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보는 이를 웃음 짓게 하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상상하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스머프 마을 뒤편에 오종종하게 올라온 고사리를 또 봐버리고 말았다. 마음은 급히 흩어졌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비, 식물을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은 바람. 내겐 비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한 고사리는 5월 중순까지 계속 자라날텐데.
P21
유난히 마음이 여린, 서른이 조금 넘은 젊은 남자가 어린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이국으로 와 그 막막함과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얼마나 가슴 졸였을까. 이제 나는 그가 그리 용감하지도 않고 배포가 큰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강인한 어른인 척하느라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P57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빨간 연필깎이를 떠올린다. 그걸 받아 들고 그에 대한 적의를 접어둔 채 고개를 깊이 숙여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던 그날. 날듯이 뛰어서 자개 화장대 위 제일 예쁜 곳에 그것을 얹어두고 만져보고 기뻐했던 기억. 그것이 어떻게 내게 왔든, 그가 그것을 가져다 주며 어떤 의도을 가졌든, 그건 무채색의 내 유년에 몇 없는 색깔이었다는 것과 그때 나는 그가 몹시 무서웠다는 것, 도무지 병치될 수 없는 두 개의 기억 중 어떤 것도 양보할 마음은 없다.
P75
식어 눅눅해진 붕어빵을 달콤하게 바꾼 아버지의 하얀 설탕이 사실은 내 평생 써도 남을 유산이라도 된 듯 많은 날에 달콤한 위로가 되었다는 것 아버지는 알까.
P82

나는 도시의 대학으로 진학하며 탈출에 성공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조바심을 냈고,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렸으며, 타인의 호의를 믿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고향의 기억은 질겼고 질긴 채로 뒤틀렸다. 나는 고향의 기억에 포획되지 않을 더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매일 밤, 인과도 서사도 없는 곳에서 완벽한 익명으로 살아가는 달콤한 상상을 했다. 그런 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생은 저절로 리셋이 될 것 같았다. 내 운명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이 필요했다. 벤쿠버로 떠났다.
P86
산다는 것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빗속에서도 춤추는 일이다.
아이는 그 말뜻을 알았을까.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아이는 어떻게 알았을까. 소소하고 다정한 것들이 모여 바위를 들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걸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P117
어쩌면 이토록 지리멸렬한 생을 흘러가게 하는 것은 무용하고 불가해한 것들일지도 모른다고.
P125
어디론가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침은 시들했고 밤은 불온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이유를 좀처럼 찾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겐 일상에서 멀리 떠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 환기가 필요했다. 멀리 떠날 것. 그리고 돌아올 것. 힘껏 돌아올 것. 그것은 오래되고 익숙한 리셋의 방식이었다.
P163
‘모든 것은 때가 있다’라고 적힌 이태리타월을 보며 숨넘어가게 웃다가 생각이 세 장기에 까지 닿았다. 나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끝도 없이 상상하며 스스로를 들볶아왔다. 그건 내게 닥친 실제의 일보다 늘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래도 한편 생각한다. 현명하지도 못하고 걱정만 많았던 지난 시절이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그런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지 않았느냐고. 걱정과 두려움이 때론 우리를 보호하고 어두운 골목을 힘껏 뛰게도 했을 거라고. 그러니 그 모든 순간이 다 내겐 때였다고. 나의 작은 마음 시절을 위로해주고 싶은 것이다.
P204
#나는바다를닮아서 #반수연 #산문 #교유당 #교유서가 #에세이 #책추천 #겨울독서 #독서 #읽을만한책 #뭐읽을까 #신간도서 #서포터즈3차 #12월 #도서지원 #서평
❤교유당 출판사의 서포터즈로 도서를 지원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