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의 말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을 한번도 사랑해 보지 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한, 나는 내가 살았던 시절들을 단 한번도 사랑해 보지 않았고, 그 시절들 또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던것만 같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세상은 참 지독하구나, 모질구나.

2. 19
나는 때로 삶이 거짓말 같은 때가 있다. ...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아, 설워 말아라. 나는 노래 부른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인생들아, 슬퍼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백죄 그러지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입 좀 닥쳐라.

나는 이제 와 고백하건대, 나도 정말 이 세상 태어나 예술 한번 하고 싶었다. 예술.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소원이던 예술을 이제와 포기하려 한다.

3. 29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좋은 것이 지금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게 하는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30
맛있는 사과를 혼자 먹으면 단순히 사과일 뿐이지만 지금 배고픈 자에게 나누어주면 사과가 사랑으로 변신할 수도 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좋은 것은 늘 그러잖아도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가더이다.

4. 38
전기도 나간 깜깜한 마을에, 모든 집들이 헐려버린 빈 마을에 최씨집만 섬처럼 남아있는 저녁, 최씨는 내일의 철거에 맞서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소주병과 농약병을 각각 양옆에 끼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가을 밤바람은 시렸다.

5. 42
그들에게 정녕 화학조미료는 친구가 말하듯 해악만을 끼치는 무서운 독으로만 작용하고 있는가. 일에 지친 사람들도 천연조미료 좋다는 거 다 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 만들어 먹을 여력이 그들에겐 없다는 데 있다. 밤늦도록 제 몸 다녹여가며 일하고 돌아와 언제 멸치 갈고, 마늘 말려 빻고, 양파 버섯 따위 재료를 섞어 만들 재간과 시간이 그들에겐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미료 치지 않은 음식을 일에 지쳐 깔깔한 입에 넣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6. 54
그곳에는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이 나라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다. 그곳에도 사랑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은 해도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무국적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불법체류자 혹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그래서 사랑은 하더라도 결혼은 하지 않으며,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7. 55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랑들은 거의 젊고 신체 건강한 미혼 남녀의 사랑이다. 돈과 인위적 장치와 구조와 편견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섹스를 할 권리, 사랑할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켠에서는 또 과잉의 섹스, 과잉의 사랑이 넘쳐나고 있다.

8. 76
내 주변 사람들만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내 세대 중 많은 사람들이 30대도 훌쩍 넘어 40대의 고개에 올라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들이 20대였던 80년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20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30대도 아니고 40대도 아닌 여전히 20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어찌 보면 20대에서 더 이상의 나이먹기를 멈춰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

9. 84
내가 먹고 살 만해진 것을 그다지 속 편하게 받아들일 일만은 아니라는 것. 이 나라의 현실은 어쩌면 너무나 얇은 종잇조각 같은 현실인지도 모른다. 팔랑 뒤집어지면 바로 뒷면이 나오는 종잇조각일 뿐 아니라 너무나 얇아 뒷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들여다보여서 그 뒷면의 현실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런 현실 말이다. 구멍이 나면 걷잡을 수 없는, 너무나 아슬아슬한 현실을 이 나라 사람들은 오늘도 간당간당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10. 88
어떤 한 시절, 혹은 어떤 한 순가들이 유독 명료하게 내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이란 대개 '살기 위해 애쓰는 순간'들이다. 그야말로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11. 90
삶에 진실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은 평온해진다.

12. 91
나는 어쩐지 가난은 가난이고 빈곤은 빈곤인 것만 같다. 가난은 그래도 어느 정도 '숨 쉴 구멍'이라도 있지만, 빈곤은 도대체 그 어떤 대책도 없는, 가난은 가난해도 어딘가 따스한 기운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빈곤은 그야말로 삭막 자체인 것 같은.

13. 100
그 말인즉, 마음이 큰 사람은 작은 일에까지 마음을 쓰며 자신도 모르게 혹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나, 말하자면 남을 세심하게 배려하지만, 마음이 좁은 사람들은 그저 큰 것만을 바라며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아무렇지 않아하며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14. 131
우리는 살면서 그런 경우를 무수히 경험하게 된다. 어떤 경우인고 하니, 한쪽에서는 무심히 한 말이거나 행위이건만 말을 듣는 사람이나 행위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 되는 경우 말이다.

15. 137
가정이 평안하지 않으면 가족구성원들은 채워지지 않는 평화에 대한 결핍감이 분노가 되고 증오가 되어 바로 그 분노와 증오감의 표출대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찾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사랑해야 할 가족들끼리 불화하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결국 가정이 해체되는 결과를 맞기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론하는 것조차 버거운 각종의 사건사고들도 어찌 보면 그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에게 채워주지 못한 결핍감의 한 극단의 형태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16. 154
내 직업이 글 쓰는 일이 아니었을 때 나는 이따금 글 쓰는 사람들이 글을 쓸 때 내 글이 내 글을 읽는 사람들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수용될 수 있는 글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검열해야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의 글을 검열하게 하는 현실이 슬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막상 내가 글쓰는 사람으로서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자기검열'에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이란, 다른 당혹감이 아니라, 스스로가 움츠러드는 데서 오는 당혹감이었다.

다시 말해 그 누군가가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속에 아직도 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 남의 눈치를 보는 뿌리 깊은 습성이 남아 있어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7. 165
아는 사진작가분이 그랬다. 그이는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데,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억장 무너지는 사연을 가졌거나 그런 환경에 처해져 있는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고.

18. 166
오늘은 사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영상매체로 대표되는 매스컴이 드러내 주는 정보만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 205
혹 내 직업에 충실하느라 세상을 망가지게 하거나 나 자신이 망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망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진짜 망가진다는 것의 의미는 돈을 못 벌게 되는 상황보다도 더 이상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조차도 없는 삶을 이르는 것일 터이다.

20. 253
견디기, 그러나 품위 있게

21. 261
박수근의 소박한 그림이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팔렸다고 한다. 그 그림을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야말로 그림에 나오는 나목처럼 벌거벗은 삶을 한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일까.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남루한 삶은 이제 어느 부호의 집 거실 벽에 말 그대로 한 점 풍경화로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을까. 누구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 누구에게는 풍경이 되는 이 기막힌 전도라니.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자신들의 상처를 직시한 예술을 외면하고, 아니 외면할 수밖에 없고, 부자들은 가난이 아니라 가난한 풍경을 돈 주고 사는 것이다.

22. 273
김성칠 선생의 일기 중
"말로나 글로나 수다를 떨지 말 일."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제 잘한 일을 입 밖에 내거나 붓끝에 올리지 말 일."
"쓰기보다 읽기에, 읽기보다 생각하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