 찬 제럴드는 그 얘기를 못 들은 체하며 말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주게.” -646쪽


결국 닉은 동성애자라는 것이 드러나 페든가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지금도 동성을 사랑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색안경은 짙어지고 만다. 야유하고 비난하다가 끝내 상처를 낸다. 닉 또한 누군가를 잃은 아픔도 아픔으로 남았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잣대와 시선에 더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는 젊었고, 금욕 훈련 같은 건 별로 되어 있지 않았다. -669쪽


그는 페든가의 저택을 뒤돌아본 뒤 몸을 돌려 더 걸어 나갔다. 리본 휘장의 치장벽토로 장식한 마지막 집, 24번지의 집을 그는 현혹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빛 속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것은 그 길모퉁이만이 아니라, 그것이 길모퉁이라는 사실이었다. -670쪽


홀링허스트의 살아온 삶이 작품에 녹아 그토록 짙게 아팠던 걸까. 저자 역시 닉과 같은 처지였지만 자신이 밝힌 적은 없고 부모의 묵인 아래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 억압 속이었기에 그의 작품 주인공들은 모두 동성애자 남성이었던 걸까. 작가가 의도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슬픈 일인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전부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 하겠다. 하지만 닉과 그와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동성애자도 똑같은 사람이다. 이성애자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사람이 아닌 무언가인 것처럼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나도 조금은 접근하여 쓰고 싶으니까.

심오하고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전통적인 성장소설이었다 생각한다. 역자가 느꼈던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고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낯선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잊힐 즈음 다시 읽으려 한다. 역시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니까.




*창비에서 도서 무료 제공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진심을 담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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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하는 작가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1
사와무라 미카게 지음, 김미림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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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人은 촌철살인적이다


11월 14일 출간 예정이었던 이 작품은 라이트 노벨이다. 라노벨은 대학교 1학년 이후 처음 읽는 거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소개 글에서는 일반 소설인 줄 알고 서평단 신청했던 건데 당첨되고 도서를 받아 보니 라노벨이라 조금 놀랐다.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었을 것 같다.


아사히 세나(세나 아사히?)의 직업은 편집자. 자존감이 살짝 떨어지고 겸손하지만 오지랖이 넓은 평범하다면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어디에서나 살고 있을 현대사회의 보통 여성 말이다. 대작가인 후지이 하나에의 담당이었으나 지루하다, 영감이 안 떠오른다, 는 이유로 담당에서 내쳐지고 만다. 그 다음으로 담당하게 된 인기 작가, 미사키 젠은 인간답지 않은 외모를 가진 美人이었다. 게다가 그의 정체 또한 세나를 기함하게 하는데.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건 분명 이 나라의 문화지만, 상식적으로 별거 아닌 걸 타인에게 준다면 상대는 어떨 것 같아요? 이 책 재미없어요, 이 음식 맛없어요. 그런 식으로 장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정말 별것 아닌 물건을 받고 기뻐할 사람은 아마 없겠죠. 즉, 아까 그쪽이 한 말은 지금 내민 물건을 만든 사람한테도, 받는 사람인 나에게도 무척 실례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세나 아사히 씨.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안녕히 가세요. 나는 그쪽과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 별것 아닌 물건을 가지고 지금 당장 돌아가 주세요.”


그는 혀에 칼이 달렸는지 굉장히 초면부터 촌철살인적이다. 뻘뻘대는 아사히가 가여울 정도였으니. 세나는 그를 오래 전부터 지켜봐 왔다. 아니, 그의 작품을 지켜봐 왔다고 하는 게 맞겠다. 미사키 젠의 첫 작품 <론도> 전편이 궁금한 건 나뿐이 아니겠지? 두 사람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찰떡처럼 어울리는 케미가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미사키와 같이 사는 작은 소녀 또한 신비함 그 자체. 거기다 체셔고양이 편집장과 똑 소리 나는 나츠키 형사까지.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읽어낼 수 있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같은 존재들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럴까? 싶었을 만큼 굉장히 사실적으로 세계관 구축을 해낸 것 같았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도서를 받고 처음 받았던 느낌이 지금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장르 구분 없이 책을 좋아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나 같은 경우, 인문학이나 자기개발서 같은 장르는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읽어두면 도움이 될 텐데도 말이다.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도 살짝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던 걸 부정하지는 못 하겠다. 그래도 이 작품 덕분에 그런 적대감이 많이 줄었다. 이런 섹시하고 무례하고 잘난 남주를 만난 건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연애소설이 좀 물린다, 읽히지 않는다, 에세이도 싫다 그런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다음 문장을 읽지 않고는 궁금해서 못 참겠는 작품을 찾고 있다면 단연 이 작품을 추천하겠다. 200여 페이지의 다소 짧은 느낌의 작품이지만 뇌리에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미사키 젠 같은 남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다음 편이 나온다면 바로 보고 싶다. 그야 미사키가 보고 싶으니까.




