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영복

http://ahimsa7.byus.net/essay/university3.htm

 

바야흐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무성합니다. 숱한 논의를 크게 간추려 보면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전망이고 또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소망입니다. 전망과 소망은 판이한 것입니다. 전망이란 세계는 앞으로 21세기에 이러 이러하게 변화해갈 것이라는 객관적 관점입니다. 그래서 어떠 어떠하게 준비해야 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망은 앞으로의 세계는 이러 이러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어쩌면 상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망과 소망에 관련해서 저는 이러한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부류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글자 그대로 자기에게 세상을 맞추려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는 것은 세상과 민첩하게 타협하는 것이고 세상을 추수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세상을 자기자신에게 어리석게도 맞추려는 그 우직한 노력이 세상을 보다 인간다운 것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단순히 비교하는 선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전망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 내면에 자기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망이라는 객관적 언어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자기의 소망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우직한 소망에 대하여 그것을 협소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당면의 화두가 어떠한 계층의 어떠한 소망을 그 속에 숨기고 있는가를 간파하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자본주의 200년사를 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리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근대성의 바탕이 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구조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개별적 존재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개별적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의 경쟁과 충돌 억압과 저항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론적 사고가 최근에 반성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상공간입니다.

작년 말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간단한 내용은 그런 겁니다. 물질은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도 다 알겠지만 소립자라든가 뉴트리노라든가 소위 현대원자물리학의 가설체계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물질의 궁극적 형태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죠.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어떤 객관적이고 확실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가설입니다. 이러이러한 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존재라는 말이 이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존재론'이라는 개념을 '실체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해야 된다는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만  소위 탈근대이론이나 근대성비판 그리고 성찰적 근대성 논의에서는 존재론을 정치화(精緻化)하는 그런 방식으로 대응해요. 알튀세르의 'Overdetermination' 이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만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일방적이고 직선적인 인과관계로 파악하는 대신에 양 방향의 화살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나아가 양 방향이 아니라 수많은 화살표방향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세계상을 일단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존재론의 틀 내에서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정치화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제 논문의 요지는 세계의 기본적인 구조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존재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관계망(關係網)으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사상적 기반이고 동양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만 우리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이러한 사상적 정서적 전통을 만나게 되지요. 여기서 이러한 논의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불편합니다. 다만 제가 <나의 대학시절>에 동양고전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느낀 점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저의 동양고전 읽기는 대학시절에 만연했던 그리고 나자신도 깊숙이 물들어 있던 우리 것에 대한 좌절감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제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동양의 기본적인 인식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역(周易)의 이야기입니다. 주역이라면 여러분은 아마 점치는 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주역은 점치는 책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주역에 대한 해설 즉 십익(十翼)은 철학입니다. 주역에는 64개의 대성괘가 있어요. 우리 나라의 태극기에 있는 것은 소성괘라 해서 효 3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성괘 두 개를 겹쳐서 6개의 효로 만든 것이 대성괘지요. 여덟 개의 소성괘를 겹치면 8×8 = 64, 64개의 괘가 되지요. 64개의 대성괘는 세상의 모든 변화와 운동을 64개로 패턴화한 일종의 카데고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변화를 64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세분화된 구조라고 봐요. 변증법의 카테고리가 10개를 넘지 못하지요. 설명이 좀 복잡하기 때문에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여기 컵이 있네요. 이건 '사물(事物)'이지요. 이것을 망치로 딱 때려서 깨트리면 사건이 되지요.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사건(事件)이 일어나고, 이런 컵을 여러분들이 전부 다 한 개씩 깨뜨리고 있다면 이 큰 강당에서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잖아요. 그것을 사태(事態)라고 합시다. 이처럼 사물, 사건, 사태로 세상의 변화를 나눈다면 이 주역의 64괘는 가장 높은 단계인 사태를 카데고리화하고 정형화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역의 64개의 카테고리가 사태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 일관되고 있는 관계론적 인식 틀입니다. 예를 들어 64괘 중에서 가장 좋다는 괘가 '지천태(地天泰)'괘인데 이 괘의 모양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이 괘가 제일 좋은 괘라고 설명하는 바로 그 이유가 관계론적이라는 것이지요.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것은 내려오고 아래에 있는 것은 올라가기 때문에 '만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형통하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존재론적 발상과는 전혀 다른 거예요. 어떤 개별적인 사물이 갖고 있는 속성보다도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는 거죠. ()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니까 유순하고 양()이니까 강건한 것이 아니에요. 그 음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달라져요. 어떤 존재와 그 자리()의 관계, 또 효와 이 효의 관계, 상괘와 하괘의 관계. 전부 관계입니다관계 그 자체가 확실한 존재성을 갖는 것이 동양적인 기본 마인드입니다. 이것이 동양적 사고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요.

 

