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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등척기 -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안재홍 지음, 정민 풀어씀 / 해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1930년에 발표된 안재홍의 백두산 기행문이 정민 교수의 번역(?)을 통해 2010년 드디어 내 곁을 찾아왔다.
『백두산 등척기』는 조선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사학자, 그리고 조선일보사 사장이자 물산장려회 이사로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민세(民世) 안재홍 선생이 1930년 조선일보 지면을 빌어 발표한 기행문을 1931년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낸 것으로 당대의 대표적 기행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제는 글로 밖에 접할 수 없는 당시의 백두산 근방의 마을과 국경지대 모습을 상세한 묘사와 사진을 빌어 속이 꽉찬 알밤처럼 소개하고 있다.
시작하는 말에서 역자(譯者)가 언급했듯,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어의 변화는 실로 무쌍하여 같은 한국어라 하더라도 쓰여진 시대와 읽혀지는 시대 사이의 거리가 멀다면 번역이 없이는 그 내용을 오롯이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불과 80년 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민 교수가 소개한 원문의 문장은 수 많은 한자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한문투의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어 소위 한글세대인 나로서는 그 절반만 이해한다 해도 '장하다!'고 칭찬 받아 마땅 할 정도였다. 정말이지 정민 교수의 번역, 혹은 해설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이 장엄한 백두산 기행문을 접해 볼 수나 있었을 것인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몸와 마음을 쉬게 하는 시간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 떠남으로 인해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혹은 똑같은 것이라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내가 현실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그 무엇(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깨달음과 배움의 느낌이 너무도 짜릿하기 때문에 나는 떠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1930년 여름, 안재홍은 16일 간의 여정에 오른다. 경성역을 출발하여 원산, 무산, 두만강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오른 후 압록강 연안의 혜산을 거쳐 북청 해안에 들렀다 귀향하는 일정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안재홍의 눈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우리 산과 들, 그리고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와 장엄을 지닌 백두의 모습만이 보인 것은 아닌 듯 싶다. 비옥한 농토에 넘쳐나는 빈곤한 사람들과 한 나라의 중심지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 만으로는 살 수 없는 자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삶이 더더욱 남루해 보이는 어느 산골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민족의 성지라는 백두산 천지에서 나부끼는 일장기 또한 그의 눈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요즈음은 연평도 사건이다 뭐다 해서 콩사탕을 극도록 싫어하는 제2, 제3의 이승복 어린이라도 등장할 기세다. 이런 와중에 백두산 기행문을-그것도 지금의 서울에서 출발하여 오롯이 육로만을 거쳐 백두산에 도착하는 기행문을- 읽는 심정은 참으로 너덜너덜했다. 기행문을 읽는 맛 중 하나는 그 글의 배경이 된 곳을 직접 내 발로 걸어보는 것인데 경성역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이동 후 백두산에 닿는 여정이라니... 1930년 당시는 일제치하에서 고생스러웠겠지만 적어도 내 민족이 사는 땅을 내 맘대로 걷지 못하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하니 알찬 기행문을 읽고도 마음이 아린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