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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취미는 사생활』
장진영 저
은행나무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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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좌표들,
은행나무 시리즈 N° 15번째 『취미는 사생활』
장진영 첫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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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 모든 일은 10월의 한파특보에서 비롯되었다.❞ 로부터 시작된다. 초반엔 서울 아파트에 아이 넷을 키우는 육아 노동에 시달리는 주부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초가을 추위때문에 2302호의 은협은 두꺼운 이불을 꺼내야 했고, 이불장 서랍을 열면서 남편이 숨겨둔 크리스찬 루부탱 빨간 구두를 발견하면서 아랫집 2202호 민희와 남편을 미행도 하고, 아이들의 이모, 은협에게는 이웃집 언니가 되면서 친해지게 된다.
은협은 부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수긍하는 듯했다. 나를 뺏고 내 시간을 뺏은 게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여기는 듯했다. 임시 은협으로서의 삶이 나라는 괴로움으로부터 나를 도피시켰으리라고. 얼마간 사실이기도 했다. (P144)
민희는 은협을 도와주는 행동에 공감이 되면서도 가족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돌봄을 함께 하는 수준에서 대출을 받아야하는 은협을 대신해 학부모 상담에 은협이 되어 찾아가기도 하고, 전세계약 만료로 집주인과 협의할 때도 은협을 대신했다. 누구도 민희에게 은협을 도우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들도 안타깝게 했다. (물론 이런 상황들도 결국엔 민희가 계획한 일부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은협을 뺏은 게 아니라 은협이 나를 뺏었다.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나로부터, 내 시간으로부터. 불만은 없었다. 내가 은협으로 하여금 나를 뺏게 했으므로. (P84)
어쩌면 그렇게 자신에게 없던 자식을 함께 돌봐주며 끝내 행복하지 못했던 지난 결혼생활에 대한 미련을 한풀이하듯 보였다. 한편으로는 아이 넷을 키우는 은협이 불쌍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민희는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은협의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지금 가진 전세금으로 아파트에 살려면 경기도로 나가야 했고 서울에 살려면 빌라로 옮겨야 했다. 경기도는 싫었고 빌라는 더 싫었다. 한번 밀려나면 끝이었다. (P89)
은협은 어째 일이 이렇게 안풀릴까. 대출도 환불도 중고거래도. 온통 엉망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엉망 속에서도 살아보려는 억지가 있다. 자신들의 불안정한 주거를 형편에 맞게 포기하고 살면 되는데 억지만큼이나 서울 아파트에서 벗어나지 않는 욕망으로 채웠다. 어느 장소에 살고 있는지, 어떤 이웃을 두었는지에 따라 삶의 기준을 정해버리는 현대의 모습을 은협을 통해 잘 보여준다.
보일 씨가 원했던 건 여자 옷을 입는 게 아니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모르는 어떤 것,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어떤 것을 원했다. 사생활을 원했다. 여섯이 살기에 집은 좁았다. 인구밀도가 너무 높았다. 보일 씨는 은협과, 아니면 대연과, 아니면 중연과, 아니면 소연과, 아니면 민희와 끊임없이 마주쳐야만 했다. 회사에서 지쳐 돌아와도 쉴 수가 없었다. 일하고 돌아오면 또 일이 기다렸다. (P156)
회사일도 힘든데 집에가면 쉬지 못하는 보일 씨가 보미 씨로 여장을 하는 모습에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코미디를 보듯 배꼽잡고 웃었다. 보일 씨의 머리숱이 없어 가발을 사는데 은협네부부는 또 기왕이면으로 시작해서 긴머리 가발을 산다. 그 계기로 보일 씨는 가발에 어울리는 명품 루부탱 하이힐을 사고 현실도피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여장의 취미를 갖게되니. 은협의 집은 서울 아파트라는 장소가 중요하지만 보일 씨의 집은 휴식을 할 수 있는 안정된 공간의 장소는 아닐까. 아니면 보일 씨도 은협과 마찬가지로 뜬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희망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죽었다 깨나도 집을 살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시골 땅은 헐값에 살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투기할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투기한 게 될 수도 있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투기, 보일 씨가 바라는 건 그것이었다. 양심을 팔기는 싫고 부자는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P159-160)
전세사기로 거주의 불안감이 늘어나는 가운데 피해자들의 구제를 위해 정부가 나선다면 구제를 위해 소요된 비용은 또 국민들 세금이 가중되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로 쉽게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피해자들은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내는 현실에서 소설 속 은협과 보일 씨가 전세 보증금 마련을 위해 나무 수저 부업을 알아본다던지 적금으로 도저히 모을 수 없는 금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기 목적의 땅을 구매하고자 하는 모습은 우리의 집 없는 자들의 불안한 설움이 소설 속에 있는 듯 했다.
