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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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장편소설

김보람 옮김

다산책방 출판


1948년 아이올라 마을. 삼대에 걸쳐 복숭아 재배기술을 보유한 우리 과수원. 행복했던 집이었지만 켈 오빠, 비비언 이모, 어머니를 앗아간 기차사고로 집은 전쟁 참여 후 장애를 입은 이모부와 아빠, 남동생 세스 이렇게 남자만 가득하다. 주인공 빅토리아(토리)는 성장하며 변하는 신체를 꽁꽁 숨기느라 바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른 채 점점 의지할 곳 없는 집에서의 시간은 흐른다. 


어느 날 윌슨 문(윌)이름의 낯선 이방인이 마을에 오지만 사람들은 미국으로 밀입국한 멕시코인을 폄하하는 단어인 웻백(wetback) 이나 아메리칸 인디언을 비하하는 표현인 인전(injun)이라 부르며 그에게 잠자리, 일자리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고 문전박대와 멸시로 가득찬 시선을 보낸다.


토리를 깃털터럼 가볍게 안아 옮길 만큼 강인한 윌. 그런 윌은 사람들의 편견과는 전혀 달랐다. 토리는 동물의 새끼를 살리려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손길을 가진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윌에게 빠져든다. (그는 내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P32) 


윌이 보이지 않자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던 걸까. 의무감에 움직이지만 모든 일상이 다 무기력해지고 허상이라도 윌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P151)


토리는 윌의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는 것을 느끼고, 잔인한 소문을 듣고 윌을 죽게 만든 게 남동생 세스일 거라는 생각에 분노가 가슴에 자리 잡고 집을 떠나게 된다.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P165)


생존을 위해선 아기 베이비 블루를 지켜야 하는 어머니가 되어야 하니까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143) 본능처럼 자연의 동물. 식물들의 소리와 움직임을 관찰하고 익히며 환경에 익숙해지는 과정들을 묵묵히 견뎌내지만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망치듯 숨다시피한 삶도 끝을 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를 보게 되면서 아들은 그 여자와 있다면 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두고 떠난다. 


다시 돌아온 집. 하지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후 토리 홀로 남았다. 마을은 댐 공사로 물에 잠길 것이라는 정부관계자의 말에 토리는 마을에서 복숭아밭을 가장 먼저 보상받고 팔았고, 동네사람들은 윌에게 했던 것처럼 토리를 욕하며 돌아섰다. 토리는 아이올라 마을과 거니스 강으로 이어진 파오니아 마을에 새로운 사람들과 정착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과거 모두가 안된다 했던 땅에 복숭아 나무를 심었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아이올라의 복숭아 고목나무들을 새로운 땅에 옮기기로 한다.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도 가족도 추억도 뒤로한 채 새롭게 출발하고 살아남을 것이라 믿으며. 


(젤다의 말대로 나는 이 땅을 일굴 만큼 강인하다는 걸 증명해 냈고, 이 땅은 나를 받아줄 만큼 관대하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내 속마음은 우리 복숭아의 잎마다 뿌리마다 씨앗마다 슬픔이 묻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윌과 내 아들은 과수원 모퉁이에서 날 보며 웃고 있지도, 내 옆에 서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지도 않았다. 아무리 자주 상상한다 한들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P341)


복숭아가 자랄 수 있는 땅을 기다리는 동안 토리는 윌과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며 그리움과 후회의 감정을 고스란히 견뎌낸다. 그들을 상상하며 채워진 그리움의 공간들은 포기 하지 않는 희망을 그려보지만 땅도 과수원이 성공적으로 일구어지는 모습에 아들도 윌도 없는 지금의 공허함은 더욱 크기만 하다.

(이제 내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천 마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때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쓸모없는 한마디. “미안해.” P323)


상실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토리를 통해 아들을 생각하는 저며오는 아픈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아픔과 슬픔과 후회에 대해 흐르는 강물처럼 다 지나가고 흘러갈 것이지만 어느 때에 어딘 가 연결된 물처럼 나에게 돌아와 희망으로 그릴 수 있을 것도 같은. 길었지만 아름다웠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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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 P32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 P151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 P165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 P143

젤다의 말대로 나는 이 땅을 일굴 만큼 강인하다는 걸 증명해 냈고, 이 땅은 나를 받아줄 만큼 관대하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내 속마음은 우리 복숭아의 잎마다 뿌리마다 씨앗마다 슬픔이 묻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윌과 내 아들은 과수원 모퉁이에서 날 보며 웃고 있지도, 내 옆에 서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지도 않았다. 아무리 자주 상상한다 한들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 P341

이제 내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천 마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때에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쓸모없는 한마디. "미안해."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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