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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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괴물이다. 나이 서른에 엄청난 명저를 써냈다. 맑스도 서른 살엔 뜨내기 공상가에 불과했다. 경의를 표한다.

 지구상의 자유민주주의국가 중에서도 상자유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맑스는 애보다는 증의 대상이다. 내가 봤을 때 이는 한반도 거주민들이 온갖 지정학적, 역사적, 정치적 문제로 인한 비극을 겪은 탓도 크지만 - 맑스가 자초한 면도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양반은 늘상 폭력혁명을 주창했으며, 이에 따라 코뮌의 학살행위를 두둔 내지는 무시하고자 하여 많은 지성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런 폭력혁명은 악용될 소지가 대단히 많다. 이는 당장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만 봐도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맑스는 이른바 '혁명가'들을 너무 물로 봤으며, 인간이 다른 어떠한 종보다도 잔학한 동물이라는 자각도 부족했던 것 같다.

 물론 맑스는 기본적으로 인류 구성원 다수의 행복을 바란 사람이다. 이에 따라 그는 오히려 일견 비정해보이는 어투를 장착하게 됐다.

「마르크스는 모든 종류의 낭만주의, 주정주의 및 박애주의적 요소를 혐오했다. ...그가 서명한 성명서나 선언문, 행동강령에는 도덕적 진보, 영원한 정의, 인간의 평등, 개인이나 민족의 권리, 양심의 자유, 문명을 위한 투쟁 등의 문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은 문구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사고의 혼란과 행동상의 비효율성을 조장하는 허구라고 보았다.」

 그리고 맑스는 엄청난 독서광에다 온갖 종류의 이론들을 잘 배합하여 정립한 사람이지, 자기 혼자 갑툭튀한 천재가 절대 아니었다. 스피노자, 홀바, 포이어바흐, 랭게, 생시몽, 시스몽디, 슈타인, 헤스, 바뵈프, 블랑키, 바이틀링, 블랑, 로크, 애덤 스미스, 푸리에, 슈티르너, 헤겔 등등 맑스의 스승은 책 속에 무진장으로 있었다. 맑스는 이들의 이론들을 적재적소에 배열하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는 맑스의 개인사 - 그가 좋아했던 음식, 흥미로운 일화,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 따위에는 거의 지면을 쓰지 않았다. 그는 맑스가 상기한 스승들에게서 사사(?)를 받는 과정 - 역시 플롯이랄 게 없는, 해당 이론에 대한 배경과 해설, 그리고 맑스가 그 이론 중 최종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취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 에 대해 거진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맑스라는 사람의 전기를 진행하는 데에 이보다 적절한 방식은 없으리라 본다.

「이 이론의 구조와 기본 개념은 헤겔과 청년 헤겔주의자들에게서, 동적 원리들은 생시몽에게서, 물질의 우위에 대한 믿음은 포이어바흐에게서,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견해는 프랑스 공산주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이론은 완전히 독창적이다.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절충주의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대담하면서도 정합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맑스는 독일 사람이고, 인종으로 따지면 유대인인데, 본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싶어했다. 신기한 일이다. 유대인이란 종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민족이다. 그들의 유일신은 현재 세계인구의 대부분을 - 다양한 형태로 통제하고 있다. 그런 유대인인 그가 스스로 유대인임을 부정하고자 한 것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고향, 그리고 조국은 전제군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그나마 맑스 만년에도 비스마르크가 건재했다. 한마디로 프로이센은 맑스를 품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파이터는 파리에 머물게 되었고 엥겔스라는 파트너를 만나게 됐다. 엥겔스는 나중에 수급자나 다름없는 맑스 가족에게 온갖 수단을 동원해 후원을 해주기도 하고 공저한 모든 강령이나 책자 등을 맑스의 공으로 돌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키다리아저씨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맑스도 없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성실한 학생처럼 마르크스가 가진 모든 지적 자양분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건강한 판단, 열정, 활력, 쾌활함을 마르크스에게 제공했으며 마르크스가 빈곤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질 때마다 생계수단을 지원했다.」

 저자는 맑스의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이 찰지게 표현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우주적 비전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에 단테의 작품에서 우주적 사랑이 차지했던 비중만큼이나 크다.」

 맑스는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며 과거에 필요했던, 또는 미래에 필요할 사상보다는 현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이론과 사상을 설계하고자 했다. 그의 눈에 19세기 중반의 현실은 다음과 같았다.

