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 불안 또는 회의에 관하여
필립 얀시 지음, 정영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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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얀시의 글은 편안하게 읽을 수 있고, 그 속에서도 나름의 감동과 도전, 그리고 일깨움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하다. 그렇다고 그가 가벼운 글들을 쓴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거운 주제와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다. 다만 읽는 이의 편에서 그가 싸움 끝에 얻어낸 사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풀어놓을 뿐이다.

좋은 씨앗에서 <비망록>이란 제목으로 펴낸 <I was just wondering>이란 책은 필립 얀시가 <Christianity Toaday>에 1983년부터 기고한 월간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칼럼인 만큼 이 책에서 매우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나온다. 중요한 건 이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필립 얀시가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 책은 그를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과 견해를 가져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신앙인들이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거쳐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까지 축적된 역사의 의미와 현재 발생하고 변화되는 급변하는 세태 등을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이야 말로 신앙적 지성의 능력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맹목적 신앙 내지는 보수적인 신앙의 도피성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에 대해 기독교는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필립 얀시의 글은 우리에게 먼저는 어렵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세상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할 것을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담겨 있다. 우주에 대해, 현대 과학 이론에 대해, 음담패설, 에이즈, 전쟁 기타 등등의 평소 우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렵게 생각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물론 필립 얀시가 이런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는 용감하다고 말해야 한다.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 총 44개의 칼럼이 있다. 그 속에 인간과 세상, 위인들, 성경 이야기, 내세에 대한 이야기들을 큰 주제가 담겨 있다. 내 부족한 기억력이 이 모든 이야기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독창적이 사고와 진지함, 그리고 성경적인 조망 등은 어떤 글 속에도 융해되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부족할 수는 있어도 그는 일관된 신앙의 관점에서 다양한 세상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내가 얼마나 무성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내 지성의 활동하는 영역은 얼마나 편협하기 짝이 없는지를...

필립 얀시가 세상 속에서, 성경 속에서 끄집어 낸 중요한 화두들을 더 깊이 음미해 보고 생각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만물박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기엔 난 너무나 연약한 갈대이니까. 하지만 나는 또한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야 함을 잊지말고 포기하지 말자. 무지로의 도피가 참된 신앙인양 생각하지 말고 내 게으른 지성을 일깨워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많은 것들과 더불어 씨름하도록 하자.

필립 얀시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를 본받아 나 또한 생각하는 신앙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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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사랑
빌 브라이트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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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전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지금은 주님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 그의 신앙 회복을 위해 책을 선물하고픈 마음에 서점에 들렀다. 여러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중에서도 빌 브라이트가 지은 <처음 사랑 First Love>란 책이 유독 내 마음을 붙들었다. 아마도 제목 그 자체가 마음에 와 닿은 모양이다.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을 선물하기는 뭐해서 먼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다른 이에게 줄 책으로 생각하고 나와는 거리감 있는 자세로 책장을 열었지만 이내 내 마음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국제대학생선교회의 설립자인 빌 브라이트가 생의 말년에 그것도 호흡이 곤란하여 산소통을 의지하여 연명하고 있을 무렵 쓰여진 책이다. 그만큼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픈 마지막 유언같은 애절함이 묻어 나오는 책이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독자로 하여금 기도하며 이 책을 읽을 것을 당부하고 함께 기도에 참여시킨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이 책을 읽을 때 저를 도우사 저를 향한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당신을 향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옵소서.” 


그는 한편으론 격려를, 다른 한편으로 충고로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할 것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간증적인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이런 말이 자신의 평생 삶 속에서부터 우러져 나오는 것임을 입증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첫사랑이란 젊은이들의 감성어린 표현 이상의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차츰 시들해지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사랑을 뜻한다.


