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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에트가 웃는다
엘자 샤브롤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백 한 살 하고도 한 달 나흘을 넘긴 할머니를 묘사하는데 이런 단어를 사용해도 될까?
조금쯤은 막무가내이지만 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는 난생 처음이다. 그녀의 이름은 쥘리에트! 설마하니 백 살 이상까지 살까 싶어 일단 2004년에 죽는 것으로 하고 자신의 생몰년을 확 박아넣은 묘지석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이런 쯧쯧..벌써 2005년이 되어버렸고 정성스레 만든 묘지석은 거실 장식품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매일 아침 "오늘은 참 죽기 좋은 날이야!"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깔끔하고 품위있는 마지막 모습을 남기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가장 자신있는 표정을 짓는 연습을 하는 쥘리에트의 모습은 가슴 저릿하면서도 껴안아 주고싶을 만큼 귀여운 구석이 있다.
쥘리에트가 평생을 보낸 이곳은 프랑스 중부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지도에서도 조만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작은 마을, 풀리주악이다. 한 때는 이곳도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던 복작복작한 산골마을이었지만, 이제는 백 살이 넘은 쥘리에트를 위시하여 소위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칠팔십대의 노인들 열 명 남짓만이 마을의 구성원일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들은 풀리주악과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텔레비전-만을 각자의 집에서 응시한 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만약에 '풀리주악 신문'이 있다면 '늘 바게트로 아침식사를 하던 비베트가 오늘은 호밀빵으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정도가 핫 토픽감이 될 정도로 정말이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마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풀리주악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의 꼬맹이-그렇다. 키다 190센티미터로 조금 크고 나이는 40대로 조금 많은 꼬맹이- 피에로가 "저 이제 풀리주악을 떠날래요."라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피에로가 떠나고 나면 이제 누가 정기적으로 주민 전체의 쇼핑목록을 받아 도시로 나가 식료품 등속을 사다 주는 거지?
괴팍한 성미로 늘 좌중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비베트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텔레비전인데, 피에로가 떠나면 이제 비상 시 누가 비베트의 텔레비전을 고쳐 주는 거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풀리주악의 집 수리는 이제부터 누가 도맡아 하는 걸까?
피에로가 풀리주악을 떠나고 난 후의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풀리주악의 주민들은 실로 몇 십년 만에 쥘리에트의 집에 모여앉아 머리를 맞대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목표는 단 하나. 피에로가 풀리주악에 남아있도록 만드는 것!
책은 정말 재미있다. 정말이지 번역서 중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은 실로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다. 저 멀리 프랑스 하고도 산골의 작은마을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내 가슴에 직선으로 날아와 내리꽂힌 것만 같다.
소돔과 고모라가 될 뻔한 이야기를 풀리주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전원일기식의 푸근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저자의 솜씨에 반해버렸다. 2010년 출간 예정이라는 그녀의 다음 작품, 『루이스의 전쟁』이 참을 수 없이 기다려진다.
쥘리에트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