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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미술계에서 꽤 큰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는 연배 높으신 화가 한분을 만나뵙고 매우 뜻깊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 난다. 연배때문일까, 혹은 미술계에서도 상당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단에 속해계신 탓일까. 생각보다 순수미술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과 시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신 그 화백님께선 저녁식사로 곁들인 반주를 한 잔 손수 따라주시며 내게 물으셨다.
" 그래, 자네는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책을 많이 읽는가? "
" 주변 친구들보다도 조금 더 좋아하고 많이 찾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 훌륭하군 훌륭해, 그러면 어느 작가를 가장 좋아하는가? "
" 박완서 작가님입니다. "
" 아아, 그 여자분, 그래그래 그 분 훌륭하시지. 책도 여러 교양서나 개발서 좋은 것이 많지만
아직 학생이라 시간이 좀 있을 때, 우리 문학을 많이 읽도록 해. 문학이 훌륭한거야. 알겠나? "
사실 누군가 내게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어올 때, 나는 근래에 가장 탐독하고 있는 일본의 여류작가 에쿠니가오리를 주저없이 얘기한다. 하지만 연배도 꽤 있으시고, 문학이 아닌 미술계에 종사하시는 어르신께 답하는 만큼 국내에 저명한 작가분을 언급해야 한다는 순간적인 판단이 들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박완서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고 그분들 덜 좋아하거나 존경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래에 와서 가장 많이 찾는 작가의 책이 에쿠니가오리였을 뿐 이다.
일단 대답을 마치고 약간 마음 한켠이 불편한 느낌을 가진 채 잠시 생각에 빠졌는데. 또 다시 옛날일을 되짚어 보자면, 내용의 이야기나 소재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작가가 누구며 어떤 생각이나 사회적 배경으로 이 매력적인 이야기를 쓴 것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무관심했던 내 가치관에서 가장 처음으로 책의 표지를 돌려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던 것이 <대지>를 쓴 펄벅, 그리고 그 이후가 박완서님이었던 기억이 난다.(아마 그 때 접했던 소설이 <그 여자네 집>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박완서님의 신작이 소개 될 때마다 ‘ 아 이분... ’ 하면서 관심을 곤두세웠으니, 내 답이 거짓은 아니었던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이번에 작가님의 산문집 <호미>를 읽으며 더욱 그 확신이 두터워졌다.
우리는 일상에서 각종 예술작품들을 접하며 영화같고 소설같은 삶을 꿈꾼다.(또 그렇게 되고 싶다고 수도없이 읊조린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영화 혹은 소설을 바라보며 동경하고 탐닉하는동안 잠시 외면하고 버려두는 우리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오히려 더 우리가 말하는 소설같고 영화같을 때가 많다고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보통 그런 낭만적인 삶에 대한 동경의 표본으로 꼽는 것이 앞서 언급한 세 여류작가 펄벅, 박완서, 에쿠니가오리 이 세사람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 펄벅작가는 그녀가 살아온 세기와 그녀가 집필의 배경으로 선택한 그 환경들이 내가 사는 곳과는 너무나 다르며, 에쿠니가오리는 내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통 삶’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써나가기에, 그것을 쫓기는 다소 부담감이 있다. 그렇게 볼 때 남는 지향점은 단 한 사람이다. 박완서님... 순수 낭만 동화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지향점과 가장 많은 것이 맞아떨어지는 그 분의 이야기들이.... 나는 너무 매혹적이며 아름답다고 결론을 지었다.
책의 본문 중 -시작과 종말-이라는 단락에서 서정주 시인에 관한 이야기가 내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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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인이 생전에 겪은 칭송과 폄하, 영예와 치욕에 동의하여 고개 숙인 적도 침 뱉은 적도 없지만 어느 한 계절도 그의 시를 떠올리지 않은 계절이 없다. 그만큼 자연과 계절의 마음과 통하는 많은 시를 남기셨고, 그런 시들은 그분이 겪은 이승의 영욕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으니 그분의 영혼도 그만하면 족하다고 끄덕끄덕 미소 지으시지 않을까.
<호미>에서 시작과 종말 중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고스란이 읊은 듯 한 글을 썼을까. 때로는 배아파 나를 낳아준 내 부모도 어쩜 이렇게 내 속을 몰라줄까 싶을 때가 있는데, 단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그야말로 남남인 그녀가. 심지어 나보다도 몇갑절을 돌아 한참을 먼저 태어나 한참을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그녀가....
이전에 나는 많은 이야기들을 두루 접하면서도 소설이 그 중 가장 으뜸이요, 그 다음이 시문학이다. 라고 생각하는 아주 편협적이고 외곬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솔직하고 나붓하게 담긴 에세이(혹은 산문)집이 참 좋다. 왠지 책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작가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고, 위로해주는 것 같고, 칭찬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결국 이렇게 또 한권의 책과 또 한명의 작가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세상은 넓고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그 와글와글하고 복잡한 세태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내가 아니고 내가 없었던 곳에서 내가 느끼고 내가 소중히하는 것과 같은 것을 찾아내곤 한다. 그리고 기뻐한다. 아마도 그런것들에 의해 이 세상이 둥글둥글하고 조화롭게 유지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번에 <호미>에서 내가 추구하는 그것을 찾았다. 나는 이제 이 책의 맨 뒷장을 덮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이것을 끝냈다는 것이 아닌, 이것이 아니지만 이것과 유사한 또 다른것을 찾는다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정리한다. 이것 또 한 내가 느끼고 싶었던, 그리고 이번 책에서 찾은 또 다른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