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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뉴욕 브루클린, 어딘가 모르게 낡았지만 따스한 느낌이 드는 지명이다. 이 곳에 은퇴한 생명 보험 회사 직원인 네이선이 깃든다. 그가 브루클린으로 이주하고 겪는 갖가지 모험담이 숨가쁘게 담긴 이 책 재미있다. 소설적 재미가 강렬해서 책을 꼭 붙들고 있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런데 이제껏 읽었던 폴 오스터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예전 작품들에 비해 폴 오스터만의 신랄함과 날카로움이 많이 누그러들고, 따스한 정감과 인간미가 철철 흐르느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순간 '이거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멜로 드라마같은 구성 아니야?' 하며 의아해 하다가도, 허를 찌르는 반전에 반전, 숨가쁘게 회오리치는 그의 펜놀림 앞에서 나는 마냥 헉헉댄다.
폴 오스터의 소설, 매력적이다. 그가 내세운 주인공 역시 매력적이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인 네이선이라는 인물은 마치 인생의 황혼기에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발악(?)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신의 지루할 것으로 예측되는 여생을 온갖 기묘하고 흥미진진한 사건으로 채워내는 그의 일처리 솜씨에 반하고야 말았다. 꼬일대로 꼬인 인생을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인물들에게 네이선은 마치 비장의 히든카드같다. 우리네 인생에 이런 히든 카드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만큼 속이 편해질까?
네이선은 히든카드 그 이상이었다. 노년의 함정인 남루함과 초라함, 지루함과 편협함을 그에게서 찾기란 힘들다.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주변의 상처입고 한없이 무너져버린 인간들에게 쏟기로 결심한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즐겁게 즐기기 시작한다. 자신의 조카인 톰과 오로라, 오로라의 딸 루시 그리고 새로 친구가 된 해리, 연인이 된 조이스의 삶을 반짝이게 만든다. 그는 모든 사건을 조용히 관망하며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이 진정 필요한 시의적절한 순간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자신의 지혜와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네이선은 만능 해결사는 아니지만, 주변의 사람들의 삶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조용히 돕는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과 행복을 되찾는다. 이렇게 기본 뼈대만 간추리다 보니, 네이선의 이야기가 진부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는 결코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 이것이 네이선의 매력이고, 폴 오스터의 빛나는 재능일 것이다. 네이선은 소설의 말미에 사회의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서, 결코 자신의 전기 따위는 꿈 꿀 수 없는 사람들의 전기를 쓰는 일을 계획하고 꿈꾼다. 그는 왜 이런 일을 꿈꾸는 걸까? 실패하고 뒤틀린 인생에 신음하던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는 과연 무엇을 깨달은 걸까? 꼼짝없이 죽음 후에는 아무런 이름없이 묻혀버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생을 회고할 만한 책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이 책은 풍자극이라기 보다는 끈적끈적하면서도 유쾌한 모험극같다. 인생사를 수놓을 다양한 사건- 이혼, 질병, 실패, 사기, 불의의 죽음, 광신적 믿음, 노년의 연애. 동성애 등등 -으로 범벅인 된 모험극 말이다. 이 모험의 기반에는 사랑이 있다. 네이선이라는 인물이 발하는 지혜로운 사랑이 주변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 과정이 따스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네이선처럼 평범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삶을 긍정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을 나도 갖고 싶어졌다. 나이가 들어 가니 점점 편협해지는 것 같은 나에게 네이선은 좀 더 넓은 마음과 시각으로 타인을 볼 것을 가르쳐 준다. 네이선의 따스한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