1장과 2장은 본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첫사랑을 회복할 필요성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첫사랑의 회복은 단지 감상적 느낌 이상의 전인격적인 회복이다. 따라서 그는 본론 2장부터 5장까지의 내용에서 첫사랑 회복의 방법과 과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다음 결론부분인 6장과 7장에서 첫사랑이 회복됨으로써 오는 결과인 부흥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규장 출판사의 메인 광고는 다소 첫사랑의 감정을 자극하는 문구로 이 책을 어필하려고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오히려 논리적인 흐름을 띄고 있다. 그 논리적인 흐름인 전체적으로 요한계시록 2장 1-7에 나오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회복인 전인적인 것이기에 그는 머리, 마음, 영혼, 힘을 다한 회복으로 독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회복의 과정에서의 최고 정점은 다름 아닌 회개이다. 또 이런 회개가 일어나기 위해서 먼저 첫사랑의 기억과 그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후회가 필요함을 말한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일 것이다. 저자는 6장 부흥에서 이 비유를 드라마틱하게 풀어주고 있다.


“첫사랑!”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란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한 이후 지금까지의 내 삶 속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변화가 모두 긍정적인 변화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중에서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변해버린 것들도 있다. 나에게 있어 그건 분면 주님을 향한 순수하고 뜨거웠던 첫사랑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첫사랑의 회복을 말하기 앞서 나 자신부터 회복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첫사랑은 빠져버린 채 온갖 형식과 외적인 노력만으로 신앙생활을 이어나간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신자의 삶이겠는가를 깊이 되새겨 본다.

첫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순수란 그 안에 무언가를 더 첨가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그럴 때 오히려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은 단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첫사랑은 순수하게 지켜져야 할 것이 아닌가! 지난 날,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첫사랑을 간직하고 지켜나가지 못한 내 모습을 돌이키며,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죄를 회개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의 순수하고 일편단심한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바람을 안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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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09-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앙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시는 말밖에는 없네요. 그 친구분에게는 좋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성화와 기도 거룩한 삶의 실천 시리즈 3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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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님의 신간 <성화와 기도>를 읽었다. 언제 읽어도 저자 특유의 예리한 통찰과 섬세한 표현, 그리고 강한 도전이 김 목사님의 책에는 담겨 있다. 그런 성경적 강해나 주제별 설교를 통해 독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고 기도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을 이번에도 읽게 되어 참 기뻤다.

제목이 <성화와 기도>로 되어 있는데 개인적 의견으로는 <죄죽임과 기도>, 혹은 <열렬한 기도로 죄를 죽여라> 등의 제목에 더 내용과 부합할 것 같다. 왜냐면 성화에는 '죄죽음'(Mortification of sin)과 '은혜살림'(Vivification of grace)이 한 짝을 이루고 있는데, 본서는 주로 그 중 한 측면인 죄죽임과 기도와의 관련성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틀 안에서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저자가 죄죽임과 관련된 기도를 설명하면서 특히 강조하는 건 ‘열렬한 기도’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이러한 열렬한 기도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왜 열렬한 기도를 드리지 못하며, 이런 원인으로 인해 결국 신자의 영적 삶이 어떻게 비참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본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대목은 신자 안에 내주하고 있는 죄의 세력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죄의 깊은 잠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죄에 대한 무지이다. 그래서 저자는 은혜를 아는 지식과 함께 죄를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본서의 2장에서 보다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성화의 작용은 없이 그저 하나님과의 거래용 청구서 정도의 기도로 연명하고 있는 신자들에 대해 저자는 그들이 기도에 대한 너무 가벼운 견해를 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기도 제목에 대한 응답보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더 알아가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의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닌 신자 자신의 변화되는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죄죽임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써의 기도에는 열렬함과 지속성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의 겉모습은 있을지 몰라도 이런 열렬함과 지속성을 없는 기도에 익숙하여져 있는 모습에 가슴 아픈 충고를 들려준다. 이런 원인에 있어 열렬한 기도를 막는 영혼의 싫증과 지속적인 기도를 막는 육체의 게으름을 들고 있다. 이런 내용이 본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자세한 내용은 4장과 5장에 담겨 있다. 

결론에 이르러 저자의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간절히 외친다.

