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
재일조선인 가정을 살펴보면 많든 적든 공통점이 있는데, 가령 우리 부모님처럼 자식들이 책만 읽고 있으면 기뻐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책을 사야 한다는 말만 꺼내면 부모님은 조건 없이 용돈을 주셨다.

2. 43
독서에 열중할 때면, 나는 식사 중에도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는 '밥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이때 어머니는 "밥을 먹든지 책을 읽든지 한 가지만 하려무나" 하고 가볍게 꾸지람하시면서도, 내가 종알종알 책의 내용을 재잘거리기라도 하면 재미있다는 듯 말벗이 되어주셨다.

3. 88
작은형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근처 책방에 들어가서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꼿꼿이 선 자세로 끈질기게 책을 읽어댔기 때문에, 결국에는 책방 주인아저씨도 백기를 들고 작은형에게만큼은 항상 의자를 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이 에피소드를 유달리 좋아하셨다.

4. 132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5. 133
이 책 역시 지금은 내게 없다. 본인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막내형이 언제부턴가 자기 책처럼 들고 다니며 애독하나 싶더니, 한국으로 유학을 떠날 즈음 가져가버렸다. 그러다 1971년 형이 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 조사 당국에 압수당해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6. 146,147

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이렇게 어머니와의 힘겨운 줄다리기에서 승리하고 나면 나는 신명이 나서, 서둘러 보고 싶은 책을 네댓 권 가져와 쌓아두었다. 아무 간섭도 받지 않으며 책을 읽었다. 공부가 아니었다. 오로지 즐거움이었다. 바꿔 말하면 단순한 '도락'이었던 것이다.

7. 172
루쉰의 슬라이드 사건, 그것은 크든 작든 나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교실 안, 일본군에 참수되는 중국인의 모습을 과시하듯 투사하는 영사기, 그리고 거기에 야비한 갈채와 환호를 던지는 일본인 학생들 틈자구니에서 청년 루쉰은 그 얼마나 외로이 굴욕과 비분을 삼키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상황과 비분, 나아가 침략전쟁의 승리를 자랑하는 수많은 일본인들을 향한 혐오와 거부의 감정.

8. 174,176
이렇듯 어수선한 와중에, 내가 대학 3학년이 되던 1971년 봄, 한국에 유학중이던 둘째형과 셋째형이 한국 정부에 체포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학원에 침투,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스파이 체포되다"라는 제하의 신문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
그 뒤부터는 두 형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재판이 종결되고 두 형이 각각 무기형과 7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자 형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9. 226
데우스엑스마키나 Deus ex machina
소설과 희곡, 영화 등 모든 서사의 종결부에서 갑작스레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인위적이며 부자연스러우며 안이한 방식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고전극에서 자주 활용되던 극작술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인공이 궁지에 빠졌을 때 기계장치로 만든 신이 갑자기 등장하여 위기를 타개하고 주인공을 구원하여 결말을 맺는 연출방식인데 이 수법은 중세의 종교극에 이용되면서 일반화되었다.

10. 저자 후기
한국의 1960년대는 4.19혁명을 기점으로 촉발된 반독재민주화투쟁의 10년이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20년째 되던 1965년, 한일협정으로 말미암아 한국사회는 또다시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내가 조국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내가 '민족'과 해후하게 된 시절은 바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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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10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해짐님의 밑줄 재밌네요.
꼼꼼한 독서 좋아보입니다.

진진 2005-03-1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심하게 거대하다지요. 밑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