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 - 국내 최초 완역판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육근영 그림, 김정미 옮김 / 아이들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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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완역된 '피터팬'이다. 책 말미의 해설에 보면 '피터팬'은 원래 희곡으로 씌였다가 성공에 고무된 작가가 재차 소설로 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소설은 커다란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번째 장이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이고 두번째 장이 '피터와 웬디'이다. 그 중 국내에 줄기차게 소개되었던 것이 '피터와 웬디'뿐이었고,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은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 역자의 주장이다.

 아무튼 내가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을 읽어보니, 그동안 그 두 개의 장이 같이 소개되지 않아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일단은 '피터와 웬디'보다 박진감이라든지 흥미면에서 상당히 떨어지는 내용이었고, 두 장을 같이 읽다보면 모순되는 점 - 피터가 집에서 탈출한 날을 '켄싱턴..'은 (태어난지)7일, '피터와..'는 (태어난)당일이라고 하는 등 - 이 몇 군데 드러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켄싱턴..'을 통해서 피터 팬의 여러가지 비밀을 알게 된 것 역시 사실이고, 나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여기서 비밀 한가지. 피터 팬의 첫사랑은 '마이미'이다. 나중에 웬디와 벌이는 '키스와 골무' 이야기도 원래는 마이미와 먼저 벌여본 일이었다).

 다음으로 '피터와 웬디'. 정말 재미있다. 예전에 책으로도 읽어봤고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익숙한 이야기지만 - 역시 다시 봐도 재미있다. 아무튼 책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일단 팅커 벨은 '포동포동한 몸매(원문은 혹시 glamorous였을지도 모르지만)'를 가지고 있는 요정이다. 따라서 일관되게 모델 몸매인 - 영화 속의 팅커 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네버랜드로 가는 데에는 날아서 몇 날 며칠이 걸린다. 영화처럼 순식간에 시공간을 이동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피터 팬은 원래 자기 힘만으로는 날지 못한다. 천하의 피터 팬도 팅커 벨의 요정가루가 있어야만 날아다닐 수 있다.

 영화가 원작보다 긍정적인 부분도 여럿 있다. 일례로 원작에서는 후크가 탄 독약을 피터 대신 팅커 벨이 마시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는 과정이 매우 간략하게 나와있지만, 영화에서는 상당히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각설하고 사실 피터 팬이나 후크나 둘다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 그들은 항상 즐거움 속에서 살거나 모험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슴 속 깊은 곳에 상처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때로 피터는 꿈을 꿉니다. 피터의 꿈은 다른 소년들의 꿈보다 더 고통스러웠어요. 꿈속에서 애처롭게 엉엉 울면서도, 몇 시간이나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꿈들은 피터의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마침내 피터가 과감하게, "내 소원은 이제 영원히 엄마에게 돌아가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요정들은 할 수 없이 피터가 떠나가도록 그의 어깨를 간질여 주어야 했습니다.

...(중략)...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위에는 창살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안을 들여다보자, 어떤 작은 아기를 품안에 꼭 안고 평화롭게 잠이 든 엄마의 모습이 보였죠.

 피터는 외쳤어요. "엄마! 엄마!" 하지만 엄마는 피터의 외침을 듣지 못했습니다...(중략)...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두번째 기회란 없습니다. 창문에 도착할 때면, 이미 문은 닫힌 뒤입니다. 쇠창살이 삶을 가로막고 있기까지 하지요.」

 

 후크 선장은 원래 귀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귀족 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좋은 행실'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그가 피터 팬을 싫어하는 이유도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악어에게 쫓기게 만든 일보다는 그저 피터 팬이 '건방진' 것이 마음에 안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한 피터와 후크의 대결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의 마지막 대결을 보자.

 

「"건방지고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죽음을 맞을 각오나 해라."

 "음침하고 사악한 어른이여, 덤비기나 해."

...(중략)...하지만 의연한 태도로 피터는 적에게 칼을 다시 집어들게 했답니다. 칼을 홱 주워들긴 했지만, 후크는 피터가 좋은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비참해졌지요.

 이제까지 후크는 자신이 나쁜 녀석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습니다.

 "피터 팬, 넌 대체 누구이며 무엇이냐?" 후크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어요.

 "난 젊음이요, 즐거움이다." 피터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죠. "나는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새 한 마리이다."」

 

「...마지막으로 후크에게 한 가지만 소원을 들어 줍시다. 후크는 장벽 위에 올라서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피터를 어깨 너머로 보곤, 발을 이용해 자신을 차버리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래서 피터는 찌르는 대신 후크를 발로 걷어찼죠.

 마침내 후크는 마음에 새겨뒀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나쁜 행실이야!" 후크가 마구 비웃으며 외쳤어요. 그리고 그대로 악어 입 속으로 떨어졌죠.」

 

 후크는 지독한 신념을 가진, 전근대적인 인물이었다. 이 소설이 씌어진 때는 1906~1911년이다.

 

 일장 모험을 끝낸 피터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고독한 모험을 영원히 계속한다. 하긴, 피터는 고독이란 것이 뭔지 모를 수도 있다. 워낙 망각에 능한 그이기 때문에 - 1년만에 만난 웬디가 팅커 벨의 안부를 묻자 피터는 "팅커 벨이 누구야?" "여기에는 요정들이 무척 많잖아. 그 요정은 죽은 모양이야."라고 대답할 정도이다 - 추억 따위를 회상하며 고독, 혹은 향수에 젖을 새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피터의 이 특출한(?) 망각의 재능을 가질 수가 없기에 결코 피터 팬이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히려 망각을 싫어하기에 - 아니, 차마 그럴 수가 없기에 - 젖니가 난 채 '꼬끼오' 소리를 내는 한 소년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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