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감 있는, 잘지은, 단편소설 제목>
카스테라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아, 하세요 펠리컨
야쿠르트 아줌마
코리언 스텐더즈
대왕오징어의 기습
헤드락
갑을고시원 체류기

1. 25
첫 수납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였다. 말 그대로 걸작이란 생각이 들어서였고, 냉장고도 그 결정에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달에 첫발을 내려놓는 암스트롱처럼 - 나는 냉장실의 정중앙에 조심스레 한 권의 책을 내려놓았다.
...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후 나는 때로는 부지런하게, 때로는 되는대로 인류의 걸작들을 읽고, 판단하고, 엄선하여 냉장고 속에 차곡차곡 쌓아갔다. 거의 대부분이 책이었고 이 또한 명작인 두 편인가 세 편인가의 영화가 책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2. 52
그건 <즐거움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
즐거움의 문제?
즉, 너구리란 것은 말이야.
어려운걸.
그저, 너의 삶이 그런 시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넌 지금 스테이지 1의 문턱에 서 있는 거야. 그래서 이 세상이 너구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거지. 방법은 두 가지야. 너구리인 채로 도망을 다니거나, 아니면 쉽게 너구릴 포기하거나. 너의 팀장은 아마도 너구릴 숨긴 채 살아온 인간이었을 거야. 물론 힘들었을 테지.

3. 80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승일아. 온몸으로 밀어, 온몸으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상습적으로.

4. 108
서슴없이, 우리는 구름 속으로 날아들었다. 구름의 냄새가 심하게 코를 찔렀다. 비릿함이 느껴지는 좋은 냄새였다. 마음의 벽을 뚫고, 무언가 사방연속무늬 같은 것이 창공을 향해 터져나갔다.

*5. 119
그런 기분이었다. 아아, 좋아. 좋아, 좋아. 그 순간 한 인간의 좋은 기분이 온 우주를 도배하고 있었다.

6. 253
그때 파리 같은 것이, 아니 벌 같은 것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아주 시원하고 더없이 깨끗한 공기가, 하늘의 파편처럼 뇌 속으로 스며들었다.

7. 258
어느새 신경안정제는 나의 주식이 되었다. 인간이 별게 아니란 생각이 그때 들었다. 맞으면-아프고, 뉘우치고, 숙이고, 무섭고, 궁리하고, 포기하고, 빌붙고, 헤매고, 재빨라지고, 갈라지고, 참담하고, 슬프고, 후련하고, 그립고, 분하고, 못 잊고, 죽고 싶고, 쓰라리지만 이를테면 몇 알의 약, 그 미약한 몇 밀리그램의 화학물질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었다.

8. 306 해설 신수정(문학평론가)
박민규가 "네 번의 이직 끝에 결국 사표"를 내고 "내친 김에 빚을 얻어 노트북"을 산 뒤 "삼천포"로 가서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모월 모일 이전의 많은 시간, 즉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언젠가 소설을 쓰리라, 혹은 쓸 수밖에 없으리라 막연히 짐작만 하던 그 시간 동안의 문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80년대의 문학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이었다.

9. 작가의 말
결국 인간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 같은 건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 한 조각의 빵을 당신에게 바친다. 아니 바친다기보다는, 당신의 냉장실 중앙에 조용히 내려놓았으면 한다. 겨우 한 조각의 빵을 만들었다. 더 열심히 쓰겠다.


***
인간이었을 거야. 물론 힘들었을 테지.

***
사람의 입에서도 무지개가 나올 수 있을까요?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봄볕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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