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주의 - 우리시대의 지성 5-002 (구) 문지 스펙트럼 2
질 들뢰즈 지음, 김재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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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 들뢰즈의 베르그손 읽기


『베르그손주의』에 나타난 들뢰즈식 베르그손 독해의 핵심은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그는 베르그손의 유명한 이원론을 잠재적 수준에서의 일원론으로, 즉 강도들의 차이들로 이루어지는 단 하나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읽어낸 일원론은 후에 ‘일의성의 존재론’이라는 들뢰즈 존재론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과연 베르그손이 강조하고자 했던 점을 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들뢰즈가 스스로 강조하고 싶은 점만을 두드러지게 짚어낸 점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는 본성상 차이를 보이는 두 구성 요소를 구분해 낼 수 없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각하는 것들은 모두 두 가지 요소가 뒤섞인 복합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는 이를 구분해내기 위해 경험의 조건을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속과 연장이라는 두 계열은 경험을 넘어서서 ‘경험의 조건’으로 나아갈 때에만 구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처음에는 일단 잠재적인 수준으로 나아가면서 두 계열을 분리한다. 그러나 구분은 단지 구분에만 그치지 않는다. 두 계열의 구분이 명확해지자마자, 들뢰즈는 두 계열을 다시 합치고자 한다. 잠재적인 수준에서 본성상 구분되는 것들은 현실화되면서 본성상의 차이가 지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수준에서도 두 계열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물질과 지속으로 나누어진 세계를 하나의 원리 아래에 두고자 한다. 지속은 두 운동, 두 경향, 즉 수축과 이완으로 구분되는데, 이 때 가장 이완된 지속의 형태가 물질이라는 것이다. 지속의 가장 수축된 상태는 모든 잠재성이 현실화된 상태(신적인 현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이며, 가장 이완된 상태는 물질인 셈이다. 지속의 차원, 즉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본성상 차이나는 것들은 하나의 측면에 존재한다. 정신 뿐 아니라 외부 사물들도 지속한다. 그리고 과거도 현재와 공존한다. 현재는 과거의 가장 수축된 수준인 셈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강도’의 개념을 재도입하고 있다. 베르그손은 일찍이 『시론』에서 강도 개념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베르그손의 언급에 대해 “그 비판은 강렬한 양[강도량]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심적 상태들의 강도라는 관념에만 반대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들뢰즈는 적어도 전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가 보기에 강도는 순수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을 만드는 모든 질은 강도가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들, “질들 안에 감싸여 있는 수들”, “지속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강도들”이야말로 일원론을 이루는 핵심이다.  


 이로써 앞서 구분되었던 본성상 차이나는 두 경향은 한 경향 속의 차이들로 표현된다. 모든 질적인 차이를 떠맡는 것은 지속이며, 지속이 수축하느냐 이완하느냐에 따라 “차이의 정도들”, “차이의 본성들”이 달라진다. 이전까지 본성상의 차이들과 정도상의 차이들로 구분되었던 두 가지는 모두 한 계기 속에서의 본성들의 차이들로 바뀐다. 차이들과 차이들을 낳는 차이들이 문제이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일원론적 강도적 세계인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비판했던 ‘강도’의 문제를 다시 도입하여, 베르그손을 일원론적으로 읽어낸다. 그런데 베르그손에게 이런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베르그손을 이렇게 읽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 들뢰즈가 베르그손을 읽는 키워드는 잠재성, 강도, 일원론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키워드들은 베르그손의 사상에 있어 핵심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이미지의 논의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베르그손은 이미지들, 그 중에서도 특수한 이미지인 ‘나의 신체’라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는 나의 신체라는 이미지가 물질과 정신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의 이원론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지속과 물질이라는 본성상 차이나는 것들이 현실화된 수준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과거를 보존해서 현실을 생성하는 기억의 능력과 지속이라고는 하나 거의 반복에 불과한 진동을 하는 물질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이미 강도의 차이에 의해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것이 현실화한다는 것보다는 매순간 이루어지는 정신과 물질의 만남에 따른 지금 삶에서의 생성이 더 중요하다. 이에 관련하여 지속과 물질의 관계를 일종의 대체 보충(supplément)이라 볼 수도 있으리라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들뢰즈가 지나치게 잠재적인 수준을 강조하는 점은 순수 기억에 대한 장(제3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순수 기억을 잠재적인 차원에서만 다루면서, 마치 기억작용이 잠재적인 수준에서 현실화된 수준으로 일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베르그손에게서 순수 기억은 삶이 지속함에 따라 계속해서 부풀어가는 것으로, 체험된 경험 전체의 내면화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가 계속해서 체험된 경험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보존되지 않는다면 순수 기억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베르그손에게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마주치는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보존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새롭게 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힘에 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잠재성의 철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베르그손 철학이 가지는 함의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도 하겠다. 혹은 들뢰즈의 관심사는 베르그손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론을 구축하는 데 더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가 베르그손을 경유하며 만들어낸 ‘일의성의 존재론’은 베르그손을 거치긴 거쳤으되 (그 자신의 말을 빌려) “필요-주관성”에 따라 흥미를 끄는 것만 간직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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