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주일동안 몇 달 동안 나는 밤에만 깨어 있었다. 슬픔의 얼굴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런 간단한 과정을 통해서 첫번째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오래전에 슬픔 속으로 사라져 버린 어떤 이의 발자국을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리.

 

 

...(중략)...

음울은 그런 상태에서 몰입하는 자가 얻는 검은 어지러움이다. 슬픔이 절대적으로 음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결코 공유되거나 위로될 수 없기 때문이고 상상을 불허하고 마침내는 목구멍을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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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의 산만하기만 한 많은 아이들도 여인을 한 번도 진정으로 방해할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여인은 자신에게 부과된 노동을 항상 진심을 가지고 했고 그 노동이 마음 속에서 자신의 본질적 요소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그 노동에 자신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마음은 그만큼 넓었다. 비위가 상하는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일을 해도 그로 인해 여인 내면의 자기 공간이 크게 상처받거나 줄어들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잇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은 달랐다. 여인의 호흡이 고통스러워졌다. 미음, 증오, 지옥, 전쟁, 그리고 동족. 머릿속에서 몇 개의 단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오리치며 여인을 매질하고 있었다. 여인은 당장 땅바닥에서 눈에 띄는 돌맹이를 하나 집어들고 꼬마들을 향해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면서 집어던졌다. 킬킬거리며 다가오던 어린아이들은 놀라서 주춤거렸다. 여인은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돌멩이를 찾아 들고, 놀라서 만류하는 남편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다시 한 번 더 멀리, 더 위협적으로 집어던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해를 끼쳤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지? 상관없어! 이유가 뭐든, 너희들이 나를 증오하니, 나도 너희를 증오할 수 밖에! 이 사람의 탈을 쓴 쥐새끼들아!' 여인은 목이 터져라 이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여인이 일생 동안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어쩌면 들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거칠고 더러운 욕설이었다. 여인은 어른이었고 키가 큰데다가 젊고 힘이 셌기 때문에 여인이 던진 돌은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겁먹은 아이들은 울상을 짓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맨발의 쥐새끼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아난다. 그러나 여인은 돌팔매를 멈추지 않았고 길다란 팔을 휘두르면서 아이들을 쫓아가기까지 했다. 뒤따라온 남편이 그녀의 팔과 허리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남편은 바로 다름 아닌 그녀 내면의 너그러운 관용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가. 방해당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그런 대범한 자유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나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인가. 간신히 진정한 여인은 비로소 절망에 찬 울부짖음을 멈추었으나 깊은 절망 자체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는 뚱뚱한 아랫배나 보기 흉하게 씰룩거리는 가슴 근육을 백주에 드러낸 것보다 더욱 처참하리라. 여인은 이 참혹한 슬픔의 수렁 속에서 자신에게 떠오른 비유가 기껏 뚱뚱한 아랫배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땅이 꺼질 듯이 기가 막혔다. 자신의 평화로운 영토에서 추방당한 슬픔이 여인의 몸을 떨게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살아감을 일생의 과업으로 받아들인 그 순간의 숭고한 희열보다도, 오래전 단 한번의 사랑을 발견하고 흙바닥에 몸을 던지게 했던 그리움보다도, 그 모욕이 동족에 의해서 가해진 것이었기에 더욱 견딜 수 없었던 모멸감보다도, 꼬마 테러리스트들의 무리 중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환멸보다도,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며 돌보아 왔던 무리들이 던진 돌에 맞은 듯한 절망보다도, 추악한 무지에 맞서야 한다는 본능적인 저항과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는 물러섬 사이의 갈등보다도 더욱 여인의 목줄기를 물어뜯는 이빨은 바로 순수한 슬픔의 그것이었다.

 

 p.28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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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이쌍스 그녀들의...심장 - 서울대 학생들의 발칙한 글쓰기
쥬이쌍스 지음 / 세이북스 / 200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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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세상을 멋지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거라 믿었던 대학 신입생들 가운데 이상한 법칙과 이상한 변화들을 느끼면서 예상치 않은 맞딱뜨림에 당황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젠더' 구별에 따라 규정되어 있는 행동거지, 욕망의 지도를 받아 앉게 되었을 때 자신들에게만 소급되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던 여대생들의 생각은 비로소 한발짝 나선다.

