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츠만의 원자 -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논쟁
데이비드 린들리 지음, 이덕환 옮김 / 승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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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을 아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맥스웰이나 볼츠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 한편, '엔트로피'라는 단어는 한 번쯤 들어봤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뉴턴 역학과 전자기학 및 열역학으로 완성된 고전역학에서 현대의 양자역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중간기를 살면서 그 연결의 매개자 역학을 담당했던 볼츠만이라는 '천재' 과학자에 대해 전기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막스 플랑크에 비해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볼츠만의 업적, 동료 과학자들의 공격을 극복하고 그러한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울여야 했던 노력, 원자론을 둘러싼 당시 과학계의 논쟁 양상 그리고 볼츠만 개인의 불안했던 성격과 생활 등에 대해 잘 소개해주고 있다.

저자의 집필 의도는 볼츠만 개인의 '천재성' 찬양이라기보다는 과학에서 관찰과 이론, 또는 실험과 가설은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라는 과학철학적 문제에 대해 현대 이론 물리학 현장에서 일했던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저자 자신만의 주장을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볼츠만의 원자론이라는 극적인 소재를 채택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이 책의 제목인 '볼츠만의 원자'는 19세기후반 ~ 20세기초반 사이에 당시 과학계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열역학 제2법칙의 기초 확립 문제에 대해 맥스웰이나 볼츠만이 주축이 되어 주장했던 기체 분자운동론을 뜻하는 말이다. 독일의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가 천명한 고립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일어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해 볼츠만은 '원자'나 '분자'들이 어떻게 운동하는지 뉴턴 역학적으로 그 원리를 설명하려고 했다. 즉, 엔트로피 증가라는 거시적 현상을 기체 분자들의 뉴턴 역학적 운동이라는 미시적 기초를 통해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볼츠만은 노력했고, 그에 대한 반대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원자라는 개념을 굳이 물리학에 도입하는 것은 물리학적 설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자의 대표자는 음속의 단위 '마하'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물리학자 겸 과학철학자였던 마흐였다. 마흐는 관찰된 자료들 사이의 패턴을 기술하는 것 이외의 어떠한 '직접' 관찰될 수 없는 개념이나 가설들은 물리학의 설명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며 볼츠만을 공격했다. 한편 수학자로 유명한 제르멜로, 볼츠만 대신 베를린 대학 물리학 교수를 차지한 플랑크 등은 볼츠만이 확률론적 방법을 결정론적인 역학과 섞었다는 이유로 볼츠만을 비판했다. 기체분자운동론에 우호적이었던 실용주의적인 영국의 과학계와는 달리 본질이나 의미를 중요시했던 독일 과학계는 볼츠만의 이론에 대단히 적대적이었고 이러한 이유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볼츠만은 자살했다고 한다.

참고로, 확률론적 방법을 도입했다고 볼츠만을 비판했던 플랑크는 막상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흑체복사법칙을 연구하고 나서는 볼츠만의 방법의 필요성을 깨닫고, 다시 이번에는 거꾸로 마흐를 비판했다고 한다.

20세기 중반 빈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논리실증주의 운동에 대해 논리실증주의에 따를 경우 과학자들 자신조차 서로의 실험 결과에 대해 일상 언어를 통해 의견을 교환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될 것이므로 논리실증주의는 너무 극단적인 잘못된 입장이라고 비판했던 보어의 언급처럼, 이 책에서도 저자는 '직접 관찰'이 불가능한 이론과 가설을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마흐의 주장은 너무 극단에 치우친 것으로서 물리학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볼츠만의 생애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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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발견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음, 이충호 옮김 / 푸른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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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스타일의 프리랜서가 천문학에 대해 광범위하게 간략하게 쉽게 소개해주는 책이다.

