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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마스터 ㅣ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3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매 작품마다 젤라즈니의 안내를 받으면서 그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참 폼나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의 안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여행을 떠났으니 내게는 예기치 못한 선물이었다. 단편집을 모두 보고 난 후에는, '종합선물세트' 같다고 하면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 오히려 내가 얼마나 신이 났는지 도통 전달이 안 될 것 같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애인이 크기도 다양한 색색가지 보석이 가득 담긴 보석 상자를 줬는데, 그냥 준 게 아니라 보석 하나하나에 그 보석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이며 당신에게 이런 의미를 지녔으면 좋겠다고 예쁘게 봐달라고 하는 메모를 달아서 줬다고 해야 하나.
- 젤라즈니의 재기 넘치는 데뷔 직후 단편들
'제군의 데몬을 믿으라'고 말하며 시작하는(이 넘치는 자신감이라니!) 그의 데뷔작 <수난극>을 시작으로 <기사가 왔다!>,<스테인리스 스틸 흡혈귀>,<끔찍한 아름다움> 등 그의 초창기 단편 넷이 연달아 진행된다. 역시 젊은 시절에는 짧은 호흡이 톡톡 살아 숨쉬는 단편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수난극>과 <기사가 왔다!>는 젤라즈니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실감시켜주는 시적인 문장들이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와 어우러지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 <형성하는 자>, 단 하나의 약점을 가진 완벽한 자의 비극
그 다음으로 바로 이 책의 표제작인 <형성하는 자>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나는 바로 이 소설이 그렇게도 궁금해서, 이 단편집을 기다렸다. 신의 영역을 넘어가려고 했던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 소설의 전반부부터 암시되는 진한 비극의 오오라에 숨쉬기가 힘들었고, 마지막에 숨을 멈춘 채 결말을 보고서는 한참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그는 방심하기 시작했던 것인지,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렇게 굳건하고 강철 같이 보였던 자도 단 하나의 약점으로 철두철미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이렇게 극적으로 보여줘 버리다니. 다른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하루를 쉬어야 했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인상이 강렬했다. 문학적인 은유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따위 전혀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 <지옥의 질주>, 눈이 즐거운(!) 근미래판 헬라이드
다음 날,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젤라즈니 인생 중 암울했을 때 썼다는, 어쩌면 자기 위로를 위해 썼을 것만 같은<지금 힘이 오느니>, 투우가 아닌 투차를 한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단차>를 보면서 한숨을 돌리고, 또다른 묵직한 중편 <지옥의 질주>를 시작했다. 읽으면서 영화화되면 멋지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이미 나와있는 모양이다. 작가는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지만. 차를 몰고 폭풍우와 온갖 괴상한 생물들을 뚫고 가는 모습이 영락 없이 근미래판 헬라이드였다. (읽으면서 헬라이드 생각이 나지 않는 당신은 <앰버연대기>를 안 읽은 사람임.) 주인공은 이기적이고 막 살아가는 인생이면서도 적당히 세상 생각은 할 줄 아는 B급 나쁜 남자의 표본 같지만 그의 자동차 몰아가는 솜씨와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특A급이다. 매우 유쾌하면서도 눈이 즐거운(!) 중편이었다.
-. <복수의 여신>, 세 사람은 완벽한 팀!
젤라즈니의 전형적인, 서정적 러브 스토리 <보르크를 사랑한 여자>를 보며 다시 한 번 또 쉬어가고, 이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보석(이것은 정말 내가 예상하지 못한 보석이었다) <복수의 여신>을 만났다. '은하계 내 149개 거주 행성에 존재하는 열아홉 명의 초능력자(여기서 그만 크게 웃었다)'중 한 명이 등장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데다가, 무려 지리학의 대가 및 암살의 대가라는 사람들이 한 팀이 되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완벽한 팀이지 않소, 사기요!'라고 생각하다가 이들이 완벽한 팀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지막에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젤라즈니, 당신 이런 식으로 카운터 펀치 먹이기요!!!
