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평점 :
고통받지 않으며 산다는 게 가능할까. 나는 그런 삶을 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보인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욕망하는 한, 번뇌한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탈하고 초연할 것이 아니라면, 자기를 완전히 비워버리고 세상에 완전히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면, 필요한 것은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일테다. 그래서 삶은 고통을 다루는 기술을 요구한다. 고통에 잡아먹히지 않아야 하니까.
한편 고통을 겪는 자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다만 울부짖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은 그 자체로는 나눌 수 없다. 심지어 고통 받는 자는 응답을 원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자기 고통을 들어줄 이를 찾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 받는 자는, 자신의 고통에 귀기울여 줄 ‘곁’을 필요로 하는 딱 그만큼, 자신의 곁을 파괴하기도 한다. 곁에서 응답하는 자를 무의미한 자로 만들어버리니까.
고통 받는 자가 고통을 다루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자기 고통을 바라봐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고통이 자신의 곁을 파괴하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 저자는, 고통 받는 자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을 겪는 자신이 그 고통의 곁에 위치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있으면 그 고통에 함몰된다는 것이다. 그 위치 옮기기를 위한 기술로 ‘글쓰기’를 제시한다. 자신의 고통을 만든 피해에 대해 살펴보고, 서술하고, 그럼으로서 역설적으로 ‘고통은 말할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외로움이다. 자신의 고통은 말해질 수 없음을 깨닫는 외로움. 고통 받는 자들은 이 외로움을 나눌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의미있는 위로도, 소통도, 공감도, 치유도, 연대도 가능해진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내가 통과해야 했던, 혹은 겪고있는 고통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구구절절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썼다. 이를테면 도무지 좋아지지 않는 가족에 대해서.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순간들과 그때의 내 감정에 대해서. 가족들과 너무 화목하고 친근하게 보이는 이들에 대해 느끼는 나의 부러움에 대해서. 살면서 거쳐온 여러 일터에서 겪은, 여러 종류의 괴로움들에 대해서. 점점 친구들을 잃어가고 있는 나의 인간 관계에 대해서. 사랑하는 연인과 커플 셀피를 올리는 이들에게 내가 느끼는 부러움에 대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가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해 느끼는 질투심과 열등감에 대해서. (이런 게 그런 건가, 진화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알파메일에 대해 느끼는 베타메일들의 수준 낮은 증오와 적개심 같은 거? 전문직에 부자에, 셀럽처럼 살아가는, 온갖 잘 나가는 남성들에 대해 느끼는 부러움을 나도 갖고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점점 웃음을 잃어가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하고 싶은 것들은 잔뜩 있는데, 시간은 없는 현실에 대해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인간이 싫어지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나는 썼다.
하지만 이런 것도 다 엄살 아닐까.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이 부릴 법한 엄살. 나는 감사해야 할 것도 많다. 그리고 실제로 감사하다. 나를 좋아해준 사람들도 많고, 좋아해준 직장 동료들도 많다. 트레바리에선 싫어하는 인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게 굳이 먼저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많다. 좋은 친구들도 있고.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보고 싶은 영화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쓰고 싶은 글들도 많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조카도 있다. 고통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던 시기의 나는 삶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무슨 사회적 참사의 주인공도 아니면서(아니 전 지구가 참사의 현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측면도 있지만), 사회에서 소수자로 분류될 만 한 조건이나 정체성이 부여된 것도 아니면서(하지만 나는 또 어떤 다른 조건에선 소수자가 충분히 될 수 있다), 어쨌거나 엄살 부리는 나에게 이 책은 일종의 사회학적 치료제가 되어주었다. 물론 내 고통을 엄살이라고 축소해서 말하는 것이 내 고통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은 증거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보단 그냥 “네가 참 괴롭고 외로웠나 보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고 넓게 생각하려고 하는 거로구나”라고 따뜻하게, 너그럽게 봐주시길. 고통 받는 인간에게 위로와 미소를 건네주시길.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