천문학이 과학으로서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적 과학으로 발전해왔는지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인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에 대하여 설명한다. 행성들마다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중요 데이터를 소개하고 또 각 행성들마다의 특징도 간략하게 곁들여 소개해준다. 아울러, 태양계라는 범위를 넘어 은하의 세계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한편, 달 탐사나 인공 위성 발사 등과 같은 우주 정복의 역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곁들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현대 물리학에서 진행중인 우주론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 책의 장점은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서평자 본인과 같은 일반 독자들도 매우 쉽게 천문학이 그동안 밝힌 우주에 대한 지식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천문학의 과거와 현재의 역사, 천문학을 통해 밝혀진 태양계와 은하, 그리고 우주론에 대한 정보와 지식들을 동시에 쉬운 말로 전해들을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대신 이 책은 일반 독자에 대한 입문서격의 책이기 때문에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은 부족한 편이다. 가령 마지막 파트인 '제5부 우주의 운명'만 하더라도 왜 그러한 주제를 그것도 그렇게 얇은 분량과 지극히 짧기만한 설명으로 이 책에 포함시켰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천문학이나 현대 물리학에 대해 간략하고 쉬운 입문서를 구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흥미진진한 소설적 재미나 심도 있는 현대 물리학 이론의 지적 감동을 기대한다면 이 책이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니 주의해야 할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일어났던 가장 특징적인 반응은 고등학교때 지겹게 외우며 문제 풀던 지구과학 내용이 잠깐 떠오르면서, 그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우주의 장대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태양계는 '우리은하'의 가장자리에 속해 있으며, 태양은 우리은하에서는 2000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 우주의 장대함이여!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겼다. 지구는 왜 자전하는 것일까.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도 모두 자전을 한다. 공전은 중력에 따른 운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 자전은 이해하기 힘들다.

은하는 정말 크다. 그런데 그런 은하가 또 수천억 개 있다고 하며, 각 은하에는 수십억 개의 별이 들어 있다고 하니.. 우주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상의 수치에 대한 크기 감각을 가뿐하게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한편,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별이 있다는 거의 동일한 내용의 조르다노 브루노와 갈릴레이의 주장은 왜 그렇게 다른 취급을 받았을까 묻게 된다. 가톨릭 순회 사제였던 조르다노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을 공공연하게 설파하고 다닌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이 지배하던 당시의 교회 주장을 어긴 대가로 브루노는 혀에 쇠꼬챙이가 꽂히고 불에 살이 타며 죽었다고 한다. 반면, 별이 당시 통상적으로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자신이 놀랍게 개선시킨 망원경을 통해 직접 관찰함으로써 보여주었던 갈릴레이는 죽음을 면했다. 어쩌면 동일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사상적으로 주장했던 철학자 브루노는 지식-권력 집단에 무참히 짓밟혔지만, 관찰한 결과물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서 보여주었던 갈릴레이는 그래도 살아남았다. 구체적인 자료와 효과적이며 강력한 이론, 그리고 수학적 모델을 통한 설명은 대다수의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기존 지식 권력을 이길 힘이 상당하지 않을까.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또 다시 한 번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소중한 소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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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정신 그리고 수학 경문수학산책 15
장 피에르 샹제, 알렝 콘느 지음, 강주헌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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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생물학자와 수학자가 만나서 서로 자기가 아는 지식을 어떻게 상대방의 학문에 적용 또는 투영(projection)시킬 수 있을지 토론한다. 정돈된 결론과 정리를 제시하며 설명하기 보다는 어떤 것들이 가능할 수 있는지 이것저것 마구 떠들어대며, 자기의 상상력을 꺼내 보여주는 편에 가깝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뇌와 수학적 대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경생물학자는 두뇌를 연구하고 수학자는 수학적 대상- 예를 들어, 소수(prime number)-을 연구한다. 각자 자기 전문 필드에서 지금까지 연구했던 결과물들을 서로에게 소개해주고 상대방 의견을 구하고 한다. 수학적 대상은 물리학의 대상인 자연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두뇌라는 물질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일 뿐이므로 수학적 대상은 두뇌와 같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구성물일 뿐이라고 신경생물학자인 샹제는 줄기차게 주장한다. 반면에 수학적 대상은 개별 수학 연구자의 연구 활동과는 관계 없이 다양한 연구 주제와 시대에 걸쳐 놀랍도록 일관성을 보여왔으므로, 수학적 대상은 수학자 인간의 구성(construction)과는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수학자인 콘느는 줄곧 반론을 펼친다.

