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
혼돈에 처한 사람들이 흔히 겪게 되는 현상 중 하나는 종종 특정 단어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짧은 시기 동안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 단어를 여러 번 듣거나 읽게 된다. 그 단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다만, 사람의 감각들이 열리고 나면 아주 신비하게도 언어의 조각들이 기호들을 끌고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두드러져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자적 데자뷰에 대한 설명이 어떠하든...

2. 48
나는 그런 타입의 여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술 분야의 초라한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교활한 남자들에게 과장된 호감을 표시하는 부류의 여자. 자신은 정숙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자신이 처한 존재의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남자와 어울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 51
"아, 그가 해머스미스의 우리 집 근처에 살아요. 앞으로 어찌될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들한테까지 너무 호의적이라서 문제라니까요. 아직 누군가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기술은 터득하지 못했나 봐요. 남들한테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게 두려워서인지 나는 누구에게나 늘 호의적이죠."
"당신은 모든 이들이 당신을 좋아하기를 바라나요?"
"당신은 아닌가요?"
"누구나 그렇긴 하죠."

4. 63
"카뮈도 그렇고 베케트도 그렇고 스포츠를 정말 좋아했대요. 카뮈는 알제리 축구팀 골키퍼였고 베케트는 위즈덴 팀에 있을 때 훌륭한 크리켓 선수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글쎄, 재밌잖아요.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하던 사람들이 스포츠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몰두했다니. 내가 보기엔 그거야말로 진짜 무의미한것들인데. 스포츠가 의미 있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벌써 삶이 무의미한걸요."

5. 71
이사벨은 자신의 탯줄을 '톱'으로 잘라버리고 싶었다고 하지만, 자신의 가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리라.

6. 93
이사벨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와 구별되는 뚜렷한 점은 그녀가 사용하는 표현과 말의 리듬이다. 나는 이사벨의 언어적 개성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라디오에 나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영역의 영어였고, 문법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단어나 구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7. 96
루시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별로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대화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자기 수준보다 낮은 주제들에 대해서도 습관적으로 움츠러들곤 했다. 사람들이 수상의 정책에 관해 토론하면 루시는 수상은 머리를 어떻게 빗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걸 했고, 최근 출간된 소설에 관해 얘기할 때는 책 겉표지가 저자의 눈 색깔과 잘 어울리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8. 103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든 것들이 계속 타인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녀가 갖게 되는 태도, 두려움, 경험은 틀림없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사벨의 감수성을 덮고 있는 방어막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제 대화 중에 엄마가 쏟아내는 독설도, 런던 거리의 택시기사들이 하는 거친 이야기들도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돼 그런 일에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 표피 아래에는 오래된 상처들이 여전히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멀리서 보면 우스울 정도로 사소해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주 심각할 수 있다.

9. 156
"발톱을 깎는다는 것은 아주 사적인 일이잖아. 발톱이 발가락 위에 놓여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일단 깎이고 나면 쓰레기가 되잖아. 그 순간 사적인 것이 되는 거지. 그냥 누군가의 머리칼을 보는 것과 욕실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
"발톱 깎는 일이 섹스보다 더 친밀한 행위라고?"
"앞에서 태연하게 발톱을 깎아도 민망하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섹스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
친밀해지는 것은 유혹과는 정반대의 과정을 거친다. 친밀함을 보인다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비호의적인 판단-사랑할 가치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이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혹이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 또는 가장 매혹적인 정장차림을 보여주는 것 속에서 발견된다면, 친밀함은 가장 상처받기 쉬운 모습 또는 가장 덜 멋진 발톱 속에서 발견된다.

10. 164
아이들에게 비밀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들이 낯선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고, 그들이 행동하고 느낀 것들을 아주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인생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에는 비정상적이고 부끄러운 행동처럼 보였던 것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임을 깨닫게 되며 비밀을 훌훌 털어버린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비밀을 폭로하는 경향이 잔인함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그것을 듣고 있는 이방인에게는 사적인 것일지라도 실상은 일상의 영역-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에 포함된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11. 239
누구나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버리면 더 이상 자기를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누군가가 우리에 관한 모든 사실을 다 알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놓여 있다. 그것이 비밀 누설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주범이다. 거리 한복판에 발가벗겨져 있는 꿈 혹은 혼잡한 공항의 난리법석 속에서 여행 가방의 내용물이 쏟아져버리는 꿈을 종종 꾸곤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12. 291
이사벨은 선과 악의 종교적 분배에 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과거에 저지른 악행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고통을 겪는 것은 행운을 불러일으킬 준비를 하는 과정이라고 믿기도 했다. 즐거운 세 가지 사건-직장에서 성과급을 받거나, 멋진 옷을 사거나,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이 있고 나면 어김없이 운이 곤두박질쳐서, 지독한 감기로 일주일간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누워 있곤 했다. 그러니 행운은 동시에 불운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코를 훌쩍거리며 행운의 오만함을 겸허히 받아들였으며, 그러고 나서는 또 다시 웃음을 되찾고 행운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납부한 세금을 환급받는 것처럼,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답장처럼.

13. 331 옮긴이의 말
이 소설은 이사벨이라는 한 젊은 여성에 관한 전기이며 보고서다.
...
작품 속에는 세 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이사벨이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화자가 들려주는 이사벨의 이야기, 화자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 반복되며 작품 형식도 이에 따라 소설에서 전기로 전기에서 인문학적 에세이로 에세이에서 다시 소설로 바뀐다.
...
이 책의 원제 "Kiss & Tell"은 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뜻한다.


***
귀고리 / 귀걸이
우리는 잠시 후에 문 쪽 구석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괴상망측한 요리
뒤치다꺼리
어른이 돼 그런 일에
후텁지근한 날씨
고생깨나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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