서울대 학생들이라는 집단의 특수성도 그러하거니와 '여대생'이라는 ('남대생'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집단은 상투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채색되어 여대생들의 리얼리티를 은폐시켜왔다.  '쥬이쌍스 ...'의 미덕은 자신들이 대학에 들어와 맞딱뜨린 좌절스런 기억들을 복원하는 동시에, 엄마와 자매들을 비롯한 도처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여성들에 관한 언어들을 쏟아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위적이고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은밀하고 사적인 글쓰기를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읽는 이에게 전달한다.

때로는 감상에 치우치는가 싶지만 이들의 눈은 따뜻하다. 그리고 뿌듯하게도 휘둘림이 없는, 치기 없는 자기 선언이다. 옷가게에서, 술자리에서,  여관에서, 온라인 공간에서 이들의 눈은 가감없이 섬뜩하고 황당한 현실들을 낚아내 우리에게 펼쳐보여준다. 아린 기억이라도 독자들은 필자들과 언젠가 같은 순간을 공유했더라 되짚으며 치유해낼 수 있을 것이다.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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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보 칼맨, 디자인으로 세상을 발가벗기다 - 대화 11
이원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잠이 몰려오는 토요일이지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노라니 서글펐습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발걸음한 서점에서 몇 주 전부터 점찍어두었던 이 책을 골라 들었죠.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선, 단숨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베네통이 펴낸 잡지 'COLORS'의 기획력이 놀랍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었었죠.  이 비범한 기획물의 생산자인 티보 칼맨에 대한 궁금증을 막연히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굉장히 쉽고 편하게 다가오는, 티보 칼맨에 대한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얇지만 소장가치가 있는 것은 티보칼맨의 아이디어 스케치가 잡지의 레이아웃으로 변해가는 과정등이 담긴, 화보 덕분이기도 합니다. 가상 인터뷰이지만 티보 칼맨의 세계관이 허투로 포장되지 않고 충실히 반영되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고 '테크니션'을 뛰어 넘는 디자이너의 기량을 요구하는 티보칼맨은 기본적으로 문화를 읽어내고, 문화를 이끄는 이로서의 책무에 충실한 데서 비범함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문화 게릴라들과 만납니다. 티보 칼맨은 문자를 이미지로 풀어 내보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고, 그 밑에 그가 가진 탄탄한 세계관과 철학 덕분에 그 능력이 십분 효과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쌈박한 포장에만 연연하는 디자이너들의 역할에 반기를 든 것도, COLORS에서 내보인 도발적 주제와 상상력들도 사실 '기발함'보다는 '진중함'에 가까운 그의 작업에 대한 철학과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만 어렵지 않은 진중함이었죠. 에이즈와 인종 문제를 그는 '비트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거기다 재치와 감각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타이포그래피를 이용한 뮤직비디오와 이미지로 의자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해낸 '체어맨'이란 단행본도 낼 수 있었던 것이겠죠.

정규 디자인 학사과정을 이수하지 않았기에 그의 문제 해결 능력이나 새로운 시선의 발굴에 있어 더욱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댓가로 디자인계에서 아웃사이더로 오래도록 남아있긴 하지만 '다양한 빛깔의 문화를 바라보고 자신이 속한 문화에 대한 의식'을 촉구했던, 이 진지한 디자이너는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단 디자이너들에게뿐만이 아니라요. 사람들의 인식의 지도를 새로 그려나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단 저자가 티보 칼맨을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며 티보 칼맨의 몇몇 이력과 작업의 동기들을 설명하는 부분은 도식화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예전에 좋아하던 데이비드 번이 속한 그룹, 모던 토킹의 앨범을 티보 칼맨이 기획해 낸 것이었다는 발견과,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기발한 레이아웃들 덕분에 이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뿌듯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애드버스터'를 함께 정독하면 자본주의 논리를 가장 공허한 방식으로 채색해주는 듯한 광고와 디자인이 어떻게 성찰의 시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매개로 변화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이들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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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변이 5
사토 마코토 지음 / 세주문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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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코토. 맘에 든다. 사념이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돌연변이 사토라레. 항상 길을 걷다 적의가 담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곤 했더란다. 혹시 이 모든 이들이 나의 생각을 읽고 있는건 아닐까? 난 일찍부터 '사토라레 노이로제' 증상을 보여왔던 것이야. 나의 사념은 다른이들이 견디지 못할 것들을 가득 안고 있으며...
아름답지 못하지만 그래도 애정을 가질만한 동포라는 인간들. 거짓말과 속임의 순기능을 체득시키는 절묘한 설정과 캐릭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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