수학적 대상이 일종의 문화적 표현체 또는 문화적 대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학자는 일단 의견이 일치한다. 즉, 수학적 대상도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수학적 대상의 존재성이 얼마나 인간 수학자의 활동에 독립적이냐 하는 것이다. 샹제는 새로운 수학적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필요를 느낀 인간 수학자가 구성한 결과로 새로운 수학적 대상이 나타날 뿐이므로 수학적 대상의 존재성은 인간 수학자의 활동에 의존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콘느는 인간의 자의적인 조작 활동과는 독립적으로 자기 완결성의 놀라운 논리적 특징에 따라 수학적 대상이 존재해왔으며, 인간 수학자는 그러한 수학적 대상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인지하지 못하던 새로운 수학적 대상을 필요에 의해 인지하게 되고나서야 비로소 '발견'하게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콘느의 논의에서 수학적 대상 존재성의 독립성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근거는
'수학의 비합리적인 효율성'이다. 즉, 논리성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편의'에 따라 구축된 수학이 인간적인 '편의'에는 전혀 관심 없는 자연에 이상하게도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으로 잘 적용된다는 이해하기 힘든 비합리적인 사실이 바로 '수학의 비합리적인 효율성'이다. 콘느의 말은 '수학의 비합리적인 효율성'만 보더라도 수학적 대상이 인간의 '구성'에 대해 상당히 독립적인 존재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 내용은 수학적 대상은 인간 두뇌의 산물이므로 플라톤적 실재론은 맞지 않다는 샹제의 공격과 '수학의 비합리적인 효율성' 측면에서 수학은 인간 두뇌의 활동과는 독립적으로 자연과는 또다른 물질성을 갖는다는 콘느의 방어가 반복된다. 진화론이 어떻게 수학에 응용될 수 있고, 위상수학이 신경생리학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설명하는 대목이 조금 나오긴 하나, 설명을 듣는 학자는 딴소리하기 일쑤이며 설명하는 학자는 혼자말하기 일쑤이다.

마지막 파트인 [윤리의 문제]는 문화-윤리-철학 방면에 대한 샹제의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지식 뽐내기로 점철되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샹제의 기나긴 '문화이론'적 설교를 6개의 챕터 형식으로 편집했고, 콘느의 지극히 짤막한 건의를 1개의 챕터 형식으로 끼워넣은 것은 바로 이 책에서 계속되는 혼자말하기와 딴소리하기의 백미라고 하겠다. 괴델의 정리와 튜링 기계를 논하는 대목 또한 딴소리하기와 눈꼴 사나운 야합하여 서로 칭찬하기의 극치이다.

학제적 연구의 시도라는 용기는 가상하나 밀도 높은 토론이라는 좀더 책임있는 결과가 부족해 아쉬움을 많이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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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 1 책세상총서 20
볼프강 벨쉬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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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합리성의 다양한 형식들이 실질적으로 제휴할 수 있는 통일성 형식을 찾는 것'이 긴요한 문제임을 역설하며, 저자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시도에서 나온 산물이다. 문제를 제시하는 저자의 인상적인 문장을 직접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원성을 인정하되, 그것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이성 유형들의 통일 형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단호하게 다원주의로 이행함으로써 겨우 벗어난 전체주의를 다시 뒷문으로 불러들이지 않고도 마련할 수 있는 이성의 통일 형식이란 어떤 것인가? 합리성의 다양한 형식들이 실질적으로 제휴할 수 있는 통일성 형식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최대 과제이다.' (- 이상, 벨쉬의 본문 인용 끝)

근대를 거쳐 나온 모던의 지속적인 주요 관심사인, 합리성의 분화된 다양한 형식들이 온전히 그 개별적 다양성과 개별적 형식 안에서의 일관성을 온전히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합리성의 하나 이상의 형식들이 서로 결합될 수 있도록 하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 엄밀한 포스트모던의 근본적인 관심사인 이 주제에 대해 벨쉬 자신이 정리해 제시하고 있는 해답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벨쉬가 소개한 리오타르의 제안은, '철학적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주창하는 '철학적 정치'는, 조금 더 다수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을 이용해 어떤 일부분의 입장을 전체에 강요했던 전체주의적 근대의 주변 세력 잠재우기에 대항해, 이제 철학자들은 현격한 근본적 차이를 보여 서로 경쟁하며 분쟁을 벌이고 있는 사건에 참여해 여러 다양한 주변적 규칙 체계들과 형식들의 입장에 대해서 일관되게 해명하고 주장해주기라고 한다.