*아르테 팝에서 도서 무료 제공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진심을 담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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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라이즈 아르테 미스터리 16
T. M. 로건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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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진실이라고는 없었다.


​출간 소식부터 출간 전 연재까지 눈을 뗄 수 없던 작품이다. T. M. 로건의 데뷔작으로 엄청난 이슈를 불러일으킨 <리얼 라이즈 Real Lies>. ‘예측을 아주 잘하는 독자조차 너무 늦게야 진실에 도달하게 될 거’라는 띠 문구에 격하게 공감하게 될 줄이야.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면 어딘가 구멍이 난 듯 허전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조셉에게 남은 건 작은 생명체 하나뿐이니까.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인 조셉은 아들 윌리엄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 멀의 차를 발견한다. 윌은 태어나 뭔가를 인식할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다. 그 작은 아이가 엄마의 차를 발견한 것이다. 조셉은 멀의 차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보고 그 뒤를 밟게 된다.


​가끔 궁금하다.

그날 아내의 차를 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운명이었을 수도.


​조셉은 뜻밖의 인물이 아내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이 지켜온 가정에 굉장한 위협이 될 위험을 느낀 건 아니었을까. 정말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 이때까지만 해도 벤이 미친 사람이고, 멀에게 집착하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들은 조셉을 조여 왔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른 채 조셉은 그것들에 쫓기고 부서져 갔다.


​충격적인 반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그런 결말이 기다릴 줄은……. 스릴러를 좋아하는 이유는 끝에서야 모든 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보통 연애를 다룬 장르는 처음부터 반전 없이 처음 예상한 그대로 진행되기 일쑤. 하지만 스릴러, 미스터리, 추리와 같은 장르는 막판에서야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 충격을 주곤 한다. 그런 자극을 좋아하는지라 이 작품도 꽤 오래 붙들고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고 싶었다. 정독하면서, 누구로 인해 이렇게까지 상황이 치닫게 되었는지 나름 추리해 보는 맛도 좋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라이즈>는 식상하지 않게 빨려 들어가듯 몰입이 뛰어난 작품으로 꼽겠다. 앞에 읽었던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두 작가 모두 요즘 사회 모습을 회자시키고 싶어 한 건 아니었을까.


​마지막 장을 다 읽었는데 끝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멀은? 조셉과 윌리엄은?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면 당장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SNS를 이용한 겁박, 휴대전화에 대한 불신 등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읽는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멀과 함께 있던 남자가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았으니까. 눈을 뗄 수 없어서 한 번 읽으면 주르륵 읽게 되는 마법의 책 같다고 해야 하나.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하겠다. 찬바람 부는 요즘 같을 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요런 작품은 어떨까.


(+) 서평이 늦어 대단히 죄송합니다TAT 대충 읽고 쓰고 싶진 않아서 정독한 후에 올렸습니다. 아낌없이 출간책 보내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스포 되지 않는 선에서 리뷰 작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반전이 상당히 중요하니까요!!!




*아르테에서 도서 무료 제공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진심을 담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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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너를
강부연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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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선명한 감각


아주 오래 전부터 글을 동경했다. 사랑일 때도 있었고, 미움일 때도 있었다. 몇 번을 그만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쓰고 싶었다. 잘하지 못해도 그 나름의 내 색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럴 때 생각했던 주인공이 ‘빛을 잃은 여자’였다. 이 작품 주인공인 시진과 같은, 세상 모든 빛을 잃은 여자. 하루아침에 빛을 잃고 ‘보통 사람’ 틈에서 살아가는 여자. 그래서였을까. 책 소개 글을 보고 도저히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간절한 마음이 통했나. 예쁜 책을 손에 넣고 얼마나 뚫어지게 봤나 모르겠다. 표지부터 판권과 목차까지 세세히 들여다봤다. 표지부터 취저였다. 핵심이 될 만한 소재들을 아주 적절하게 배열한 일러스트, 아련한 색감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책 선물을 했다. 제일 힘들 때 위로가 되어 주었던 친구에게. 지금은 작은 위로와 공감이 필요할 친구에게. 육아에 지친 친구에게도 좋은 위로가 되어 주길 바라면서.


