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머무는 세상
틱낫한 지음, 안희경 옮김 / 판미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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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머무는 세상』의 원제목은 The World We Have: A Buddhist Approach to Peace and Ecology이다.

베트남 태생의 불교 승려이자 명상가, 평화 운동가인 틱낫한(Thich Nhat Hanh) 이 말하는 평화와 환경보호는 간결하지만 울림이 큰 글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하게 다가가기 어려운 저 멀고 높은 곳에 있는 장엄한 메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만한 그 무엇, 그 무엇을 깨닫기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가르침이기에 더 의미가 크다.

 

1부. 여럿이 함께 얻는 깨달음

"그 옛날엔, 차 한잔을 앞에 두고도 세 시간이 넘도록 기꺼이 음미할 수 있었다. 차벗(茶友)과 함께 고즈넉하고 영혼이 살아 있는 분위기에서 그 맛을 즐겼다. 두터운 잎사귀 틈을 뚫고 올라온 한 촉의 난 꽃을 두고도 연회를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 이상 이런 일에 애쓰지 않는다. 시간이 곧 돈이라고들 말한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다른 가족들이나 우리 지구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다. 마음속에서 나는 한 무리의 닭을 본다. 닭들은 쌀 한 톨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홰를 치며 쪼아대고 있다. 그런 닭들은 몇 시간 뒤 모두 도살될 예정이다. 그런 운명인데도 닭장 안의 닭들은 욕심만 부리고 있다."

 

틱낫한이 예로 든 닭(몇 시간 뒤 죽을 운명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모이 한 톨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을 떠올리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음을 경험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실제 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항상 깨어있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 노력이라는 것도 내 편의에 의해 시도와 중단을 오가는 게 사실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내 삶이라는 것이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 이외의 모든 것들(타인, 그리고 환경 등)의 존재의 의미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 행위로 보여주는 것. 이 모든 것에 대해 각성을 요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틱낫한은 이 책의 1부에서 <다섯 가지 온 마음을 깨워 살피는 수련>, <마음으로 세심히 살피는 소비의 방법> 등을 소개한다. 각 장을 우선 차근차근 읽은 후 회색 페이지에 따로 정리된 수련법과 다섯 가지 바라봄을 직접 해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2부. 우리의 행동이 곧 우리가 전하는 바이다.

여기 2부에서는 환경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등장한다. 에너지원을 100% 태양열로만 사용하는 캘리포니아의 녹야원(Deer Park)이나 붓다의 2,550회 생일에 틱낫한이 제안했다는 차 없는 날 등과 같은 현실적인 예를 들어 내가 개인으로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3부. 마음 챙김 삶을 위한 실습

이 책의 마지막 장인 3부는 말 그대로 1부와 2부를 통해 읽었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실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니구 가타(일상생활을 위한 명상)에서는 하루를 시작하며, 물을 틀며, 혹은 손을 씻으며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명상의 글귀들을 소개하는데 너무 사소하다고 여겨져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던 나의 일과 중에도 그것을 누릴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한 마음, 그리고 이렇게 감사한 환경과 조건을 지켜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잡게 도와준다. 또한, 다섯 가지 인식(호흡하기 연습)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은 단 한 시도 쉴 수 없는 '호흡'을 하는 순간까지도 명상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더할나위 없이 간단한 반복을 통해 내가 고집스럽게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어쩌면 집착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에 대한 집착의 끈을 놓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책은 '지구평화서약'을 끝으로 그 이야기를 맺고 있는데, 이 또한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서 나의 결심을 다잡아 보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그 공허감은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난 아직 나만의 '지구평화서약' 작성을 끝맺지 못했는데 다음 주 중에 마음을 다잡고 작성해 볼 계획이다. 그리고 서약을 통해 내가 결심한 일들을 실천해야지.

 

 

 

우리 모두는 이 지구별을 포근하게 안고 살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이 별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반드시 그 먼 시간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지금 그대가 꾸려 가는 이 삶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틱낫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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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등척기 -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안재홍 지음, 정민 풀어씀 / 해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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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발표된 안재홍의 백두산 기행문이 정민 교수의 번역(?)을 통해 2010년 드디어 내 곁을 찾아왔다.

『백두산 등척기』는 조선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사학자, 그리고 조선일보사 사장이자 물산장려회 이사로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민세(民世) 안재홍 선생이 1930년 조선일보 지면을 빌어 발표한 기행문을 1931년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낸 것으로 당대의 대표적 기행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제는 글로 밖에 접할 수 없는 당시의 백두산 근방의 마을과 국경지대 모습을 상세한 묘사와 사진을 빌어 속이 꽉찬 알밤처럼 소개하고 있다.

