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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각각의 계절』
권여선 소설
문학동네 출판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중년을 넘은 여성으로 자신이기도 했고, 엄마이기도 했고,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기도 했는데 각각 인물 모두가 개성이 뚜렷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내 안에 짓눌려 있던 무거웠던 감정들을 쏟아내는 느낌들이었다. 점점점점 자신의 숨은 기억을 꺼내보다 결국엔 <기억의 왈츠>에서 다 축척해놓은. 너무 좋았다. 필사로 노트를 빼곡히 채울만큼 🩷
📚<사슴벌레식 문답>
시대를 바꾸기 위해 연대했던,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의. 내 친구가 가족이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고 사라지는 것을 견뎌내고 싸워야 했던 이겨내야 했던 아픈 시절의 이야기라 조금 무거웠다.
가슴 한 켠에 새끼오리친구들이 이제는 각자의 삶으로 살고 있겠지만 그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 계기가 나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꺼내기 두려운 답답한 마음이 있다. 궁금하기도 하고 내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연락이 닿지 않기도 하고 이제는 그 간극 사이를 좁힐만한 무언가가 없다. 내가 버린 것도 아닌 무언가.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P36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P40
📚<실버들 천만사>
딸 채운과 아빠와 이혼한 엄마 반희가 여행을 떠난 이야기.
채운이 다니던 코로나도 아닌 무좀으로 체육관은 휴관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딸 말하는 스타일을 놓치지 않고 이직에 대한 불안도 알아차린다.
부모의 각자 다른 삶이 딸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일지 안다. 서로 보지 않고 살아도 눈에 보이지 않은 수만 가닥의 실처럼 눈빛, 걸음걸이, 표정, 숨 쉬는 소리만 들어도 딸의 기분이, 상태가 어떤지 엄마는 안다.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가도 닮은 모습을 보면 또 웃음 짓는. 모녀사이의 표현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야기.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죽기 전에 나를 조금이라도 회복해놓고 싶어서. P76
엄마, 나는 미래완료라는 말이 그렇게 슬퍼. 언제부턴가 난 알았던 것 같아.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걸. 엄마가 나간 다음에 나 혼자 엄마 없이 살 거라는 걸. P77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P79
아무것도 아니야, 채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P79
📚<하늘 높이 아름답게>
독일 파독 간호사로 가서 아들을 낳고 다음날 남편은 돌연사한 마리아는 이름도 못지은 아들을 독일 부부에 입양보내고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태극기를 팔며 첫아들의 청회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리워했는데 성당의 사람들은 마리아가 죽은 후 그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떠난 사람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P91-92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P114
📚<무구>
대학동창 현수와 소미는 페이스북을 통해 우연히 다시 만나고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현수의 소개로 소미는 U시의 땅을 사게 된다. 하지만 그 땅에 묘역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더니 현수와도 연락이 끊겼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 개발이 되면서 건물을 짓고 건물주가 된다.
사람의 무구함을 소미는 믿지 않고, 불안한 투자도 다 젊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떠나 사람의 무구한 행동은 현수처럼 쇳가루 떨어질듯 키로 돌려야 시동이켜지는 팥죽 자동차쯤 쿨하게 몰아줘야 그런 때묻지 않은 무구한 사람으로 보일까. 나는 무구하게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모습을 숱하게 봐서 그런지 외향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다. 흠흠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두렵고 또 두려웠지. 현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끔 그 말이 떨쳐지지 않는 주문처럼 소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현수가 말한 그때는 그때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래도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젊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 소미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또 두려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웃고 죽자고 담배를 피워대고 겁없이 땅을 사고했다는 것을. P144
사람은 절대 무구하지 않다. 또 현수가 얼마나 거칠게 변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P145
📚<깜빡이>
혜진과 혜영은 엄마 신숙과 신애 이모와 교류도 잦고 친하지만 자신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듯 귀찮아한다. 엄마와 이모도 이모부가 자기들 모임에 안 오길 바라는 마음처럼 ㅋㅋ 걱정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하소연을 하는 건지 랩을 늘어놓는 엄마의 토크.
혜진의 속사포 같은 날 선 말을 듣고 있자니 혜영은 이상하게 불안하면서도 위로가 됐다. 그래서 코뚜레를 꿰듯 해서라도 얘를 데려왔나……나 대신 들이받으라고. P155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오익과 여동생 오숙, 그리고 엄마와의 마음의 채무에 대한 이야기.
엄마는 말을 빌려 섭섭했던 자식의 행동을 말한다. 가깝고 늘 사랑하고 살아도 부족하지만, 어긋나고 상대방에게 상처주는 말들만 한다. 자신이 희생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보상받길 바라는 건 잘못된 것일까. 보상을 받으면 마음은 편해질까. 잘 모르겠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체처럼 쌓여가는. P172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다보면 실제로 들려온 소리가 점점 더 모호하게만 생각되었고 과연 들려온 것이 맞는지, 자신이 들은 것이 확실한지 알 수 없었다. P194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P199
📚<기억의 왈츠>
동생과 제부와 밥을 먹으러 숲속 식당에 갔다가 눈앞에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선명히 오래 전 스물네 살의 경서와의 기억을 소환시킨다. 경서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읽으며 젊었지만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나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나 후회하기도 했다. 자신을 몰랐다. 그래서 울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른다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을 안다.
젊은 시절의 두려움. 부러움. 그렇지만 생기 있고 에너지 있던 것들을 모조리 이 소설에 부어 놓은 느낌이다. 젊다는 이유로 술에 취해 살며 허비한 시간들을 숲속식당에서 찾다니.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어떤 장면들처럼 어느 장소에서 누군가의, 당시의 나를 돌이켜보게 했던 영화같았던 소설.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P204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P218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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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P36 <사슴벌레식 문답> - P36
엄마, 나는 미래완료라는 말이 그렇게 슬퍼. 언제부턴가 난 알았던 것 같아.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걸. 엄마가 나간 다음에 나 혼자 엄마 없이 살 거라는 걸. P77 <실버들 천만사> - P77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P199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P204 <기억의 왈츠>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P218 <기억의 왈츠>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P230 <기억의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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