첫 시작은 조금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짜증스러웠다. 주인공들이 짜증을 내서 그랬을 것이다. 세상 빛을 잃은 여자, 정시진은 어지간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꽃 같은 존재였다. 세상 희망을 잃은 남자, 선우 준은 어떤 꽃바람이 불어도 웃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존재였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 첫 만남은 우연 그 다음은 우연 내지는 필연. 그렇게 섞이지 않을 것 같던 존재 둘이 섞여 간다. 그 과정이 애틋하고 애가 끓어 중반부까지는 쉼 없이 내달리는 느낌으로 읽어 내렸다. 현실감이 넘쳐서 몰입이 굉장했으니까.


그런데 초점이 시진과 준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옮겨졌을 땐 읽기가 힘들어 조금 아쉬웠다. 읽기 자체가 힘들 정도였으니. 두 사람의 감정선이 단절된 느낌의 전개가 안타까웠다. 갈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차라리 두 사람의 감정선에 좀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계속해서 다른 스토리를 그려내느라 바쁜 머릿속이 복잡해 막판에는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초반 느낌을 끝까지 끌고 가기란 참으로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 것 같다.


그래도 예쁜 두 사람을 고까운 시선으로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봐도 예쁜 사람 둘이었으니까. 시진은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무서운 건데. 하지만 시진은 무서워도 넘어지곤 곧잘 일어섰다. 곁에 오롯이 자신의 편인 준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사랑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허나, 둘에게 있어 사랑은 잃었던 빛을 보게 해 줬고 놓았던 희망을 다시 잡게 해 줬다. 곁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걸음을 내딛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 손끝에 닿아 있는 네가 내게는 무엇보다 선명한 감각이니까.”


이 한 줄의 찡한 감정처럼 짙게 배어나는 사랑이 있을까. 뭔가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생각된다면 꼭 이 책을 두 손에 쥐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럼 내가 얼마나 가득 쥐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절절히 느끼게 될 테니까. 읽는 내내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 아주 감사하고 고마운 작품이었다. 누군가에게도 그런 고마운 마음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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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 아를의 여인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9
알퐁스 도데 지음, 임희근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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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서 출간되는 세계문학 단편선은 표지부터 취향에 잘 맞아 꼭 서평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작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들을 모아 해당 작가 고유의 분위기를 잘 반영해 도서를 제작하는 방식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도전할 때마다 계속 미끄러져서 인연이 아닌가 싶었는데 드디어! 이번 <알퐁스 도데> 서평단에 뽑히는 경사가 찾아왔다.


알퐁스 도데.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닐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별>을 아는 이라면 반가웠을 저자의 이름.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스물아홉 번째 <알퐁스 도데>에는 <별>을 포함한 총 스물다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크게 <풍차 방앗간 편지>, <아를라탕의 보물>로 나눠져 있는데, <아를라탕의 보물>은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기대감을 갖고 읽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조곤조곤 이야기 들려 주듯 편안한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슬픈 이야기인데도 풍자를 이어갔고, 감동 또한 놓지 않고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괜히 세계적인 문학 거장이 아니었다.


아닐세, 아니야. 이보게들. 우선 가서 풍차 방앗간에 먹이를 줘야지…… 생각 좀 해 보라고! 풍차가 아무것도 못 먹은 지 아주 오래됐거든!

가엾은 노인이 밀 포대를 칼로 찢어 열랴, 낟알이 빻아져 뽀얀 밀가루 먼지가 천장까지 휘휘 날아다니는 동안 회전 숫돌을 살피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며 우린 모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요.

-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중, 일부 발췌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건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코르니유 영감을 만난 독자들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마음을 적시는 서정적인 문체가 너무 좋았다. 알퐁스 도데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프로방스에 있는 듯했으니까. 아주 소중한 책을 좋은 기회를 통해 얻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삶에 지치고, 어디론가 떠다고 싶고, 누군가의 조곤조곤한 위트 있는 위로가 필요할 때 기꺼이 언제고 꺼내어 보고 싶다. 누군가의 지친 손 위에 건네고 싶기도 하다. 조금은 건조하고 조금은 서늘해진 계절과 시대에 아주 촉촉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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