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사용법 - 소설들(Romans)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인가 골몰할 대상을 찾지 못할 때 인생의 시간을 보내기란 더없이 지루한 것이다. 학문과 예술의 효용은 단지 그것뿐이다.' 장 그르니에의 책에서 대강 이런 내용의 문장을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문장에 보라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었던 것까지 기억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이 문장이 더없는 울림을 가지고 기억 속에 되살아난 것은 <인생 사용법>이라는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였다. 그것은 녹녹치 않은 책의 두께만큼이나 깊고 무거운 울림이었다. 그처럼 이 작품 안에는 더없이 사소한 것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람들, 단순한 시간 죽이기처럼 보이는 행위를 무거운 침묵 속에서 심각하게 수행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보여주는 삶의 양상은 결코 우스꽝스럽거나 경박하지 않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고결한' 인생 사용법이라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소설들'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작품 안에는 100에서 하나 모자라는 99개의 장에 걸쳐 다양한 일화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갖가지 일화들이 결국 퍼즐 조각들처럼 맞물려 세 명의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 이야기에는 퍼즐이라는 놀이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즉 퍼즐에 대한 이야기가 퍼즐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퍼즐이란 바로 주인공인 퍼시발 바틀부스의 인생을 소진시키기 위해 마련된 퍼즐이다. 그는 퍼즐로 만들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10년 동안 발렌이라는 화가에게 수채화 기법을 배운다. 그리고 20년 동안 세계 일주를 하면서 500점의 수채화를 그린다. 이 그림들은 윙클레라는 제작자에게 보내져 퍼즐로 제작된다. 그리고 바틀부스는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와 20년 동안 그 퍼즐들을 다시 맞추는 데 골몰한다. 그는 퍼즐이 완성되면 특수한 용액에 담그어 수채화를 완전히 지워버릴 계획을 갖고 있다. 즉 그는 약 50년에 걸친 그의 삶과 활동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무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퍼즐은 그의 결코 야심적이지 않은 야심이 응축되어 있는 사물인 동시에 작품 속의 인물들이 살고 있는 건물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바틀부스, 노화가 발렌, 윙클레는 모두 시몽크뤼벨리에 가의 한 건물에 살고 있다. 그리고 99장에 걸친 일화들도 모두 이 건물에 얽혀 있는 사연들, 이 건물의 입주자들의 인생 이야기이다. 결국 건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귀착되는 공간이며, 그들의 인생에 의해 짜맞추어지는 퍼즐과 같다.

이처럼 직품은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치밀한 구성과 계산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군데군데 온갖 문학적 실험이 삽입되어 있어서 기존의 '소설적인' 무엇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상당히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이렇게 잘 짜여진, 규칙과 규칙 사이의 유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결국은 인생의 수많은 우연과 반전, 삶의 의외성에 대해 감동을 느끼게 하고 있다.

작품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책을 덮었을 때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바틀부스가 그렇게 꿈꾸었던 완전한 무로의 회귀, 그리고 발렌이 죽었을 때 남긴 백지 상태의 캔버스와도 같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읽을 때는 그렇게 두꺼웠던 책이 스르르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렇게 이 책은 독서의 즐거움, 그 외에는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심각한 의미나 교훈이 먼저 두드러지는 작품과는 달리 문학 그 자체도 무위의 활동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문학의 위대함, 인생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니 또 얼마나 역설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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