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 1945년 초여름의 햇살이 잿빛으로 흩어지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새벽 거리를 우리는 걷고 있었다. 아른거리는 태양이 뿌옇게 흐려진 화관 모양으로 산타 모니카 데 람블라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다니엘, 오늘 네가 보게 될 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얘기해선 안 된다." 아버지가 주의를 주었다. "네 친구 토마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이다."

2. 13
"이곳은 신비한곳이야, 다니엘. 일종의 성전이지.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의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3. 56
내 문장은 창장력의 빈곤을 드러냈고 은유적 비약은 전차정거장에서 읽곤 하던 발에 좋은 거품 목욕 광고의 그 비약을 상기시켰다. 나는 그 잘못을 연필로 돌렸고 나를 문호로 만들어줄 그 만년필을 갈구했다. 아버지는 자랑스러움 반 걱정 반으로 내 작품의 기복 있는 진행을 주시했다.
"네 이야긴 어떻게 돼가니, 다니엘?"
"모르겠어요. 그 만년필만 있으면 모든 게 달라질 거 같아요."
아버지 말에 의하면 그건 잘나가는 문인들이나 하는 변명이었다.
"넌 계속해서 쓰기만 하거라. 네가 그 처녀작을 끝내기 전에 만년필을 사줄 테니까."

4. 71
그녀 생각에 바르셀로는 마음씨는 좋지만 너무 책을 많이 읽어서 산초 판사처럼 뇌가 썩어버린 사람이었다.

5. 182
"라디오에 방송될 소설말인가? 아이고, 참 좋았겠군. 이상할 게 하나도 없지. 안 그런가? 걔는 어려서부터 동네 꼬맹이들에게 이야기를 잘해주었었어. 여름에는 가끔씩 우리 이사벨리타와 사촌들도 그 애 이야기를 들으려고 밤에 슬래브 지붕으로 올라가곤 했었다니까. 애들 말로는 걘 절대로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더군.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죽은 사람이나 영혼에 대한 것이었던 건 사실이야.

6. 205
아이는 농담을 특히 좋아하고 그림자가 없는 곳에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는 깊은 시선을 가진 아이였다.

7. 209
그들은 너무나 말을 안 한 나머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할 언어를 잊어버렸고, 그 끝없는 도시의 많은 지붕들 중의 하나 아래서 함께 사는 타인들로 변해버렸다.

8. 262
그녀가 불안하게 웃었다. 그녀 주변에 고독이 불타고 있었다.
"당신은 훌리안과 좀 닮았군요."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시선을 두는 방법도 몸짓도. 그는 당신처럼 했어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 바라보면서 잠자코 있곤 했죠. 그럼 나는 바보처럼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들을 얘기하고...... 뭘 좀 드릴까요? 밀크 커피?"

9. 265
그는 매우 신중하고 가끔씩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흥미를 접어버린 것 같았어요. 카베스타니 씨는 그를 아주 수줍어하고 꽤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내가 볼 때 훌리안은 과거에 사는 사람 같았어요. 자기 추억에 갇혀서 말예요. 그는 개인적인 내밀함 속에서 살았지요, 자기 책을 위해서. 마치 호화로운 수감자처럼 그 책 안에서만......

10. 282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11. 298
"그래. 너희 아버지 같은.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그런 남자 말야.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면서도 또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그런 남자 말야. 아들이 그냥 자기 아버지이기에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 말고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감격해하는 그런 남자.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 말야."

12. 318
돈이란 바이러스와도 같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영혼을 부패시킨 다음에는 신선한 피를 찾아 떠나니까.

13. 319
"가난한 이들이 자기들을 해코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부자들을 본받고 싶도록 만드는 거지. 그것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독인데......"

14. 366
"내 말을 들어봐. 그 여자애를 찾으러 가. 인생은 화살처럼 날아가거든. 특히 살 만한 부분은 더 그렇지. 벌써 그 신부가 말한 걸 들었잖아. 전광석화 같은거야."

15. 388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난 아무것도 우연히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모든 일들의 밑바닥에는 비밀스러운 계획이 있는 법이지. ... 모든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 무언가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1. 92
"모자라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겁쟁이들은 침묵하며, 현명한 이들은 이야기를 듣지."

2. 97
"그들 사이에 있을 수 있었던 불화는 중요하지가 않아요. 죽음이란 모든 이들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법이거든. 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좋은 것만을 보거나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지요."

3. 192
"난 아무리 애를 써봐도 그 애가 어렸을 때밖에는 기억할 수가 없어. 어려서 그 앤 아주 말이 없었지, 알지? 그 앤 모든 걸 사색적으로 바라봤었고 전혀 웃질 않았어. 그 애가 가장 좋아했던 건 이야기책이었지. 항상 나한테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어. 어떤 애도 그렇게 빨리 글 읽는 걸 배우진 못했을 거야. 그 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백과사전을 쓰고 역사화 철학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지. 그 애 엄만 그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했었어. 누리아가 나를 존경해서, 자기 아버지가 책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책을 쓰고 싶어한다고 말야."

4. 194
그녀의 아담하고 정갈한 글씨가 그녀 책상의 청결함을 기억케 했다. 마치 삶이 자기에게 허용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평화와 안정을 그녀는 언어 속에서 찾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5. 197
인생에는 다만 후회가 있을 뿐 두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단다.

6. 249
가끔씩 나는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 구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하곤 했어. 마치 그저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그에겐 가장 소중하다는 듯이 말야.

7. 269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있는 거다, 훌리안. 비록 그걸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말야."

8. 270
꽃행상이 며칠 전에 봤다고 기억하는, 티비다보 애버뉴의 그 저택을 배회하던 사람이 포르투니였지. 그 꽃장수가 '성질이 더럽다'고 해석한 것은, 안 하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하는 것이 나은, 인생의 목표를 발견해서 그걸 추구하여 헛되이 낭비된 시간을 메우려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긴장에 다름 아니었던 거였어.

9. 273
"우리가 했던 계약을 기억해. 내가 죽으면, 내 모든 것은 네것이 될 거라는 계약을."
"...... 네 꿈을 제외하고."

10. 289
나는 분노와 상실감으로 수척해진, 생명 없이 공허한 그의 눈을 보았지. 나는 그 증오의 독이 서서히 그의 혈관으로 번져가는 것을 느꼈고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어.

11. 308
그러나 몇 년이 평화롭게 흘러갔어. 세월은 공허할수록 더 빨리 지나가지. 의미 없는 삶들은 너의 역에 서지 않는 기차들처럼 너를 스치고 지나가는 법이거든. 그러는 동안, 전쟁의 상처들은 필연적으로 아물게 됐지.

12. 328
언젠가 훌리안은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지. 오래전부터 훌리안은 자기가 이성을 잃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어. 미친 사람이 자기가 미쳤다는 걸 알까? 아니면, 미친 사람들이란 망상적인 자기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신의 비이성을 납득시키려는 사람들일까?

13. 331
아마도 내가 쓴 이 많은 페이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언제나 네 안에 내 새로운 친구가 있다는, 너만이 내 유일한 희망, 진정한 희망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것 같아. 훌리안의 모든 글 중 언제나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것이, 사람은 기억되는 동안에는 계속 살아 있는 거라는 말이지. 그를 만나기 전 수년동안 훌리안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를 알고 또 누군가를 신뢰한다면 그게 너일 거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나를 기억해줘, 다니엘, 비록 한 귀퉁이에 숨겨서라도. 나를 떠나보내지 말아줘.

14. 335
현관을 나섰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내 숨결에 머물렀다 사라지는 빛의 게으른 눈물이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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