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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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윤대녕, 문학동네, 2010


단편소설을 묶어 놓은 책이 소설집이다. 요즘처럼 한 곳에 집중하기 힘든 삶의 굴레에서 장편소설은 그 두께만큼 부담스럽다. 작은 시간의 틈 속에서 작품을 읽고 음미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단편 소설은 독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독자에 따라서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위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감각적인 미디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이 책에 포함된 8편의 단편 중 [천지간]은 1996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윤대녕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 물론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작가가 주목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증명해준다.


[천지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 작품 속에는 흥미진진하고 스펙타클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잔잔한 강물이 소리를 죽이며 흘러가듯이 처음부터 하얀색, 백색, 흰색의 이미지만 스쳐지나간다. 백색에 미친 외숙, 어릴적 죽음의 문턱에서 보았던 흰빛, 감성돔 빨간 얼룩 아래에 숨겨진 흰 뱃살, 흰눈.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구요?


시작은 이렇게 도발적이다. 작가가 화자에게 화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다. 좀 과장을 해본다면 이 첫 문장이 작품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것 같다. 한 겨울 한 남자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한 여자를 따라갔다. 외숙모의 죽음에서 비롯된 자신의 검은 양복은 그녀를 살리고 서서히 백색으로 바랜다.


나는 장님처럼 꺼이꺼이 길을 짚어 가며 홀로 그 곳을 돌아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다. 한번 왔다가 가는 인생처럼 주인공은 왔다가 돌아간다. 주인공이 있었던 물질적인 공간은 완도의 구계등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있었던 곳은 거대한 우주에 버려진 띠끌 같은 인간일 수도 있고, 시간의 강위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일 수도 있다. 이상문학상의 심시위원이었던 이어령의 말처럼 생의 한 순간을 운명의 사슬에 꿰어 보는 소설일 수도 있다. 보통사람들의 흔한 인생살이처럼 스텍타클하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안지만 그 적막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비록 세상에 버려졌지만, 인생이란 것은 살아볼만 하지 않는가.


[천지간]에 나오는 윤대녕의 미문


-하지만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있을 수 있는 타인과의 찰나간 마주침에 불과했다.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노란빛의 잔상이 좀 길게 동공에 남아 있다 싶어 그녀가 사라진 곳을 눈으로 슬쩍 더듬고 있을 때였다.

-얼마든지 제 시선을 다른 데로 빗댈 수 있는 거리의 유동성 때문인지 그녀는 제법 대담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암만해도 그녀의 눈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 크나큰 당혹감이 천둥처럼 지나가고 나서 그리 길지도 않은 사이에 그녀의 얼굴에 뒤덮이던 적막한 체념의 그림자. 그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래, 죽음 앞에 납작 엎드리러 가다 나는 산(生) 죽음과 서로 어깨라 부딪친 거야.

-버스가 나주를 지날 때 나는 혼곤한 피로에 싸여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죽음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허우적대도 중심을 되찾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뼈마디의 힘이 다 빠져 나갔을 때 나는 물 속에서 번쩍 눈을 뜨고 마지막 생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삶과 죽음이 벌거벗은 남녀처럼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마침내 날숨이 코까지 올라왔고 이어 실크 커튼처럼 부드러운 빛이 내 손과 발을 조여 묶기 시작했다. 짙은 푸른 빛이었던 실크 커튼은 점점 보랏빛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보랏빛이 흰빛으로 바뀔 즈음 나는 의식을 읽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얼굴에서 아가 물 속에서 보았던 예의 푸른빛과 보랏빛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한데 그 흰빛의 광경은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무채 위에 누워 있는 감성돔의 아가미가 벌죽거리고 있다. 새삼스럽게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살풍경한 모양이다. 산 채로 재재 칼질을 당해 아랫도리를 홀랑 벗고 누워 있다. 살았달 수도 없고 죽었달 수도 없이 그렇게.

-무즙만 풀어서 찍어 먹는 겁니다. 무즙은 생식을 할 때 제독 작용을 해주고 맛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혀끝을 시원하게 해주죠.

- 그저 어딜 가나 타향이란 걸 깨달은 거지요.

-천지간 사람이 하나 들고나는데 무슨 자취가 있을까만요.

-얼마 만에 쳐다본 밤 하늘인지도 모르지만, 사금 광주리를 엎어 놓은 듯이 그야말로 무진장한 별들이 머리 위에 가득 내려와 있었다.

-금세 쏴아 하는 파도 소리와 함께 웬 여자가 통곡하는 소리도 한결 가까이 들려 왔다. 달빛은 희미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돌밭은 철조망 속의 지뢰밭처럼 음산해 보였다.

-그새 바람에 힘이 실려 수평선 위에 떠 있던 먹구름이 눈에 뜨일 만큼 풀려 있었다. 구름의 그림자인지, 바다는 군데군데 짙푸른 얼룩을 끌어안고 소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건가.

-저는 검은 옷을 입고 새벽에 보름달을 보나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흔히 상대적인 진실이란 게 있어서 서로가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끝내 밝혀지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요컨대 이쪽 마음을 숨기고 있는 마당에는 저쪽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 마음의 정체까지 모르고 있다면 정녕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며 나는 소리꾼이 빠져 죽은 바라를 치를 떨며 내다보았다. 바다는 갖은 소란을 집어삼킨 채 가만가만 몸을 뒤채고 있을 뿐이었다.

-커튼을 치고 불을 끄자 남은 어둠이 그물처럼 드리워졌다. 그러나 정녕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 새벽 남은 어둠 속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는 것을, 여자와의 관계가 끝나고 난 다음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내 손 바닥 안에 달이 떠 있다는 것을.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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