 

“아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마음을 드리는 기도 없이 살아왔습니까? 영혼의 싫증과 타협하고 육체의 게으름과 타협하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무위도식하며 살았습니까? 기도의 십자가를 지는 열렬함 없이 살아온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러한 나태하고 무기력한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돌아온 이득이 무엇입니까? 무너진 마음의 틀과 사라진 진실한 사랑과 진지한 소명감이 아닙니까? 우리는 단호하게 그런 삶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밑줄을 긋고, 나 나름의 생각들을 적어가면서 진지하게 읽은 책이다. 그만큼 숙고하며 읽어야 할 장중한 무게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는 내내 나 자신에 대한 반성어린 성찰이 나를 흔들어 깨움을 느낀다. 저자의 글이 구체적인 영역을 침투하여 내 삶에 들어옴을 느낀다. 그저 막연히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식의 느슨한 생각이 아닌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피폐한가를 절절히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총체적인 영혼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원인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나의 동의 가운데, 내 책임 있는 선택으로 자행되어 온 죄, 그래서 이젠 마치 그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주인인 양 거짓 행세하고 있는 죄가 원인인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죄에게 있지 않고 나 자신에게 있음도 알게 된다.

‘얄팍한 만족감을 떨쳐 버리자.’ 나는 스스로에게 외친다. 그것은 사람의 기준에서 바리새인들이 빠져 있었던 안도감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기도의 사람으로 칭찬 듣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실히 느끼는 필요는 기도의 삶 가운데 낮아진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기준은 현 시대에서 찾아서는 안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기준이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찾아야 하는 기준이다. 앞선 믿음의 거장들로부터 찾아야 하는 기준이다. 기도를 통해 저마다의 변화산을 체험했던 기도의 대선배들로부터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면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것이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라는... 그러나 그 자리는 내가 예전에 알고 누렸던 그런 피상적인 기도의 자리가 아닌, 저자의 표현대로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 우러나오는” 그런 기도의 자리여야 한다. 이것이 비단 나 자신만이 아닌 조국 교회의 성도들 모두에게 회복되는 기도의 자기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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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돈 키슬러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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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과개혁사에서 펴낸 따뜻한 신간이 나왔다. 서점에 진열된 무수히 많은 책들 가운데 유독 내 시전을 빼앗은 이 책은 바로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란 제목의 책이다.

이 책은 청교도가 누구인지, 그들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 왜 청교도 서적을 읽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청교도 초독자(初讀者)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책이다. 그 뿐 아니라 청교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고, 몇 권의 책들을 읽기는 했지만 보다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에게도 깊이 있는 청교도 연구를 시작하는 동기 부여를 해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가 청교도 서적만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미국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출판사의 설립자이며 대표란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청교도 분야에 관한 권위는 입증된다. 역자인 백금산 목사님이 말하는 현대 청교도 원전의 두 광맥이 바로 베너 오즈 트루스(Banner of Truth) 출판사와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란 점에서 이 출판사의 설립자이자 대표인 저자가 쓴 청교도 안내서인 본서는 그만큼 이 분야에서 권위 있는 책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읽혀지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용 면에서도 이 책의 구성은 매우 알차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수백 년 전 사람들인 청교도들의 작품을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의구심이 드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 충분한 이유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가 설명한 열 가지 이유들을 나 나름대로 재구성해서 같은 주제별로 묶어 보았는데 크게 5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청교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고양시켜 주고 2)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쳐 준다. 

둘째, 청교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 3)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도록 이끌어 주고 4)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셋째, 청교도는 성경과의 관계에 있어 5) 삶과 경건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을 보여주고 6)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여 준다.

넷째, 청교도는 죄와의 관계에 있어 7) 죄의 본성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가르쳐 준다.