붓글씨의 관계론

저는 붓글씨를 쓸 때마다 그런 관계론을 느껴요. 획을 하나 쓱 그었어요. 그었는데 아차 잘못 그었어요. 좀 비뚤어지게 그었어요. 어쨌든 쓰다보면 비뚤어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때부터는 비상사태에 들어갑니다. 다시 지우고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수습하는가 하면 그 다음 획으로 비뚤어진 획을 어떻게든 커버해야 돼요. 반대쪽으로 더 많이 자빠뜨린다거나, 잘못해서 획이 굵어져버렸다면 이걸 커버하기 위해서 다른 획을 좀 더 가늘게 쓴다거나, 윗글자가 좀 잘못됐다면 그 다음 글자로써 그 잘못된 것을 도와서 어떻게든 커버해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한 줄()이 비뚤어지면 그 옆에 있는 줄()로 바로 잡아야 돼요. 그러니까 글씨를 쓸 때는 굉장한 긴장도가 요구돼요. 저는 두시간 이상 계속해서 글씨를 못 써요. 글씨를 조용히 평정한 마음으로 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제경우는 굉장히 바쁘고 긴장됩니다. 쓰면서 하나 하나의 획을 보랴, 옆의 글자 보랴, 이 줄 보랴, 저 줄 보랴, 여기 쓰면서 저 위의 것 보랴 여간 긴장되고 바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흑과 백의 조화도 봐야 되거든요. 글씨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어느 정도 크기의 종이에 어느 정도의 먹이 들어갔는가 그리고 여백과 글씨의 관계는 어떤가 이러한 것이 서도에서 가장 중요하거든요. 저는 글씨를 쓸 때 까만 것을 보기보다는 하얀 것이 얼마나 남았나를 보면서 써요. 까만 것은 숙달되면 붓을 자기마음대로 운필이 가능하니까 안 봐도 돼요. 하얀 것만 보고 써요. 한 자 한 자의 개별적인 것을 단위로 하여 쓴다기보다 줄곧 다른 것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쓰는 셈이지요. 다 쓴 다음에는 마지막에 방서를 쓰죠. 몇 월 며칟날 무슨 글씨를 어디서 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빨간 낙관도 찍습니다. 이 방서와 낙관마저도 전체 균형에 참여하고 있는 글씨를 서도에서 격이 높은 글씨라고 봅니다. 명필들이 쓴 어수룩한 글씨를 보고 저렇게 어수룩한 글씨가 무슨 명필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하지만 획과 획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그렇게 맞추어내기 위해서 그런 모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씨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자 한자가 반듯하고 질서정연하게 써 내려간 것이 아주 보기 좋다고 하지요. 대개는 해서나 한글 궁체라든가, 고체로 쓴 글씨들이 그렇습니다. 또박또박 옆글자에게 신세질 것도 신세받을 것도 하나 없이 한 자 한 자가 독립해 있는, 그래서 '시민적 질서'(市民的 秩序)가 잘 지켜지고 있는 글씨를 잘 쓴 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글씨로 치지 않습니다. 혹평하기를 사자관(寫字官)글씨라고 하지요. 베끼는 글씨지요. 서도의 높은 경지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파격인데도 멋지게 살려내고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겁니다. 엉뚱한 곳에 점이 하나 있는데 그 점을 가리니까 글씨 전체가 확 무너지는 것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서도는 다른 예술장르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그 글씨와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나쁘고도 글씨가 훌륭할 수 없는 것이 서도입니다. 그래서 서도의 정신과 서도의 미학은 글자와 글자, 획과 획, 흑과 백, 작품과 사람의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느끼는 서도의 관계론입니다.

 

가슴으로 하는 생각

교도소에는 종교집회가 있습니다. 기독교집회, 천주교집회, 불교집회 등 종교집회가 있습니다. 종교집회에는 각 공장마다 명단에 있는 해당 신자만 참석이 허락되죠. 예배와 찬송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위문품으로 가지고 온 떡도 하나씩 나누어주지요. 종교집회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어느 교회에서 떡 가지고 위문 온다는 정보가 쫙 돌아요. 그런데 어느 종파교회를 막론하고 모든 떡 있는 교회는 다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떡신자'라고 그러기도 하고 '기천불 종합신자'라고도 하는데 제가 '떡신자'였어요. 사실 떡신자 되기도 어렵지요. 예를 들면 기독교집회에는 명단에 있는 기독교인만 참가가 허락되기 때문이죠. 저는 명단에 없습니다. 종교가 없으니까. 교도관이 그래요. 신선생은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왜 가려고 하느냐고 허가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제가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핑계는 이런 겁니다. 저는 무기징역이어서 아무래도 종교를 하나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집회 저런 집회 부지런히 다녀볼려고 그런다는 거지요. 대개는 보내줘요. 종교교회가 있는 날이면 이런 저런 시비가 일어나지요. 교도관이 '너는 천주교신자면서 왜 기독교집회에 갈라 그래?'하면서 허가하지 않으면 대는 이유가 가관인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천주교에 대해서 회의가 좀 생겨서요.' '신선생은 보내주면서 왜 나는 안 보내주냐!'는 이유를 대는 녀석도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교회에 와보면 각 공장에서 나온 떡신자들을 만나게 되지요. 아마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어느 떡신자가 나왔나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어쨌든 얼마나 반가운지, 서로 윙크하고 V싸인도 해 보이죠. 그러다가 기독교 회장한테 꾸지람을 듣기도 하지요. 교인도 아닌 떡신자들이 예배분위기 다 망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떡신자는 예배에는 마음이 없고 떡에만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떡신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 역시 여기 위문 온 여자신도들 중에서 자기는 무슨 색깔의 옷을 입은 여자가 그래도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옆에 쌓아둔 박스의 개수로 볼 때 떡이 대충 몇봉지이겠는지, 현재 인원수로 계산해볼 때늦게 받으면 두개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나누는 것이 다반사지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떡신자라는 관계가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떡신자들끼리는 다른 곳에서 만나도 참 반가워요, 같이 타락한 사람들끼리의 관계 같기도 하고 서로의 치부를 알고 있는 관계 같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저는 그런 관계가 참 멋진 관계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떡신자끼리의 관계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념적인 관계도 아니고 무슨 높은 가치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동지적인 관계도 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때묻고 지저분한 관계인데도 바로 그런 인간적인, 때묻어 있는 정서의 교감 같은 것이 삭막한 교도소를  견디게 해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저는 사람과의 관계, 이것이 오늘날 80년대, 90년대 학생운동의 경향성에서도 많이 지적된 것이지만, 인간관계는 일차적으로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그래서 저는 사상은 쿨 헤드(Cool Head)가 아니라 웜 하트(Warm hearts)라고 생각해요. "가슴에 두손을 얹고 반성해 보라." 그렇게 미련한 표현을 우리 조상들이 해왔다고 그랬었어요. 학교 다닐 때. 인간의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두뇌에서 이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과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두손을 머리에 얹고 조용히 생각해보라고 해야 맞습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하라니그러나 지금은 저는 가슴이 생각하는 게 맞다고 봐요.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한다고 생각하지요. 제가 신사복도 만들 수 있고, 양화공 반장도 오래했어요. 목수도 도끼목수 정도는 되구요. 그런데 정말 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마음으로 해요. 왜냐하면 잘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지나다가 뭔가 삐뚤어진 게 있으면 바로 만들어 놓고 갑니다. 그냥 놔두면 자기가 불편해서 바로 해요. 그래서 저는 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사명이기 때문이라는 이성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 인 것이라기보다는 하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한, 양심의 가책이 되는 그런 정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상은 웜 하트라고 생각해요. '건축'이라는 단어, 이 단어를 읽거나 생각할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상념이 다릅니다. 아파트 분양권 생각하는 사람, 아니면 아파트 생각하는 사람, 또 더 나아가서 포크레인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트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과 손때 묻은 망치를 떠올리는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함께 술 먹었던 목수친구를 생각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자기 머릿속에 떠올리는 연상세계가 사람마다 엄청나게 달라요. 88올림픽 생각하는 사람, 3.1 만세운동 생각하는 사람, 충무공을 생각하는 사람, 장승을 생각하는 사람, 별 사람 다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이 강좌는 성공회대학교 제3회 교사 아카데미의 10회 마지막 강좌입니다. 이번 교사 아카데미의 일관된 주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교육할 것인가'였습니다. 저희 교육원 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할 당시부터 논의되었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어떤 삶을 교육할 것인가'라는 제목이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교육으로 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10번의 강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각각 다른 개념들을 사용했지만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다'는 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어떤 삶을 교육할 것인가', 이것은 제가 소화할 수 있는 주제가 못될 뿐만 아니라 저는 교육, 특히 학교 교육이 그 사회를 살아가는 어떤 개인을 얼마만큼 포괄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교실은 창백하고 작은 공간'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습니다만 교육이나 학교는 작은 우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교실은, 더 큰 교육은 자연이고 사회이고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을 전망하든,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모색하든 우리는 먼저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반성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현장에서 만들어야 되는 여러분들의 과제입니다. 다만 저는 제가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고자 하니까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것이 대개는 '약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목적의식적인 실천과정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받게 되는 피동적인 생각의 총화가 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적 지식이 약한 지식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지식은 훨씬 더 객관적인 조건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의 근거가 된다고 믿습니다.


