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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맷하시겠습니까? - 꿈꿀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여덟 가지 이야기
김미월.김사과.김애란.손아람.손홍규.염승숙.조해진.최진영 지음, 민족문학연구소 기획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현재 젊은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그 의미가 다소 축소되어 조망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젊은 작가들의 '새로움'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 새로움을 추동한 이들 세대들의 현실 감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이들 작가들은 사회나 현실과 같은 무거운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오직 지적인 언어유희와 자폐적인 내면 고백에 함몰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혹은 그 반대로,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도 빈번히 있습니다.
저희는 이러한 평가가 반복되면서 비루한 현실을 살아가는 동세대의 독자들로부터 문학이 점차 멀어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읽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기존의 어떠한 문학적 관성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동세대의 현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포맷하시겠습니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보여준 소설들을 모았습니다."
-<기획의 말-동세대의 삶을 말하다> 中, 민족문학연구소-
포맷이 필요한 세대
나도 컴퓨터를 포맷한 적이 몇 번 있다. 기기에 문제가 있어서 더 이상 현재 상태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때, 하지만 쓰던 것을 버리고 새 컴퓨터를 사기는 힘들 때, 나는 '포맷할 것'을 결심하곤 했다. 포맷을 한다고 해서 내 낡은 컴퓨터가 지금 막 구매를 완료한 반짝반짝 빛나는 새 컴퓨터로 재탄생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던 문제 중 일부는 개선이 되니 나는 포맷을 결심할 수 밖에 없다.
김미월, 김사과, 김애란, 손아람, 손홍규, 염승숙, 조해진, 최진영. 이상 8명 작가들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포맷하시겠습니까』. 이 책에는 지금 이대로는 더 이상 안되는, '인생의 포맷'을 부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소설가 지망생(김미월, 『질문들』), 변화를 꿈꾸지만 변화하지 못하는 나(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 매끄럽고 세련되게 잘 다듬어진 열 개의 손가락 같은 인생을 꿈꾸지만 현실은 검은 봉지에서 꺼낸 맥주 뚜껑을 따느라 찢어져버린 손톱과도 같은 인생(김애란, 『큐티클』) 등. 이들은 지금 발 디디고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움켜진 이들의 발목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차라리 다 포맷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공감
이 소설집에 소개된 작품들의 저자들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작가들이다. 나와는 동년배에 속하는 작가들의 손끝에서 나온 글이라 그런지 이들이 그리는 사회의 모습이나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상당히 익숙했다. 완전한 허구에서 시작된 소설은 없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인물도 내가 겪어봤음직한 사건들이요 내 주변에서 봤음직한 인물들이었다. 개인사는 물론 다르겠지만, 우리가 속한 사회적 맥락이 동일하다보니 글을 읽으며 여간 공감이 되는 게 아니었다.
김미월, 김애란, 손아람, 염승숙, 최진영
익숙한 작가도 있었고, 낯선 작가들도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흥미로웠던 작품도 있었고 비교적 공감이 덜 가는 작품들도 있었다. 이 소설집에서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들은 김미월 작가님의 『질문들』, 김애란 작가님의 『큐티클』, 손아람 작가님의 『문학의 새로운 시대』 였고, 염승숙 작가님의 『완전한 불면』과 최진영 작가님의 『창』도 흥미로웠다.
이 중 몇 분의 작가들은 내가 이미 '흥미로운 글을 쓰는 작가' 혹은 '잘 쓰는 작가'라고 믿고 있는 분들이라서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글이 좋았다는 것이 새로울 것이 없었다(이번에도 역시나 좋았어요!). 그런데 손아람 작가님은 이번 소설집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흥미로운 작가라고나할까? 이 분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여러 작가들의 소설이 포함된 소설집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인 것 같다.
불만족, 변화의 원동력
고민이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다시 끼우고 싶다라든가,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고. 나도 내가 처한 상황이 불만족스러워 우울해하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는 고민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현실에 대한 불만을 느껴야 고민도 하고 고민이 있어야 개선도 있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다 포맷해버리고픈 삶일지라도 그런 생각 자체가 삶을, 나아가 사회를 더 좋은 상황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