다섯째, 청교도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과의 관계에 있어 8)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9)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지도록 도와주며 10) 성경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상의 10가지 이유들을 잘 살펴보면, 이것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무관한 주제가 아닌, 매우 적절하고 필수적이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서언에서 말했듯이 오늘날에도 이런 주제들과 관련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매우 피상적이고 얄팍하다. 때문에 아무런 영적 문제에 있어 별 도움을 못 주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같은 주제를 말하더라도 청교도들의 저작들은 얼마나 무게감 있게 그 주제를 써 내려가는 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영적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주는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어려운 것을 싫어하고, 사고하기 보다는 감각적으로 느끼기만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청교도들이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외면당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저작들이 내용의 길이에 있어 방대하고, 깊이에 있어 다소 난해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누군가 중병에 걸려 치료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 때, 만약 그가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는 처방을 해 줄 수 있는 용한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의사에게 찾아가기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자리에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의사가 다소 까다로운 진단 과정을 거쳐 다소 어려운 처방을 내린다 해서 그의 말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처한 영적 질병에 있어 청교도라는 영혼의 의사들은 만나야 하고 꼭 그들에게 찾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영혼의 질병을 다루는 그들의 작품들을 통해 도움을 얻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 자신이 참신한 도움을 얻은 이 책을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끝으로, 역자 후기에 실린 ‘청교도 계보와 저서들’도 짧은 지면에 청교도 역사의 흐름과 주요 인물들, 그리고 중요 저작들을 소개시켜 주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바라기는 이 책을 통해 청교도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그들이 남긴 진리의 보고들이 더 많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읽혀져서 한국 교회가 보다 건강하게 성장해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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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9-1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많은 청교도의 서적들이 번역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책소개 감사드립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
민경배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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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lood of martyrs is the seed of Christians!”

-Tertullian of Carthage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했던 옛 교부의 명언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말이 진리요 사실로 증명된 것을 주기철 목사님의 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껏 세계 교회사에서도 드문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 그 성장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 사람마다 교회 성장의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현재 우리의 노력과 열심만은 아니란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이들이 없었다면 복음의 왕성한 전파도 교회의 성장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암울했던 시대에 끝까지 복음 진리를 수호하여 생명까지 바쳐 지켰던 순교자들이 없었다면 한국교회의 맥도 중도에서 끊겨졌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가? 우린 단지 기쁨의 단을 거둘 뿐인데 말이다.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건 우리가 아닌데 말이다. 피 흘려 복음 진리를 지킨 건 우리가 아닌데 말이다.

마음의 숙연함이 생기는 건 그 때문이며, 깊은 감사가 우러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그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생명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애쓴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교자의 피의 강줄기가 흐르고 흘러 나에게 까지 왔고, 나는 바로 그 피의 복음, 예수의 피, 순교자의 피로 전해진 복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장차 올 영광, 부활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들 주기철 목사님이 그토록 모진 고난을 이겨내며 순교의 잔을 마실 수는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목회 초년 시절 주 목사님은 초량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부활 신앙을 각인시키려 애를 쓰셨다. 마산문창교회로 떠나기 3개월 전 그 해 봄에 잇따른 죽음의 사건을 계기로 많은 교훈을 얻은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만이 승리로 이끌고 부활의 영광을 얻게 하는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해부터 성가대로 하여금 부활절날 새벽에 구덕산에 올라 부활의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쓰러지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기 마련인데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을 오히려 부활과 승리로 나아가는 길로 삼은 것이 아닌가.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일반인과 신자의 차이, 신자 가운데서도  평범한 신자와 순교자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며, 죽음에 임하는 자세의 차이일 것이다. 물론 모든 신자가 주 목사님과 같은 부활에 대한 소망어린 믿음을 갖고 죽음을 불사할 담대함을 갖고 살아야 하겠지만 실상은 그와 다르다는 사실이 순교자를 바라보는 그런 신자들, 특히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의 피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이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희생이 그에 따른 열매를 가져다 줄 것을 알고 그 희생의 자리에 자신을 바친 순교자 주기철! 그분은 예수님과 같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뿌려져 죽었고, 그 고귀한 희생으로부터 오늘 한국교회는 이와 같이 수많은 열매가 맺게 된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이 넘쳐 난다.   