나의 관계론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마는 저는 약 1 6개월 동안 사형수로 있었고 이어서 무기수로서 20여년을 살았습니다. 사형이든 무기형이든 매우 절망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의 이야기를 아시죠. 조난을 당한 비행사가 죽음을 앞두고 그는 문득 '누가 조난자인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친구들이 조난자인지도 모른다는 선언을 생땍쥐베리는 하지요.

깜깜한 형장에서 교수형을 받건 찬란한 햇볕 아래서 땅위에 피를 뿌리는 총살형이건 한 개체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결코 그 한 개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맺어 온 수많은 인간관계가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무기징역이라는 긴 터널을 마주하면서 느끼게 되는 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 개인의 아픔이나 비극이기보다는 나로 인한 여러사람들의 아픔이 다시 나의 아픔이 되어 되돌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자신이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이구나, '관계는 존재'라는 실존철학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감방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아주 음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같은 감방에 살면서도 일절 말이 없었습니다. 치약도 물론 아무것도 없이 살았습니다. 보다 못해서 다른 사람이 치약을 줘도 안 받습니다. 세탁비누를 칫솔로 찍어서 양치질을 합니다. 굉장히 어두운 친구였어요. 2, 3년이 지난 후에 저한테 와서 치약을 사달라고 했어요.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래서 제가 '너는 치약 사 줘도 안 받는 녀석 아니냐'고 그랬더니, '신선생님한테는 한 개 사 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선생님들께 나눠드린 강의안에 '치약 한 개의 행복'이라고 쓴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는 참 많은 책들 읽도록 권하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가 나보다 먼저 출소하고 또 다시 들어와서 같은 방에 지냈는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참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표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저는 그 친구의 변화에, 그 친구가 맺었던 관계망에 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주 행복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붓글씨를 쓸 때, 제가 붓글씨 잘 쓴다는 것 아시죠?(웃음), 매번 상투적인 데서 벗어나려는 욕구를 갖습니다. 그런데도 새로운 변화는 좀체로 나오질 않습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글씨는 마음에만 있고 종이 위에는 결국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실수를 좀 하지 않나 하는 기대를 해요. 왜냐하면 실수를 해서 글씨의 획이 굵어졌다고 하면, 그 획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그 다음 획으로 그 굵은 획을 어떻게든 커버를 해야 돼요. 그리고 한 글자가 비뚤어졌다면 그 글자를 바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글자로 그 글자를 바로 세워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가 다시 한 줄이 완성이 되면 그 줄과 그 다음 줄, ()이라고 하죠, 행과 행의 조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한 행의 잘못은 양쪽 옆에 있는 행들이 채워줍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한 장의 서도 작품은 서로가 서로에게 한껏 기대고 있는 글씨가 됩니다. 맨 마지막에 쓰는 방서(傍書)와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균형에 참여하는 그런 한폭의 글씨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글씨 쓸 때는 참 바쁩니다. 써내려가는 동안에 상하좌우의 획()과 자()와 행() 그리고 글자와 여백이 어울리는 흑백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읽어가면서 써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가 서로를 돕게끔 배려하느라 고도의 긴장상태에서 글을 쓰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기대고 있는 한 폭의 글을 얻고 나면 굉장히 행복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흔히 보시는 반듯반듯한 글씨, 한 자 한 자가 독립된 글자들로 이뤄진 작품보다 한 자 한 자는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균형이 일그러져 있지만 그렇게 서로 기대고 도와서 이뤄내는 높은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경우를 서도의 높은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글씨를 쓸 때마다 이번에는 실수 좀 하지 않나 하는 기대를 갖고 글씨를 씁니다.

