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미남과 여전사 1 - 21세기 남과 여
이명옥 지음 / 노마드북스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미국의 백인 페미니스트 에이드리언 리치는 <고정관념에 관한 실상>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성애가 강요된 정치체계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했다.
남자답다, 여자답다라는 고정관념을 깨자는 사회적 이슈를 제기했다고 볼 수 있겠다. <꽃미남과 여전사>를 읽고 난 소감을 풀어내는 자리에서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책이 바로 이러한 문제제기를 기저에 깔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과연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나의 관점에서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 적잖이 고민을 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딩크 감독의 말을 빌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정도가 될 것 같다.
꽃미남이든 여전사이든 힘으로 혹은 아름다움으로 권력을 잡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이 중심이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화 속, 종교 속, 예술 속 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인지 양성평등이나 양성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대명제는 권력과 힘에 눌려 빛을 잃는 느낌이다. 남자는 어디까지나 남성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름다워야 용서했던 역사적 분위기. 여자는 어디까지나 조국이나 민족을 위해 여성을 아예 버리고 남자가 되어야만 인정을 했던 역사적 분위기. 그 점을 지적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페미니스트인 나만의 욕심일까?(그래서 별 하나 뺀다.)
어쨌든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빛나는 이유는 저자의 부지런한 자료 조사와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 덕분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전혀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던 명화들은 저자가 정리한 양성성이라는 명제 하에 어느새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미워할 수가 없다. 저자가 본문 중 언급한 연금술사에 대한 정의를 읽고 무릎을 치게 되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겠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팜므 파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맛볼 수 있었다. 또한 고대 원시시대에는 남녀에 대한 구분이 없었고, 그때의 성이 남-남, 여-여, 남-여, 이렇게 세 성이었다는 플라톤의 <향연> 대목을 예로 들면서 고대의 성이 양성성을 지향한 여러 사료들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연금술사 같은 저자의 재주에 감탄하게 된다.
-본문 중에서
인간은 무생물인 바위에 절을 하고, 정안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며, 세상을 떠난 이의 옷을 불태우고, 마음이 사악한 사람이 요리한 음식은 몸에 해롭다고 거부하며, 애인의 사진에는 열정적인 입맞춤을 한다. 이런 일련의 생각과 행동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물질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독자여. 이제부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연금술사로 부르면 어떨까.
향연에 등장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서 최초의 인류를 이렇게 묘사한다. 최초의 인간은 남-남, 여-여, 남-여, 이렇게 세 성이며 그들은 각자 등을 맞대면서 살았다. 또 그 모습은 둥근 형태이며 팔과 다리는 각각 네 개이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이 신의 권위를 넘볼 수 있을 만큼 막강해진 것에 불안해진 제우스가 그 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몸체를 댕강 절반으로 나누어버렸다. 신에 의해 강제로 몸이 잘리게 된 인간은 이후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재결합을 시도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