一 死 覺 悟

                                                      예수를 따라서 一 死 覺 悟

                                                          남을 위하여 一 死 覺 悟

부활 진리를 위하여 一 死 覺 悟


1935년 12월에 열렸던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 강사로 초청된 주기철 목사님은 마지막 날 그 유명한 “일사각오”의 설교를 하였다. 당시 신학생들은 물론 교수들까지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니 이 설교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것인가! 우리에게 전해진 설교문은 당신의 원설교와는 똑같지 않는 것이지만 김린서 목사님이 주 목사님 순교 후 작성한 것으로 나는 이 설교문만으로도 충분히 은혜의 도가니에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1929년 당시 주기철 목사님은 이미 당시 한국교회를 유혹하며 공격해 오는 신사참배의 문제에 대해서 강경하게 반대하며 노회에 <신사 참배 반대 헌의안>을 제출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신사 참배 반대 의지가 대외적으로 표면화된 최초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 선 목동 다윗과 같이 누가 보아도 비교가 안 되는 싸움이라 생각되었지만 그 결국은 성경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던 것처럼 주기철 목사님 또한 그렇게 승리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구국 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그 시절에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지키는 사명을 받아 싸운 것이다. 이미 오산학교 시절부터 민족애로 가슴이 뜨거웠던 주 목사님이지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나서 소명의 길로 들어서면서는 한 민족의 범위를 떠나서 지상에 펼쳐지는 사탄의 나라와의 대 결투에서 선봉에 선 용감한 장수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주 목사님의 1944년 4월에 순교하셨으니, 처음 신사 참배 반대 헌으안을 제출한 날로부터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순교자로서의 일념이 꺾이지 않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기 마련인데 이 위대한 순교자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믿음대로 살았고, 자신이 설교한 대로 죽었으니 이 얼마나 초지일관된 삶인가!

어떤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죽음을 맹목적 헌신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주기철 목사님의 삶에는 그런 종류의 맹목성은 찾아볼 수 없다. 평양신학교 사경회 때 한 설교를 보라. “일사각오”에 있어서 그분은 이것이 얼마나 자명한 이치인가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라 살려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짐이 없이 어찌 그분을 따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위하여 살거나 자기를 위하여 죽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하여 살고 죽는 것이 신자의 삶일 것인데 주기철 목사님에게 있어 일사각오의 뜻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란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도 일사각오는 필요한 것이라 말씀한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일생, 리빙스톤의 일생, 허드슨 테일러의 일생, 이 모두는 그렇게 남을 위해 일사각오한 고위한 삶의 표본이다. 그들을 존경해 마지않았던 주기철 목사님도 결국 그렇게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조국 교회를 위해 일사각오의 일생을 보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피로 지키고 전하기 위해 일사각오를 부르짖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부활 진리가 빠져 버리면 그것은 핵심적인 진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목숨을 바쳐 이 고귀한 생명의 진리, 부활의 진리를 지켜왔다. 그런데 일제의 핍박에 못 이겨 이런 고귀한 진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는가? 때문에 주 목사님은 부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던 것이다. 이렇듯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의 이면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진리에 대한 남다른 헌신이 죽음을 각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일사각오의 결심은 어디에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며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이런 투철한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이 얼마나 슬프고 부끄러운 모습인가?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주기철 목사님이 믿고 따른 예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면 한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 한 신랑을 받드는 신부로 우리의 충성과 절개는 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 깊이 뉘우치며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할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에게 순교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낯선 손님이 아니었다. 그분은 오히려 항상 죽음을 면전에 놓고 살았었다. 그래서 언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그분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으리라. 순교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매일의 삶을 죽음을 불사하는 각오로 삶아감이 없이 순교의 영광은 결코 나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이 외쳤던 일사각오의 신앙에 오늘 나의 삶이 변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내 삶을 다하여 그 진리를 드높이기를 말이다.  

  

기도의 종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의 영상을 따라가 본다. 한 밤 중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밝으며 바삐 무학산을 오르고 있는 주기철 목사님.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히며 부지런히 오르고 또 올라 도착한 그 곳. 어린 아들 영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올라 온 이 곳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목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초량교회 목회 시절에는 구덕산에 올라 기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구한 주기철 목사님은 다시 목회지를 마산교회로 옮기면서도 산에 올라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어떤 자잘한 문제에만 얽매이지 않고 늘 나라를 위하여, 섬기는 교회를 위하여,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주기철 목사님에게 있어 기도는 곧 호흡이었다. 이렇게 줄기 찬 기도가 없었던들 어찌 순교의 잔을 달게 마실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종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과업을 위해 그 쓰임에 합당한 일군을 선별하실 때, 어찌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을 사용하시겠는가? 이런 점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는 그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준비는 다름 아닌 온 산에 메아리치는 그의 부르짖는 기도였다.