서양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지만 저는 주역의 사상에서 동양적 사고의 기본적인 틀을 봅니다. 주역은 흔히 점치는 책이라고들 그러지만 사실은 세상을 인식하는 범주(範疇)입니다. 64개의 대성괘(大成卦) 하나 하나가 곧 범주입니다. 이 역 속에 있는 동양의 마음, 동양의 생각은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있는 관계론적인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천태(地天泰)는 땅을 뜻하는 곤괘(坤卦)가 위에 있고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가 아래 있는 형식입니다. 64개의 대성괘 중에서 최고의 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릅니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천지가 거꾸로 돼 있는 상태를 최고로 칩니다.

 

(그림) 지천태괘(地天泰卦)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천태를 최상의 괘로 풀이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주역의 설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위에 있는 '()'와 아래 있는 '()'이 서로 만난다는 것입니다. 주역의 설명은 대개는 이런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천태와 반대의 모양을 하고 있는, 그러니까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 있는 것을 천지비(天地否)괘라 하여 주역에서는 가장 나쁜 괘로 칩니다. 이름 그대로 비(), 형통하지 못하고 막힌 것입니다. 관계가 단절된 것이지요.

각각의 효()를 읽는 방법은 먼저 그 위()를 봅니다. 양효의 자리에 양효가 있고 음효의 자리에 음효가 있어야 득위(得位)했다고 합니다. 효와 그 효의 자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화수미제(火水未濟)처럼 단 한 개의 효도 위()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를 형통하다고 합니다. 형통하다고 하는 이유는 응()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것은 좀 더 큰 관계입니다. 상괘(上卦)의 효와 하괘(下卦)의 효가 음과 양으로 서로 조화돼 있는 경우를 응()이라고 합니다. 화수미제괘는 완벽하게 응을 이루고 있습니다. 실위(失位), 즉 위는 잃었으나 응()을 얻고 있기 때문에 무구(無垢), 허물이 없고 형통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양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체계라고 할 수 있는 주역에 담겨 있는 관계론입니다.

 

(그림)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학()과 사()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모두 선생님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 구절을 골랐어요. ()을 하고 사()를 하지 않으면, 즉 학이불사(學而不思)면 어둡고(), ()를 하고 학()을 하지 않으면 즉, 사이불학(思而不學)이면 위태롭다()고 합니다.

()과 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제가 어렸을 적에 저의 할아버지께서 이 구절을 설명하시기는 1시간 책을 보면 30분 정도는 읽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감옥에서 이것을 다시 읽었을 때는 할아버지께서 틀렸어요. 저는 사(), ()의 마음() 즉 실천의 의미로 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구절이 해석될 수가 없습니다. '이론()만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어둡고, 실천()만 하고 이론()이 없으면 위태롭다.' 실천은 조건적이고 특수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없으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과 사()의 균형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전통과 문화속에는 이처럼 풍부한 관계론이 있습니다.


존재론

반면에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우리사회의 조직 속에 깊숙하게 들어있는 것은 이러한 관계론이 아니고 존재론입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국가 등 모든 차원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존재론적인 방법과 사고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 우리는 경쟁력 있는 개체로 성장시키려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에 있는 충무공의 동상만큼 튼튼하고 무겁고 강한 존재로 키워가길 원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마 가르치는 사람들도 상당 부분 그런 교육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회사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력 있는 회사, 경쟁력 있는 국가, 이것도 역시 그런 존재론적인 기반 위에 서 있는 개념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의 아픈 기억 때문에 이긴 친구가 있으면 진 친구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반대편을 자주 생각했어요. 어렸을 적에 제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몹시 부대끼다 못해 학교 파한 뒤에 정식으로 두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가 편이 되었던 선량한 친구가 코피가 났어요. 이긴 친구는 당당하게 그 자리를 떠나고 저는 그 친구 옆에 앉아서 강물에 코피를 씻어 줬어요. 철없을 때의 기억입니다마는 지나고 보니까 그 때 참 중요한 것을 깨달았음을 살아가면서 느끼게 돼요. 저는 승리라는 개념 뒤에는 반드시 패배가 있고 승리라는 것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개인이든 회사든 국가든간에 존재론적인 번영과 승리라는 것은 그만큼의 패배와 아픔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생명 또한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를테면 관계성의 총체입니다. 최근에는 생명에 대한 규정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마는 대개 다음의 네 가지, 용기(容器), 신진대사(新陳代謝), 자기복제(自己複製), 진화(進化 : 유전과 변이)로 접근을 합니다. 첫째, 생명은 세포처럼 일정한 개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즉 생명에는 그것이 담겨있는 용기(容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있다는 것은 그릇의 안과 밖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둘째, 신진대사라는 것 역시 외부와의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입니다. 오픈 시스템입니다. 셋째, 자기복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포분열이건 또는 아들딸을 낳는 일이건 자기(自己)가 자기 아닌 비자기(非自己)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 이것도 엄청난 관계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전과 변이를 내용으로 하는 진화 역시 환경과의 관계개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이 바로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성의 총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생명론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겪었던 약한 지식으로서의 '관계론' 그리고 근대 사회 이후에 강력하게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존재론'에 관한 개략적인 이야기였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존재론은 비생명적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론과 자본주의

