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15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법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랑하다'라든가 '꿈꾸다' 같은 동사들처럼, '읽다'는 명령문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줄기차게 시도를 해볼 수는 있다. "사랑해라!" "꿈을 가져라!"라든가. "책 좀 읽어라, 제발!" "너, 이 자식, 책 읽으라고 했잖아!"라고.
"네 방에 들어가서 책 좀 읽어!"
효과는?
전혀 없다.

2. 151
단지 아이들은 책이 무엇이며,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허기를 채워주는 소임을, 아이들은 아주 오래 전에 작은 스크린에 완전히 일임해버렸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어디에 나와도 상관없을 판에 박힌 상황과 인물들이 밎어내는 만화 영화, 연작물, 연속극, 공포물을 쉼 없이 돌려댐으로써, 주어진 직분을 다했다. 말하자면 각자에게 원하는 만큼의 이야기를 배급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들로 주린 배를 채워넣듯 머릿속을 채운다. 하지만 아무리 채워넣어도, 허기는 여전하다. 즉시 소모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아도 여전히 외롭다.

3. 155
소설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작가와 나 사이에 형성되는 그 역설적인 친밀감을 발견하는 데 있다. 홀로 씌어진 그의 글을 혼자서 소리 없이 읽어내리는 나의 목소리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4. 160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그 '삶의 의무'의 닳고 닳은 상징물인 지하철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이 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일 때문에 좋아하는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5. 163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마치 무슨 성벽이라도 두르듯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을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읽는 것에 대해 조금도 부담을 주지 말고, 읽고 난 책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보태려 들지 말아야 한다. 섣부른 가치 판단도, 어휘 설명도, 문장 분석도, 작가에 대한 언급도 접어두어라. 요컨대 책에 관한 그 어떤 말도 삼갈 일이다.

6. 211
우리는 차츰 작가들을, 글을 찾아 나서게 된다. 더 이상 놀이 상대로서의 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존재할 동반자로서의 책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교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 중의 하나는 한 학생이 - 아무 책이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데도 - 대량으로 쏟아져나오는 그 숱한 베스트셀러들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굳이 혼자서 가파른 길을 올라 발자크를 벗 삼아 마음의 안식을 찾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7. 212
'보바리즘'이란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앞서 말한 바로 그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 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
독자라면 누구나 처음 한동안은 빠져들기 마련인,
더없이 감미로운 경험인 것이다.

8. 225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떤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얽어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들은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9. 옮긴이의 말
다니엘 페타크는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다.
...
20년 남짓 교사생활을 했다는 그


***
착잡한
포복절도할 만큼 엎치락뒤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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