 

시작하는 말에서 역자(譯者)가 언급했듯,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변화는 실로 무쌍하여 같은 한국어라 하더라도 쓰여진 시대와 읽혀지는 시대 사이의 거리가 멀다면 번역이 없이는 그 내용을 오롯이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불과 80년 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민 교수가 소개한 원문의 문장은 수 많은 한자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한문투의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어 소위 한글세대인 나로서는 그 절반만 이해한다 해도 '장하다!'고 칭찬 받아 마땅 할 정도였다. 정말이지 정민 교수의 번역, 혹은 해설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이 장엄한 백두산 기행문을 접해 볼 수나 있었을 것인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몸와 마음을 쉬게 하는 시간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 떠남으로 인해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혹은 똑같은 것이라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내가 현실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그 무엇(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깨달음과 배움의 느낌이 너무도 짜릿하기 때문에 나는 떠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1930년 여름, 안재홍은 16일 간의 여정에 오른다. 경성역을 출발하여 원산, 무산, 두만강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오른 후 압록강 연안의 혜산을 거쳐 북청 해안에 들렀다 귀향하는 일정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안재홍의 눈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우리 산과 들, 그리고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와 장엄을 지닌 백두의 모습만이 보인 것은 아닌 듯 싶다. 비옥한 농토에 넘쳐나는 빈곤한 사람들과 한 나라의 중심지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 만으로는 살 수 없는 자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삶이 더더욱 남루해 보이는 어느 산골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민족의 성지라는 백두산 천지에서 나부끼는 일장기 또한 그의 눈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요즈음은 연평도 사건이다 뭐다 해서 콩사탕을 극도록 싫어하는 제2, 제3의 이승복 어린이라도 등장할 기세다. 이런 와중에 백두산 기행문을-그것도 지금의 서울에서 출발하여 오롯이 육로만을 거쳐 백두산에 도착하는 기행문을- 읽는 심정은 참으로 너덜너덜했다. 기행문을 읽는 맛 중 하나는 그 글의 배경이 된 곳을 직접 내 발로 걸어보는 것인데 경성역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이동 후 백두산에 닿는 여정이라니... 1930년 당시는 일제치하에서 고생스러웠겠지만 적어도 내 민족이 사는 땅을 내 맘대로 걷지 못하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하니 알찬 기행문을 읽고도 마음이 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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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아편과 고착된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아마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부인이 아편에 중독되어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이 아닐까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내가 직접 아편을 복용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아편'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도 가슴 저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 황제>의 영향이 클 듯 싶다.

 

얼마 전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라는 책을 받아서 읽게 되었다. 몽환적인 자태로 아련하게 퍼지는 아편의 하얀 연기가 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책 표지. 그 이미지를 보고도 어찌 이 책을 안 읽을 수 있을까! 푸이의 서글픈 부인이 나를 향해 '어서 이리와 나를 읽으렴-.'이라고 부르는 것만 같아 나는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벌써 이 책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금 두렵기도 했다.

 

이 책의 매력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시피 이 책이 정말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극히 논픽션적인 고백.

저자인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59)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며 옥스퍼드 우스터 칼리지 재학 시절부터 실제로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한-그리고 아편의 늪에 빠져 소위 '아편 중독자'가 된- 인물이다.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그의 대표작으로 자신이 왜 아편중독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편을 복용하면서 겪은 쾌락과 환상에 대해, 그리고 아편으로 인한 고통 등에 대해 술회한 자전적 에세이다.

 

토머스 드 퀸시가 살았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전역은 소위 '낭만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드 퀸시 또한 이러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 중 한 명인데 그의 고백록을 읽으며 나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아편쟁이의 솔직하지만 완전히 솔직할 수는 없는 고백을 듣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토머스 드 퀸시가 살던 19세기이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이든, 무언가를 '고백'한다는 데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나 자신의 경험에 대한 고백은 완전한 자의식이 수반될 때 진실로 '솔직한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서를 읽고는 드 퀸시가 실제로 쓴 글의 뉘앙스를 100% 파악하기는 힘들겠지만)나의 느낌 상 드 퀸시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아편중독자로 살았던 시대를 '고백'하는 용기와 솔직함은 지녔으되 자신의 아편중독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하지는 않은 것 같다. 혹은 고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치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편을 시작했고 쾌락만을 좇기 위해 아편을 상용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부분은 아편을 복용하면서 그가 느꼈던 환상에 대한 묘사였다. 어쩌면 아편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동반한 쾌락과 환상은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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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빙유 - 바로 이 순간 그대를 위해 부르는 노래
구효서 외 지음 / 좋은생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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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제 현재의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되어버린 이들의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방문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지금 슬퍼한다고해서 내 삶이 슬퍼지는 것도 아니요, 그 사람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다 해도 지금 내 삶 또한 기쁨으로 가득차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저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의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슬그머니 방문하는 것이다. 내 방문의 흔적을 남길 것도 아니면서.

