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눈이 보이면, 보라. 볼 수 있으면, 관찰하라.
- '훈계의 책' 중 -
2. 330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인내심을 가져라. 시간이 제 갈 길을 다 가도록 해주어라. 운명은 많은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는가. 여기에 이 지도를 세우기 위해, 그리하여 이 여자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도록 해주기 위해, 운명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는지는 운명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3. 414
의사의 아내는 작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작가는 두 손으로 그 손을 잡더니 천천히 자기 입술 위로 들어올렸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4. 418
다 빼앗겨버렸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
5. 449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예요,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 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6. 461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7. 해설-김용재
포르투갈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는 예순에 가까운 나이인 1980년 '바닥에 일어서서'를 발표하여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의 큰 호평 속에 문단의 주목을 뒤늦게 받은 대기 만성형의 작가이다. 그는 특히 80년대 들어 역사와 환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환상역사소설'이란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하며 포르투갈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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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1년 발표한 '예수의 제2복음'으로 인해 정부와 사회의 박해를 받아 조국 포르투갈을 떠나게 되는 슬픔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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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마구가 사회와 개인의 갈등에 대한 치열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독재와 혁명, 아프리카에서의 무모한 식민지 전쟁 등으로 인간 존재를 한없이 누추하게 만들어왔던 20세기 포르투갈 역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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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이 벗겨진
꼼꼼히
이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