강의안에 맹자 곡속장(孟子 穀 章)의 불인지심(不忍之心) 얘기를 썼습니다. ()나라 선왕(宣王)이 번제(燔祭)로 쓰기 위하여 끌려가는 소를 봤어요. 벌벌 떨면서 사지로 끌려 가는 소를 보고 제 선왕은 신하들을 시켜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소를 양으로 바꾸라는 것은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꾸는 인색함이 아니라 소는 봤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차마 보고는 죽는 것을 그냥 참을 수 없어서 제선왕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이라고 맹자는 풀이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존재,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 간이든 회사와 회사 간이든 나라와 나라 간이든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생각이 존재론적인 데 갇혀 있기 때문에, 승리만 보고 패배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극적인 일들이 청산될 수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우리를 맹목(盲目)이 되게 하는 가장 상징적인 것이 '상품과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상품과 화폐는 일단 상대방을 묻지 않습니다, 못 보게 하죠. 자기가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만든 사람을 만날 수 없게 합니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는 물신성(物神性)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우리가 불인지심(不忍之心)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는 것은 참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어린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차마 못할 일'이 태연히 자행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제선왕처럼 눈으로 봤으면 그 소의 죽음을 참지 못할 텐데, 관계 자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행되는 비극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IMF 현실과 관련된 논의 가운데 본질적인 것 하나만 거론 하겠습니다. 여러 사람의 처방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대부분의 주장은 지엽적인 문제를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경제현실에서는 무엇이 가장 기본적인 모순인가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IMF 현실은 신자유주의라기보다는 신개입주의라고 규정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산력의 파괴와 노동 비용의 통제입니다. 최근에 많은 기업이 무너지면서 생산력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환율폭락과 함께 임금수준이 반으로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리해고를 통해서 노동의 저항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투자조건을 만들어내는 정지작업입니다.

현 단계의 이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기본적인 모순은 과잉축적자본의 순환운동입니다. 이것은 과잉생산의 문제입니다. 흔히 과잉생산이라고 하면 우리는 상품생산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상품의 생산이 아니라 자본의 생산입니다. 자본의 과잉축적입니다. 자본의 과잉축적과 과소수요입니다. 쓰일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본은 자본 그 자체로서 수요되기를 원합니다.

원래 자본은 생산의 3요소(자연, 자본, 노동) 중 하나로 생산에 투입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의 자본은 생산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굉장히 많은, 80조 달러가 넘는다고도 얘기하는 자본(헤지 펀드)이 과잉 생산돼 있고 그 자본의 수요, 즉 투자는 부족하게 돼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생산시설을 파괴합니다. 약한 기업, 약한 국민경제가 파괴되어 경쟁에서 제외됩니다. 이것은 노동비용의 통제와 함께 투자여건을 유리하게 만들어내고 자본의 축적운동을 보완합니다.

그런데 기업이 무너지고 고용이 정리되면 소득이 있던 사람이 소득이 없어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전반적인 수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는 자본의 수요를 불안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이 조건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이 타국민 경제의 직접적 관리입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경우 그 생산력의 상당 부분이 파괴됨과 동시에 국내 자동차 시장을 국제독점자본이 장악·관리하게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소련 연방의 해체와 동구사회주의 붕괴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전의식 때문에 이러한 금융자본주의의 운동을 보기보다는 성급하게 사회주의체제의 모순을 지적하기에 바빴습니다. 저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동구 사회주의의 해체·붕괴과정과 국제 금융자본과의 관계를 연구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향후 과정이 보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적어도 과잉생산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상품의 과잉이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경제학 개념이기 때문에 조금 정리를 하겠습니다.

먼저, 1부문, 즉 생산재를 생산하는 부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제1부문이 경제에서는 결정적입니다. 이 부분의 과잉이 가장 결정적입니다. 자본이 생산과 관계없이 공격적인 투기 자본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됩니다. 재생산과정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즉 경제가 순환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1부문 내부에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철광, 기초화학부문과 이 부문의 제품을 소비하는 1부문 내의 다른 생산 부문의 균형이 이뤄져야 합니다. 좀 까다로운 개념입니다만 가치 및 사용가치의 균형이 이뤄져야 합니다. 수량과 종류와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1부문과 2부문 간의 균형도 이뤄져야 하고, 2부문 내에서도 균형이 이뤄져야 하고, 2부문의 생산물과 최종 소비수요와도 균형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균형이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그 불균형이 계속 누적되어서 최근에 직면하는 바와 같은 관리된 형태의 공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치감소와 가치파괴, 기계설비와 같은 것은 가치가 제로가 됩니다. 이러한 파괴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쉽게 그 기억을 망각하게 되죠.

그러나 최근에는 자본측에는 탁월한 관리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제 순환 과정의 파탄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치 1930년 대공황 직전의 수많은 학자들 얘기처럼.

한 예로 일본 도요타의 생산 공정에는 최고 경영자들도 정확한 숫자를 모르는 수의 협력업체가 존재합니다. 다섯 자리 숫자라고 합니다. 다섯 자리라고 하면 5만 개의 납품업체들이 납품하는 부품을 제때에(just in time) 조립해서 몇 초마다 자동차 한 대씩이 나오는 거지요. 굉장히 정밀한 관리 시스템입니다. 5만 개 중에는 같은 종류의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도 복수로 있습니다. 이것을 관리해 내기 위해서는 거의 천문학적인 정밀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만큼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증거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별 공장의 얘기가 아닌 다음에야 1부문 내의 여러 생산 단위들, 1부문과 2부문의 관계들, 이런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불안한 균형이 유지될 리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입니다. 불균형은 항상적인 것이고 균형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일 뿐입니다. 탁월한 관리능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로든 파탄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불안정한 구조입니다. 그나마 전자네트워크로 세계화되어 있는 광범한 불안정 구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러한 불안정성 특히 그 축적과정의 최고단계인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와 있는 이러한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도 그 기본에 있어서는 존재론적인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해야 합니다. 개별적 존재가 서로 관계하기보다는 경쟁하고 승부하는 관계, 즉 다른 것들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신장해가는 존재론적인 구조와 운동 원리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구조가 최근의 위기상황에서 그 존재론적 얼개가 상당부분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전망을 하고 어떤 모색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10회에 걸친 교사아카데미의 기본적인 주제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기본적인 주제를 존재론과 관계론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들의 사고와 삶 그리고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의 기초위에서 여러 가지의 담론들을 '관계론'적 전망과 페러다임 위에서 새로이 건설해가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론의 전제