즉, 이제 정의는 법원의 판사가 법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지배자적 위치의 일방의 규칙과 형식만을 선언함으로써가 아니라, 변호사가 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소외된 주변 세력들의 다양한 규칙들과 형식들도 분명하게 시끄럽게 떠들어줌으로써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벨쉬는 이런 리오타르의 제안에 대해, 그 애초의 문제점을 진단할 때 너무 다원성의 차이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차이들의 결합에 대해서는 냉혹하게 결별하도록 부추겼고, 따라서 그 처방전 역시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차이들이 서로 결합하고 교차하는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벨쉬 자신 역시 구체적으로 해결책을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니.

실망스러운 기분에 나는 다시금 다음처럼 작게 속으로 웅얼거리게 된다: '역시, 철학이 그렇지 뭐.. 철학아, 왜 실제적인 실천화 전략과 발전적인 구체적 프로그램은 거의 제시해주지 못하는 거니?' 과연 다양한 합리성들이 실질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러한 통일적 형식이나 규칙을 만들어내거나 발견할 수 있을까?

둘 내지 서너개의 합리성들이 연결될 수 있는 특수한 조건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먼저 찾아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그러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정리들로부터 힌트를 얻어 상상력을 보탠 후에야 비로소 위와 같은 보편 정리를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이 마침내 20세기 후반에 증명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같은 위대한 정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가는지 그 작업 방식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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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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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김훈이라는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고서 칼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제가 소설을 안 좋아하는 편인데, 칼의 노래는 읽는 내내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작가 김훈의 문장이 아름답다.'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장은 사회과학-사상적 깊이의 힘은 약한 편입니다. 화가에 가까운 감성으로 글을 쓰는 듯합니다. 칼의 노래에 나타난 김훈의 문체는 거의 소설의 화자 자신을 대상으로 삼은 독백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은 담겨 있지만, 현실 문제 해결력으로서는 무의미한 '유희'적 문장들이 꽤 있습니다. 즉, <칼의 노래>는 소비와 유희적 글쓰기로서 훌륭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유희적'이라는 저의 단어는 부정적 의미는 없고, 단지 자칫 잘못하면 생산적인 것만을 우월시하기 쉬운 산업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만족과 행복을 충분히 즐길 것을 일깨운다는 면에서의 한정적 가치를 갖는다는 뜻의 용어로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칼의 단순성이라는 미학에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자의 글 자체에 전체주의적 색채가 드러난다고 지적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단순성과 순결하고 고결한 영웅성을 찬양하는 노래에는 언제나, 사변적 반성을 통한 개인과 소수의 존중 노력을 탐욕적 권모술수의 복잡함이라고 치부하며 무시해버리는,전체주의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하자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관련되는 대목으로 선조 임금과 문관 출신 장군인 권율을 백성과 국가의 공적 이익 대신 자기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노회한 탐욕적 정치가로 묘사하는 장면이 책에 나옵니다.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이순신 개인의 순수성과 고결함을 그가 무관이었다는 점에서 칼의 단순성과 연결시킴으로써, 탐욕적 부패 정치인이라는 권율 개인의 고집과 편견을 그가 문관이었다는 점에서 권모술수적 잔머리의 복잡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효과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다시 복잡하고 현란한 언변을 이용해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사변적 문관의 부정부패 이미지를 연쇄적으로 연상시켜, 단순하게 애국애족하는 실천성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치켜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하며 중요한 것은 단순한 진리의 용감한 실천이다'라는 주장은 다수의 검증되지 않은 직관과 편견을 과격하게 밀어붙임으로써 소수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려는 노력에서의 사변과 보편성 추구를 '공동체'를 배신하는 이기주의라고 몰아가게 되기가 참 쉽지 않습니까?

저의 부정적 경고가 약간 강조되긴 했지만, 이 책은 불가항력적인 참담한 역사 앞에서 개인의 처절한 실존적 고민을 아주 유려하고 아름다우며 다소 몽상적이기까지 한 탐스러운 문체로 이야기해준다는 점에서, 아직 김훈이라는 작가를 모르시는 분들이라면 특히나, 한 번쯤 꼭 읽어볼 만하다는 점을 밝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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