-. <마음은 차가운 무덤>, 냉동 삶을 사는 시인의 노래
젤라즈니가 시간 여행을 소재로 쓴다면 어떤 장편이 나올지 더욱 궁금해지게 만드는 <피와 흙의 게임>, 짧은 길이에도 주인공이 일을 저지르는지 아닌지 가슴 졸이면서 읽은 <상은 없다>, 역시 짧은 단편이면서도 식은 땀 흘리게 만드는 <혹시 악마를 사랑하시는 분?>까지 다시 한 번 단편의 짜릿한 맛을 느낀 후에, <마음은 차가운 무덤>을 봤다. 냉동 인간이 되었다가 몇 년에 한 번씩 깨어 그 시대를 즐기는(냉동되었다가 깨어나서 하는 일이 파티 밖에 없다니!), 어찌보면 나른하고도 익숙한 설정인데, 여기에 젤라즈니풍 로맨스가 가미되었다. 시인은 노래한다. '사랑이 죽음을 법랑처럼 두른 그 곳으로 개들은 기어들어가서 죽는다...' 이런 식으로 시대의 흐름에 전혀 동화되지 못한 채 '세트' 안에서만 살아가는 냉동 인간들의 삶이 어떨지에 대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읊어주는데 오히려 이질적이다. 나는 어느새 무어의 시점이 아닌 엉거-시인의 시점에 동화되어 있었다. 죽음에 대한 경외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결말은 어느 정도 이 글이 로맨스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던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 불혹의 젤라즈니가 쓴 단편들
<가만히 있어, 루비 스톤>은 어느 정도 결말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일러스트로 표현되었다면 (그것이 어느 장면이었든지 간에) 충격 받았을 것 같다. (역자 해설에는 어느 정도 유머러스하다고 쓰여있는데, 도대체 어느 부분이 유머러스한 것인지.. 내가 잘못 읽은 것인지. 내게는 호러였다.) <하프잭>은 앞에서 읽은 <보르크를 사랑한 여자>와 유사한 주제/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보르크를 사랑한 여자>에 비하면 덜 로맨틱하고 그만큼 더 차갑다.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는 예전에 <전도서를 바치는 장미>에서 본 걸작. 다시 봐도 참 재미있고, <아발론 연대기>를 다시 읽게 싶게 하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젤라즈니가 40대 들어서 쓴 작품들은 역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20대의 풋풋함에 비하면 원숙미가 넘친다고나 할까.
-. 걸작선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구동토>
<그림자 잭> 장편을 읽은지 얼마 안되어서 그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그림자 잭> 단편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잭은 여전히 '나쁜 남자'다. 도둑이라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림자를 이용한 능력을 가진 남자라는 설정은 꽤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잭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단편도 꼭 읽어야 할 것이고. 걸작선의 마지막은 <영구동토>라는, 또 하나의 묵직한 소설로 (휴고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장식된다. 하얗게 펼쳐진 설원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그리고 동굴 속에서 남녀 네 명의 긴장감이 피부에 느껴지는 듯한 매력적인 소설이다. 다 읽고 역시 한 번 더 처음부터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책 표지에서 받은 인상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전에 나왔던 단편집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가 고색창연한 스테인드 글라스라면, <드림마스터>는 흰색과 검은색의 그라데이션이 물결치는 회색도시로 내게 기억될 것 같다. 자동차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많이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역자 해설에서 보고서야 젤라즈니에게 자동차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금은 상상할 수 있었다.) 기계적인 내용도 꽤나 포함되어 있는 것 같고. 그러나 회색이라고 해서, 화려함에 있어 결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뒤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회색보다는 은빛이라고 해야할까.. 그래 은빛으로 빛난다고 해야겠지.
읽으면서 계속 남자 시점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젤라즈니는 어째서 이렇게 남자주인공들만 좋아하는지 야속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여자들은 대체로 남자에게 목을 매거나 찌질하거나 너무 성스럽거나.. 하여간 수동적이거나 평면적이다.) 여자 주인공 시점의 이야기가 몇 편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작가에게 떼를 쓸 수도 없구나. 여자 주인공에게는 짜증이 나면서도, 읽기도 힘들고, 머리 속으로 한참 상상을 해야 그 장면이 그려지고, 왜 이렇게 어렵게 쓴 거냐고 투덜대면서도 이 사람 책이 나오면 계속 사 보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접한 젤라즈니 작품인 <앰버연대기>의 헬라이드를 본 순간 이미 중독되었던 것 같다.
<드림 마스터>가 출간된 이후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받아서 다 읽은 지금 이 순간까지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역시나 '눈이 즐겁다'는 최고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시간이었다. 심층적이고 어려운 이야기.. 잘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독자인 나는 중층적인 은유와 깊은 의미를 지닌 대립과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인 문장 같은 것들을 다 이해하고 있지 못해도 되겠지. 뭐,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 개중 한 두 가지는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것대로 내가 남겨둔 또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고. 일단은 젤라즈니의 화려한 문장에 되지도 않는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쫓아가야 했던 나의 머리에게 잠시의 휴식을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