이 소설에서 집 문제와 더불어 주변 경제 상황에 대해 자주 나온다.
중국이 호주산 석탄 수입을 금지한 데 더해 탄소배출을 제한하기까지 하면서 화석연료를 추출해서 만드는 요소수를 한국에 수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해져 멈춰 있는 공사장 중장비들. 스타벅스 리유저블 이벤트로 긴 줄이 이어지자 파트너들의 살인적인 업무 강도를 규탄하며 트럭시위를 한 것. 맥도날드 햄버거의 양배추 수급 문제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 일론 머스크가 전기차가 아니라 탄소배출권으로 전기차 사업의 적자를 메우는 이야기.
은협은 새마을금고에 대출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건너편 스타벅스에는 할로윈 이벤트로 긴 줄이 늘어서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목적으로 기다리는 모습은 정치권의 자신들의 이권챙기기와 서민들의 힘든 삶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민희가 떠날 것을 알아챈 어린 소연은 남편이 마지막으로 사주지 않은 새콤달콤을 사기 위해 10원씩 모아 밤에 몰래 편의점에서 사온다. 민희는 소연이 준 새콤달콤을 받아들고 울어도 소리내지 않는 소연의 엉덩이를 때리는데 자신은 나쁜 사람이고, 소연의 집에 피해를 줄 것이므로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는 것처럼 이뻐했던 소연에게서 미안한 감정을 가지지 않게 정을 떼어내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이었다. P195
민희는 은협의 전세살이의 불안감을 알고, 그 불안을 이용해 한 가정을 흔들어놓았다.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부에 집착하고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라도 욕망을 채우고자 했는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집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다.
에르메스에서 금테사 둘린 자잘하고 복잡한 패턴의 접시도 샀다. 나무 수저가 아무리 환경주의를 표방하는 제품이라 하더라도 주변마저 빈해 보이면 곤란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환경주의가 아니라 환경주의적인 것이었다. 둘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았다. 알고도 모르는 척 했으며, 모르는 척한다는 것도 서로 모른 척했다. 일종의 공모였다. P66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른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은협이 소연을 데리고 피부과의원에 간 동안 민희를 돌봤고, 보일씨의 애인을 찾으러 상암에 동행했고, 아기를 포대기에 업은 채 소연을 등원시켰다. 대연과 중연의 일을 수습하러 초등학교에 가지 못할 이유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한번 자전거를 배우면 다시는 못 타는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이미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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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에르메스에서 금테사 둘린 자잘하고 복잡한 패턴의 접시도 샀다. 나무 수저가 아무리 환경주의를 표방하는 제품이라 하더라도 주변마저 빈해 보이면 곤란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환경주의가 아니라 환경주의적인 것이었다. 둘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았다. 알고도 모르는 척 했으며, 모르는 척한다는 것도 서로 모른 척했다. 일종의 공모였다. - P66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른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은협이 소연을 데리고 피부과의원에 간 동안 민희를 돌봤고, 보일씨의 애인을 찾으러 상암에 동행했고, 아기를 포대기에 업은 채 소연을 등원시켰다. 대연과 중연의 일을 수습하러 초등학교에 가지 못할 이유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한번 자전거를 배우면 다시는 못 타는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이미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 P79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이었다. - P195
그들은 죽었다 깨나도 집을 살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시골 땅은 헐값에 살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투기할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투기한 게 될 수도 있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투기, 보일 씨가 바라는 건 그것이었다. 양심을 팔기는 싫고 부자는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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