「인간의 노동력을 매매하고 노동자를 그저 노동 공급원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는 분명히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에 관한 진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하나의 계급 이익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분노한 희생자들의 결집된 힘에 의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는 체제이다.」

 맑스는 뚜렷한 직업이 없는 선동가이자 사상가였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 경제적으로는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더욱 간절하게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1848년에 파리에서, 그리고 유럽 곳곳에서 혁명의 시도가 있었다. 맑스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부지런하게 펌프질을 했으나 역사는 그의 실패를 알고 있다. 그는 재판을 받게 됐고 그걸 PR 기회로 삼는다 - 이 점은 안중근 의사와 일견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반란 선동죄로 체포되어 쾰른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오히려 국내외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상세한 분석을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가며 일장 연설을 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재판의 배심장은 피고의 무죄를 선고하면서, 자신들 모두에게 교훈적이고 흥미로운 강의를 통해 커다란 도움을 준 데 대해 자신과 재판정의 이름으로 피고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도마께서는 맑스와 다를 바 없는 일장연설을 논리정연하고 일관되게 펼쳤음에도 미개한 왜놈들에게 사법살인을 당했을 따름이다. 이게 국격의 차이다.

 맑스라는 사고뭉치는 이제 프랑스에서도 거부 당하게 됐다. 그는 반평생을 보낼 잉글랜드로 망명하게 된다.

 맑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본도구로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고자 했으며 찰스 다윈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이 인간 눈에는 아시아라든지 러시아 등지는 아직 진화가 덜 된 사회로 보였고, 영국의 식민지배는 악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해당 식민지가 더 빠르게 진화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혁명이 앞당겨질 수만 있다면 그리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식의 글을 쓰기도 했다. 얜 모든 목적이 혁명으로 귀결된다. 때문에 자연히 Nationalism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정말 완벽해보이면서도 여하한 구멍이 많은 것이 맑스의 이론이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대기업 - 마르크스는 대기업의 출현을 예견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 은 그 동맹 세력인 군대와 함께 자유방임주의와 개인주의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저항이 증가하면서 생길 결과를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정치적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을 방해하고 변형시키는 힘이나 무제한적인 착취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 혹은 부르주아지 중에서 점차 빈곤해지는 계층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될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반동 세력과 동맹을 맺게 될 때 그들이 구체제를 지키는 보루가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파시즘도 복지 국가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동물이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크게 파괴하지 않고도 상호발전하는 법을 아는 종족이다. 당대에도 비스마르크가 복지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지 않은가. 모든 인간이 중세 몽골 전사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맑스가 주장하는 바는 매우 그럴듯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면이 있다.

「대자본가의 수가 점차 감소함에 따라, 즉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빈곤, 예속, 타락, 착취의 강도는 점차 증가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계급의 역할도 꾸준히 강화된다. 노동계급은 갈수록 그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매커니즘 자체에 의해 훈련되고 단결되고 조직된다.

 생산 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는 양립할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한다.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하던 자가 수탈 당하게 된다.」

 인터내셔널도 망하고, 맑스는 평생을 바쳐온 작업의 결과가 생전에는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들고 나서는 러시아처럼 자본주의가 성장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혁명이 일어날 수 있겠다고 느끼는 등 이른바 수정주의자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공산주의 거두라고 해도 호르몬 변화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그러다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던 책 속에 파묻혀 잠들듯이 떠난 그가 부럽기도 하다.

「마르크스 이전에도 계급투쟁을 말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한 계급이 오로지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정치 조직을 만들 계획을 구상하고 성공적으로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정당과 정치적 투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역사 과정을 규정하는 요소는 관념이다'라는 명제를 논박하기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스스로 테제의 힘을 약화시켰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개인이 환경이나 다른 개인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 그때까지 널리 퍼져 있던 인식에 변화를 일으켰고, 또 그러한 관계 자체까지 변화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의 행위 방식과 사유 방식에 지속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적 힘들 중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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