 

『바로 이 순간 그대를 위해 부르는 노래 LOVING YOU』라는 조금은 낯간지러운 제목의 책을 읽었다. 문정희, 신달자, 하성란, 김별아, 천운영 등 이름만 들어도 "아아~~"할만한 소위 유명인(?)들이 그들이 겪었던, 겪고 있는, 혹은 누군가에게 들었던 '사랑'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현재의 내 삶은 이렇다. 내 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며 살아가다 보니 남의 살아가는 이야기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점점 없어지고 지금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거나 혹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사랑을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뭐하러 남의 사랑이야기까지 읽는 수고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내가 좋아했고, 나를 좋아했고, 서로가 좋아했던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행복하기로 하고 쓸쓸하기도 한 그런, 어지러우면서도 동시에 충만감이 느껴지는(?) 그런 묘한 마음이 들어버렸다. 

 

'생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랑하라'라는 문정희 시인의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이 책은 <잊지 못할 그대에게>, <사람은 누구나 별이 될 수 있다>, <사랑하면 모든 게 예쁘다>, 이렇게 세 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에는 3~4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누군가의 지나간, 혹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고백으로 꾸며진다. 여기에 '사랑'에 관련된 명언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중간중간 등장하는데 그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사랑이란 참 아름답고 할 만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세상에는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가 처음부터 완벽한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완벽하게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읽다 보니 그 모습은 다양하지만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 없이 사는 것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미건조한 삶,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갖게 된 이 느낌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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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에트가 웃는다
엘자 샤브롤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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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한 살 하고도 한 달 나흘을 넘긴 할머니를 묘사하는데 이런 단어를 사용해도 될까?

조금쯤은 막무가내이지만 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는 난생 처음이다. 그녀의 이름은 쥘리에트! 설마하니 백 살 이상까지 살까 싶어 일단 2004년에 죽는 것으로 하고 자신의 생몰년을 확 박아넣은 묘지석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이런 쯧쯧..벌써 2005년이 되어버렸고 정성스레 만든 묘지석은 거실 장식품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매일 아침 "오늘은 참 죽기 좋은 날이야!"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깔끔하고 품위있는 마지막 모습을 남기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가장 자신있는 표정을 짓는 연습을 하는 쥘리에트의 모습은 가슴 저릿하면서도 껴안아 주고싶을 만큼 귀여운 구석이 있다.

 

쥘리에트가 평생을 보낸 이곳은 프랑스 중부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지도에서도 조만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작은 마을, 풀리주악이다. 한 때는 이곳도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던 복작복작한 산골마을이었지만, 이제는 백 살이 넘은 쥘리에트를 위시하여 소위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칠팔십대의 노인들 열 명 남짓만이 마을의 구성원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들은 풀리주악과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텔레비전-만을 각자의 집에서 응시한 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만약에 '풀리주악 신문'이 있다면 '늘 바게트로 아침식사를 하던 비베트가 오늘은 호밀빵으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정도가 핫 토픽감이 될 정도로 정말이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마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풀리주악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의 꼬맹이-그렇다. 키다 190센티미터로 조금 크고 나이는 40대로 조금 많은 꼬맹이- 피에로가 "저 이제 풀리주악을 떠날래요."라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피에로가 떠나고 나면 이제 누가 정기적으로 주민 전체의 쇼핑목록을 받아 도시로 나가 식료품 등속을 사다 주는 거지?

괴팍한 성미로 늘 좌중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비베트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텔레비전인데, 피에로가 떠나면 이제 비상 시 누가 비베트의 텔레비전을 고쳐 주는 거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풀리주악의 집 수리는 이제부터 누가 도맡아 하는 걸까?

피에로가 풀리주악을 떠나고 난 후의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풀리주악의 주민들은 실로 몇 십년 만에 쥘리에트의 집에 모여앉아 머리를 맞대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목표는 단 하나. 피에로가 풀리주악에 남아있도록 만드는 것!

 

책은 정말 재미있다. 정말이지 번역서 중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은 실로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다. 저 멀리 프랑스 하고도 산골의 작은마을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내 가슴에 직선으로 날아와 내리꽂힌 것만 같다.

소돔과 고모라가 될 뻔한 이야기를 풀리주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전원일기식의 푸근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저자의 솜씨에 반해버렸다. 2010년 출간 예정이라는 그녀의 다음 작품, 『루이스의 전쟁』이 참을 수 없이 기다려진다.

쥘리에트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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