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
우리는 대개 무엇을 얼마나 더 가질 수 있느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 갈망이 실제로 채워지지 않았을 경우엔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하며 앞만 보고 내달린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부나 명성만큼 다른 누군가는 그 결핍에 고통받고 힘들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애써 외면한 채 말이다.

2. 72
나는 입이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이 떨린다는 것은 외과 의사가 본능적으로 환자를 놓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럴 때는 무엇보다 나를 추슬려야 한다. 의사가 무너지면 환자는 바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3. 135
누구에게나 지독한 한 시절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지독함도 시간이 흐른 어느 순간엔 아름답게 변하곤 한다. 50년을 뛰어넘은 어느 노부부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4. 140 나환자
인간의 역사랑 이렇게도 가혹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같은 병에 감염될지도 모르면서 지금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박해하고, 내가 오늘 두 다리로 멀쩡히 걷는다고 해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것이 우리들이 아니던가. 인생은 내일 아침에 숨을 쉰다는 보장이 없는 것임에도, 우리는 너나없이 진시황의 불로초라도 손에 넣은 듯 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5. 155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수 많은 약들. 하지만 이 약들 중에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아무리 의사라도 마음의 병까지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6. 163
사람이 죽고자 하는 결심을 하는 데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그것이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개선될 기미가 없을 때, 잠이 들면 잊히지만 눈을 뜨면 다시 그 고통이 엄습할 때 사람들은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판단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경우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 불행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7. 175
"세상에서 젤로 무서운 게 먼지 아니껴? 총알은 안 보이고 폭탄은 어차피 운이라 눈이 뒤집히면 하나도 안 무섭니더. 제일 무서운 게 착검하고 육박전하는 기라요. 서로 벌건 눈을 마주보고 칼로 찌르고 막 기리대는데, 그때는 내가 못 기리면 상대가 나를 기리뿜니더. 무조건 죽기살기로 총검을 휘두르는 깁니더. 육박전이 끝나면 바지에 오줌이 줄줄 흐르니더."

8. 183
평일 낮 고속도로를, 그것도 모든 규칙을 준수하며 안전하게 운전하던 자기에게 난데없이 중앙선을 넘은 트럭이 돌진하고 그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배에는 30센티미터 길이의 수술 자국이 나 있고, 옆구리에는 네 개나 되는 드레인 호스가 끼워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중한 다리 한쪽이 사라져버렸을 때, 과연 어느 누가 그 상황을 운명이라도 순응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무려 한 달간을 팬텀현상(유령현상)에 시달렸다. 인간에게 바디이미지란 무서운 것이다. 인간은 뇌의 기억 단위 안에 스스로의 바디이미지를 치밀하게 저장하고 있다.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몸의 일부가 사라져버리게 되어도 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9. 224
대개 혈압이라는 것은 주로 심장이 펌프질을 하는 압력에 의해 좌우되며, 심장이 피를 모아서 힘차게 짜주면 그 압력으로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 곳곳으로 피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장박동이 힘차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현상이 있는데, 이를 심세동이라고 한다. 심장마비 환자에게 전기충격기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심세동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10. 244
얼굴 색깔이 검어지고 눈에 황달기가 보여 검사를 한 결과 만성간염에 이은 간경화였다. 이 병은 대단히 무서운 병이다.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하고 좋은 섭생과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그에게 일을 그만둘 것을 권해야 했다. 간염이 동반된 간경화 환자가 과로를 한다는 것은 매일 독약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11. 282
진료를 하다 보면 환자들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고학력에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표정이 심각하고, 오히려 소외되고 어려운 분들이 병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
이것도 분명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적 엔트로피의 문제일 것이다. 엔트로피는 열역학법칙에 따르면, 폐쇄계에서 에너지를 계속 소모하면 결국 그만큼 쓰레기가 쌓이므로 외부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결국 수명을 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자체 화석연료를 계속 쓰면 언젠가는 쓰레기만 쌓여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정은 어떻까. 소위 이성으로 해결해야 할 대단하고 복잡한 문제들의 포로가 되어 '고상한 척'하고 사는 사람들은 정신 에너지의 고갈로 뇌 속에 찌꺼기만 쌓여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솔직하게 노동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성적'이라는 이름의 '어색한 노동량'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으로써 뇌 속 기쁨의 센서가 낮게 세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행복의 총량은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은 것일까.

12. 이 책에 부쳐 - 김근태
오래 전에 어떤 스님께서 자비심이란 "나를 상대와 똑같이 낮추어 상대방의 슬픔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생각납니다.

***
그럴 때는
손에 넣은 듯
수 많은 약들
무서운 게
결심을 하는 데는
진료를 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감소함으로써 뇌 속 기쁨
오래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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