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 유럽의 운명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4
앙리에트 아세오 지음, 김주경 옮김 / 시공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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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집시, 보헤미안, 롬, 치가니... 유럽의 한 유랑민족을 부르는 이름들이다. '집시'에 대해서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하다. 집시, 보헤미안 이란 단어를 들으면 뭔가 시적인 느낌이 들고, 자유분방한 모습이 상상된다. 나는 그들이 2차대전 당시 유대인과 더불어 대량학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다. 유대인은 워낙 잘 알려졌으니까. 그런데 집시는 왜 죽였지? 얘넨 정체가 도대체 뭐여? 궁금한 생각이 들어 사보게 된 책이다.

집시들은 중세 말에 갑자기 등장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갔다. 그들이 유럽에 처음 등장했을 때,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출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들은 스스로 순례자라 칭했으며, 小이집트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다. 어찌 됐든 크리스트교의 순례자라고 하니, 유럽인은 처음에 좋은 대접을 해주었으나, 차차 집시들의 "'부랑배, 사기꾼, 도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집시들의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느 정도 실제와 근접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손금 봐주기를 좋아했으며(당시 손금 봐주는 일은 불법이었다) 구걸로 연명하는 한편 도적질을 자행하기도 했다. 국가들 입장에서도 - 국적도 없이 맨날 떠돌아다니는 - 집시들이 세금도 잘 안내면서 치안만 어지럽히는 골칫덩어리들로 보였을 것이다. 고민 끝에 어떤 국가들은 집시를 용병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마차를 끌며 유랑생활을 하고, 플라멩코를 추며 고슴도치 고기를 먹는 그들. 정부들의 온갖 정착화 노력에도 수백 년간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한 그들은 2차대전 때도 옛날 그대로 였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야영할 때 천막을 치고 자던 것이 아예 캠핑카 같이 설계한 마차에서 자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나치는 집시의 순수혈통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지금의 집시들은 죄다 '잡종'이며, 청소해 버려야 할 존재들이라고 했다. 집시들은 그렇게 50만 명 정도가 학살 당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고집스런 집시들은 좀체 변하려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양립되기 어려운 두 가지 상반된 소망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각 국가 안에서 시민권을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전역에서 소수 민족 집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일치될 수 없는 이 상반된 소망이, 서구라는 약속의 땅을 찾아 동구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 집시들'과 대부분 17세기부터 서구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자리를 잡게 된 집시들 사이에 점점 커가고 있는 잠재적인 갈등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즉 일부 정착한 집시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시들은 아직도 유랑생활을 고수하려 하고 있다.

앞 서 집시들이 스스로를 이집트에서 왔다고 했다 했는데, 오랜 연구 끝에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와 다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헤미아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집시들은 유럽 전역, 심지어 아메리카에도 퍼져 살지만 모두 '로마니어'라는 특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언어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 보면, 집시의 조상은 인도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의 외모나 풍습을 봐도 이는 타당한 이야기다. 집시들은 피임을 하지 않으며, 보통 십여 명의 아이를 낳는다. 조혼을 하는 데다 여성 인권도 형편없다. 다음은 그들의 결혼 풍습에 관한 내용이다.

「그 의식 중에는 나이 든 한 여성이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한 후, 그 증거로 얼룩이 묻은 손수건을 손님들을 향해 세 번 혹은 다섯 번 높이 들어 보이는 게 있다. ...손수건이 공개되는 동안 <알보레아> 혹은 <옐리옐리>라고 하는 집시들의 전통적인 결혼 축가가 연주되고, 하객들은 신랑을 헹가래치며 축하해 준다.」

그렇게 결혼한 신부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또한 집시들은 여전히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하고 있다.

「롬들의 평균 수명은 주변 국가의 국민들보다 훨씬 짧다. 어떤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약 46세에서 50세 사이다. 유고슬라비아나 루마니아에는 집시들의 평균 수명이 29세에서 31세에 불과한 지역도 있다고 한다.」

집시들의 이런 생활을 가드조(집시들이 타 민족을 경멸 섞어 부르는 말)의 입장에서 보면 꼭 구제해 줘야만 할 것 같고 정착을 시켜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의 입장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집시들의 특성은 그야말로 '집시' 자체가 시적인 이유를 말해준다. 21세기 다문화 사회에, 집시들이란 정말 다문화의 의미와 적용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드는 매력있는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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