그런데 새로운 삶의 틀을 전망하고 모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환상의 청산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풍요의 과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역사가 과연 풍요의 과정이었는가?라는 질문은 근거없는 반론같은 인상을 줍니다. 잘 살게 되었고, 봉급도 많이 올라갔고, 물질적 풍요만큼은 누구도 반론을 제기 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풍요는 특정 대륙, 특정 국가, 특정 기업, 특정 계층의 풍요입니다. 부분의 성격입니다. 대개 대기업의 취업 노동자, 그것도 10년 정도 근속한 노동자들의 급여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부당한 것일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 오류이지요. 세계 체제라면 변방 지역, 즉 아프리카, 방글라데시등 서아시아, 라틴 아메리카등 수많은 곳에 사는 사람들과 실업자, 빈민층들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은 그것이 자본축적의 과정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결코 풍요의 과정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의 기아인구가 3천만이라는 사실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소위 빅 5, 빈곤, 질병, 무지, 오염, 부패(부패를 범죄라고 바꿔 불러도 좋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소위 자본주의의 풍요의 역사 과정에서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우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와 풍요에 대한 지금까지의 환상에 대해서 냉정하게 반성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두번째는 성급한 반성과 성급한 대안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기도 하고 실제로 이번 강좌를 통해 그런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대안'이라는 것은 그것이 학교의 형태든 공동체의 형태든 물론 선언적인 의미에서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는 점에서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대안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거나 결단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형식이라고 믿습니다. 혹시나 그러한 대안적 모색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반복해 온 유토피아적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장 흔한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기업 형태인 회사를 조합적인 성격으로 바꾸는 것은 굉장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순진한 기대일는지도 모르지만, 최근에는 부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해서 그 기업 내부에 노조 또는 종업원들의 확실한 의지가 있는 경우에는 그 기업의 성격을 변화시켜서 조합적 성격으로 재건하려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노력이, 앞서 말한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거나 결단하기 어려운 대안적 노력보다 더 주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가장 흔한 형식,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에 대한 주목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변혁 혹은 통일에 대한 공포를 줄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은 경제잉여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생산량과 노동시간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결정할 것인가, 저는 이것이 달라지면 사회성격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이런 일상적 공간에서 접근하는 장기적인 프로그램인 경우 우리들 속에 들어와 있는 이데올로기적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스페인에 갔을 때 저는 피카소와 가우디를 집중적으로 찾아다녔어요. 그곳에서의 피카소의 그림과 가우디의 건축은 조금도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의 아주 흔하고 흔한 미학이었고 건축이었어요. 가우디 건축물 비슷비슷한 것이 역사적으로 수많이 존재했었어요. 그래서 비범한 것은 역시 평범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매우 상식적인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세번째로, '도로와 길'에 대한 생각입니다. '도로와 길'을 구별합시다. '도로'라는 것은 단지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의미로 규정하고 반대로 ''은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개념으로 구별한다면 도로는 그 길이가 제로가 되는 것이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의 경우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것을 제로로 만들거나 짧을수록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 징역 사는 사람보다 더 절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교도소에서도 영화를 보여 주는 적이 있는데, 영화속의 세월은 참으로 빨리 지나갑니다. 화면에 꽃이 핀 장면에 이어 눈이 내리고, 다시 꽃이 핀 장면에 이어 눈이 내리는 장면을 두어번 반복하다가 '10년 후'라는 자막이 나옵니다. 10년 후라는 자막에 재소자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쉽니다. 자기 징역도 저렇게 순식간에 지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이지요.

그래서 언젠가 내 옆에서 한숨을 쉬는 친구를 붙잡고 물었어요. "영화속에서처럼 내일 아침이 10년 후가 되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즉 지금 당신의 나이가 40이니까. 내일 아침 50세의 나이가 되고 몸도 그만큼 노쇠해진다고 해도 역시 그런 생각이냐고 물었어요. 선뜻 대답을 못해요. 한참을 생각한 후에 안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에서 10년을 상실하기가 싫다는 뜻이지요. 10년이란 세월은 행복한 세월도 아니지요. 징역살이 10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10년을 버리기보다는 비록 징역살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간을 자기가 온전히 살겠다는 뜻이죠. 그의 마음은 목표도 중요하지만 과정 그 자체가 갖는 의미에 무심하지 않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징역살이라는 불우한 세월도 버리기 어렵거든,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우리의 태도는 말 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로, 저는 도로와 길에 대한 생각과 아울러 속도, 성장, 번영에 대한 반성, 그리고 당연히 목표와 수단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빠른 성장은 빠른 몰락을 가져 옵니다. 꽃이건 나무건 동물이건 세상에 가장 흔한 이치가 바로 '빠른 성장과 빠른 몰락'입니다. 암세포가 세포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한다고 그러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여러 가지 사회 형태 중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빨리 성장한 체제입니다. 일찍 잡는 사람은 16세기부터라고 하지만 저는 그것은 자본주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요. 적어도 1800년 이후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채 200년이 안됩니다. '빠른 성장과 빠른 몰락'이라는 자연계의 흔한 이치가 이 경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효율성과 전문성에 대한 신화도 아울러 반성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목표와 수단, 도로와 길에 대한 이야기를 저는 이런 말로 정리합니다. '낮은 단계의 목표가 수단이며 높은 단계의 수단이 목표이다.' '목표와 수단은 통일되어 있다'.

도로와 길, 목표와 수단에 대한 반성은 현재와 같은 경제적 난국에서는 매우 절실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돌부리에 넘어진 사람은 자기의 걸음걸이를 반성하게 되지요. 다시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돌에 두 번 넘어지는 것이라 해야 합니다.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한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한다." 제가 가끔 붓글씨로 쓰기도 하는 구절입니다.

진선진미는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있는 구절입니다만 주서(註書)에는 이렇게 해석이 안돼 있습니다. 진선(盡善)과 진미(盡美)는 순()임금의 음악인 소()와 주()나라 무왕(武王)의 음악인 무()를 비교하는 기준으로 쓰인 개념입니다. 저는 고전의 의미를 우리시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낸 최고의 가치를 진선진미(盡善盡美)라고 한다면 그것은 목표와 과정이 통일되어 있는 형태를 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번째, 미완성(未完成)에 대한 주목입니다. 아까 말했던 화수미제가 주역 64괘의 맨 마지막 괘입니다. 왜 맨 마지막에 미완성괘를 배치했을까? 이것은 주역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입니다. 제일 마지막이 미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미완성을 형통하다고 풀이합니다. 아까 형통하다는 것은 위()는 잃었지만 응()을 얻는 것이라고 그랬는데, 미완성의 효사(爻辭)에는 이렇게 풀이가 돼 있습니다. "여우가 강을 건너는데 강을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셨다. 이로울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작은 실수가 있는 미완성입니다.

저는 주역의 맨 마지막에 미완성괘를 배치한 이유는, 사물의 모든 운동은 미완성이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미완성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고, 더구나 그 미완성은 작은 실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과정을 반성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완성은 끊임없는 계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서 완성하지 말고 미완성하려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부단한 반성이 진보의 조건이기도 하리라고 믿습니다.

여섯째는, 비자본주의 부문의 조직화입니다. 미셸 쵸스도프스키는 "빈곤의 세계화"에서 투쟁의 세계화를 주장합니다. 선량하고 무력한 다수의 사람들, 즉 약자들의 조직화입니다. 극장좌석이 계단식이 아닌 경우 앞사람 머리 때문에 스크린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일어서면 물론 잘 보입니다. 그리고 일어 선 사람이 화면을 잘 볼수 있는 까닭은 다른 사람이 일어서지 않기 때문이지요.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들의 조직화, 이것은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함께' 일어서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루쉰의 글에 반 에덴의 <어린 요한>이란 동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지나가다가 버섯이 자라고 있는 길섶을 지나갑니다. 아버지가 지팡이로 그중 버섯 하나를 가리키면서 아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저것은 독버섯이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버섯이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버섯에게 물어봅니다. ", 내가 독버섯이니?" 그랬더니 옆에 있는 버섯 친구가 그를 위로합니다. "괜찮아, 너는 독버섯이 아니야. 좋은 친구야." 그리고 나중에 한마디 더 위로하기를, "그런 건 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우리는 버섯이니까 사람들 말 안 들어도 돼"라고 합니다. 사람의 말이라는 뜻은 먹을 수 있는 버섯인가, 아닌가 하는 '식탁의 논리'입니다. 지팡이로 지목당한 그 버섯이 독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설사 독이 있다 하더라도 그 독은 남을 해치는 독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려는 국방력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앉아있는 사람들의 입장, 버섯이라는 입장, 이런 자기 정체성을 깨달아야 되지 않는가 합니다. 이런 깨달음이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형태로 이뤄지면 굉장한 힘으로 나타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선량하나 무력한 다수의 조직화는 실로 난감할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감히 강자들이 추구할 수 없는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저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든다면 자본은 '축적'이 아닌 '분배'를 자기 목적으로 가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이처럼 상대가 도저히 목표로 삼을 수 없는 목표를 내가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힘입니다. 이런 자기 힘에 대한 자각과 긍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에는 비자본주의 부문이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비조직적이고 고립분산적이긴 하지만 가정, 우정, 봉사등 자본주의적인 질서와 상관없는 사회부문이 광범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문의 원리가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원리와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목표로 삼을 수 없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상(思想)은 따뜻한 가슴(warm heart)'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상은 냉철한 이성(cool head)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상은 따뜻한 가슴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징역살이를 하는 동안 이런저런 노동을 하면서 참 훌륭한 스승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로 ''에 있어서 스승임은 물론입니다. 그 분들의 중요한 특징은, 물론 능숙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heart)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옆에 뭔가 비뚤어져 있으면 우선 마음이 불편해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사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한 것은 사상은 이러한 마음 즉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우리가 존재론적인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서를 키워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서를 키운다는 것은 무언가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머리로 이걸 어떻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기보다 우선 가슴으로 불편을 느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때 저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해 보라'는 말을 두고 웃었어요. 머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해 봐야지, 가슴이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에 두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해 보라는 것이 참 우습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가슴에 두 손을 얹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 분들을 보면. 일을 잘 한다는 것은 마음이, 정서가 그렇게 정돈돼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분들을 진정으로 스승삼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고향마을에 아저씨 한 분이 계셖어요. 이분은 글을 잘 몰랐어요. 그러면서도 무언가 권위가 있는 자랑을 하고 싶었던가 봐요. 힘자랑에 이어서 한자실력을 과시함으로써 나에게 권위를 보이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남 안 보는 뒤안으로 데리고 가서 땅바닥에다 당신 이름자를 써보였습니다. 이름 가운데 글자에 '목숨 수()' 자가 들어 있었는데 '목숨 수()' 자가 좀 복잡하죠? 목숨 수자를 쓰면서는 노래비슷한 것을 읊조리면서 썼어요. '사일(士一)이와 공일(工一)이는 9(口寸) 간이니라'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나눙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것은 복잡한 목숨 수자를 기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목숨 수자를 보면 '사일이와 공일이는 구촌 간이니라'를 읊조리면서 쓰는 습관이 있습니다. 또 한 편으로 생각하지요. ()와 공(), '배운 사람' '일하는 사람' 9촌간이라면, 물론 아홉 구()가 아니라 입 구()자입니다만,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양화공으로 한동안 일하고 있었을 때는 제법 손에 굳은 살이 박혔습니다. 거칠고 두꺼워진 손을 보고 창백한 인텔리의 손을 청산했다는 은근한 자부심같은 것을 느꼈지요. 일부러 연탄난로 같은 데 손을 단련을 해서 뜨거운 국 나왔을 때 시침 뚝 떼고 건네면서 옆사람을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저는 출소할 때쯤 해서는 그 어렵다는, 역사상의 수많은 실천가들이 끝내 그것만은 못했다는, 소위 '성분개조'를 했다고 자부했어요, 남한테 얘기는 안했지만……. 손도 굉장히 두꺼워지고. 내가 뜨거운 국그릇 옆사람한테 주면 받다가 떨어뜨릴 정도가 됐으니까요. 욕도 남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잘 한다는 것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만)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18년째 되던 해에 귀휴(歸休)나왔을 때도 집에서 가지고 온 신사복 대신 수의(囚衣)를 입고 나왔어요. 친구가 만나자는 롯데호텔 라운지 커피숍에 그 옷차림으로 앉아서 아이리쉬 커피도 마셨지요.

출소할 때는 그런 정서, 일하는 사람들의 정서로 나자신을 바뀌어내었다는 성취감을 저는 속에다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출소한 후에 개조되지 못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돼요. 20 30년만에 만난 친구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의식은 많이 바뀌었지만 사고의 기본적인 패턴, 인간적인 바탕 즉 정서적인 부분은 좀체로 바뀌지 않는 것 같았어요. 제가 느낀 낭패감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버리거나 잃어버리고 오직 한 가지 이룩한 것이 자기개조였다고 생각했던 만큼,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굉장한 낭패감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낭패감이야 말로 제가 아직도 존재론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반성을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변화는 이웃의 키 이상을 넘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어깨를 기대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키만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개조에 있어서 그것을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달성하려고 했고 그렇게 생각했던 잘못에 대해 저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의 관계속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들만큼 변화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정서도 관계 속에서 길러지고 관계 속에서 지탱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가슴 좋은 사람만 못하고, 가슴 좋은 사람은 손 좋은 사람만 못하고, 손 좋은 사람은 발 좋은 사람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하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 제가 강의원고에 적은 구절입니다만 이 구절을 적은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간략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속에서나마 제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여러분들의 이해가 있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무엇을 교육할 것인가를 얘기하기 전에, 오늘의 상황 속에서 어떤 삶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한마디로 '존재론'적인 생각과 구조를 '관계론'적인 사고와 구조로 바꿔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역시 이런 추상적인 제의밖에 드리지 못합니다. 좀더 구체적인 교육의 방법과 모색은 여러분들의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에는 이런 근본적인 반성이 충분히 공감·공유될 수 있는 객관적인 환경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합의해 낼 수 있는 귀중한 깨달음을 조직화하고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노력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형(典型)을 만들어 내는 노력입니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사고와 삶을 가르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더 많은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넓혀나가고 그러한 이야기를 더욱 더 진지하고 감명깊게 교감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지금 말씀드린 전형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는 상투성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학습과 노동과 놀이가 통일된 어떤 교실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고 관계론적인 메시지를 구체화하여 담아낼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나누려는 성실함이 이를테면 병사를 모집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전형의 창조는 마치 부대(部隊)의 창설에 비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형의 창조는 그만큼 실천적 의미를 갖는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형은 어차피 교육현장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고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못됩니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기간 이러한 어려움이 계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이 겪는 어려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어려움을 통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물과 사건과 사태의 본질을 깨닫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경험적 지식은 약한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역경(逆境)은 개인의 경우든, 사회역사적 과정에 있어서든 객관적 인식을 높혀줍니다. 마치 옷을 적게 입은 사람이 추위를 정직하게 느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 어려운 시기에 진정으로 우리가 탐익해 온 일상들을 통절하게 깨닫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나를 그리고 우리를 곧게 서게 하는 마디가 됩니다. 대나무가 곧게 설 수 있는 힘은 군데 군데 만들어놓은 마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림 산지박괘(山地剝卦)

 

주역의 산지박괘(山地剝卦)는 단 1개의 양효가 남아 있는 형상입니다. ()은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상태, 즉 절망이 쌓이고 쌓인 가운데 오직 실낱같이 가느다란 단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효사에는 1개 남아 있는 양효를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석과(碩果)는 씨과실입니다. ()이라는 것은 크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씨라는 뜻도 있습니다. '씨 과실'은 불식(不食), 먹지 않는다 또는 먹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낙엽이 진 늦가을 찬서리 내릴 때 감나무 끝가지에 남겨놓은 큰 감을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씨 과실'입니다. 씨과실은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히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시련에도 최후의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터득한 조상들의 믿음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는 이치입니다.

산지박괘의 다음 괘가 지뢰복(地雷復)괘입니다. 초효 1개만 양효이고 2효에서 6효까지 전부 음효입니다.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싹트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은 돌아옴입니다. 광복(光復)입니다.

강의안의 마지막에 제가 좋아하는 루이 아라공의 시구절을 적었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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