예수님께서 보여 준신 모본을 따라 크고 작은 일에, 하나님께 메어 달리는 기도가 있었기에 인간적인 능력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짊어 진 것이다. 순교가 어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겠는가?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갈보리 산을 오르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다.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해 피땀 어린 기도를 드리셨다.

주기철 목사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았고 이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하늘의 자원을 애타게 구하였던 것이다. 그러했기에 많은 유혹 앞에 넘어지지 않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의 영혼은 흔들림 없이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 삶에는 그런 풍성한 기도가 있는가를 살펴본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에 쓰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언제든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말씀 하실 때, 드려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내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이다.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많은 기도의 종들과 달리 지금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얼마나 게으른가?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영적 능력의 결핍을 다른 것에서 메우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또한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며 돌이켜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평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훈련되고 준비된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자명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영적 군사인 신자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는 군대인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유능한 지휘관은 그 부대의 사열만 보고도 그 부대의 실력을 판단할 수 있다. 신자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도의 훈련에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은 큰 문제 중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기도의 종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할 귀감이 된다.

중요한 건 오늘 내가 그 모습을 본받는 것이고, 오늘 조국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리라. 교회의 역사를 보건대 언제까지나 평화가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평화의 시기가 있었다면 그 다음에는 전쟁의 시기가 있었고, 핍박의 시기가 있어왔다. 평화의 시기에 전쟁을 대비하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르는 환난과 핍박 앞에 기도로 준비되고, 기도에 전혀 힘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순교 교향곡을 연주한 오케스트라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작게는 산정현교회의 승리였고, 크게는 한국교회의 승리였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 전체의 위대한 승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가 우리 모두의 승리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승리에는 뒤에 숨어있는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월드컵 때에도 몇 몇 선수들이 눈에 띄는 선전으로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한국축구의 승리는 비단 몇 선수들의 기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들을 노련하게 감독하고 코치한 이가 있었고, 개인적으로 그 선수들을 뒷바라지한 가족들이 있었고, 경기 때마다 붉은 물결을 이루며 응원해준 수천만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주기철 목사님의 장엄함 순교교향곡도 독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이 솔로 바이올린을 구슬픈 가락으로 심금을 울리게 연주하고 있을 때, 바로 곁에서는 오정모 사모가 이를 뒷받침해주는 피아노 반주를 해 주었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바이올린의 연주가 훌륭하다 해도 반주가 곁들어지지 않으면 외소해지지 않겠는가? 이렇듯 주기철 목사님의 연주를 더 돋보이고 더 풍성하게 만든 것은 바로 오정모 사모님의 내조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려 오정모 사모님이 치러야 했던 희생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남모르는 눈물과 뼈를 깎는 아픔을 그 누가 다 알 수 있겠는가. 어디 그 뿐인가? 주 목사님의 곁에서 물심양면 도왔던 많은 성도들 또한 이러한 메인 연주를 완성된 교향곡으로 만든 오케스트라 규모의 협력자들로 그 역할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산정현교회의 신실한 믿음의 장로님들과 충직한 집사님들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과 그런 재직들과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할 수 있었던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부러움이 함께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어릴 적부터 수많은 지인들과의 만남과 훌륭한 스승들과의 만남을 맺어주심으로써 주기철이라는 한 사람이 기개 넘치는 믿음의 강한 용사로 설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이 얼마나 세밀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손길인가!

찬송가 가사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돕고 함께한 주기철 목사님의 동역자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리라 믿는다. 

현대적 우상숭배의 유혹과 살아있는 순교자로서의 삶


아, 감사하게도 글을 써 내려오면서 처음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격과 도전이 밀물처럼 다가와 다시금 내 마음을 잠그고 있다. 도전, 그야말로 도전이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현재의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함이요, 그럼으로써 미래의 나를 개척해나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일대기가 나에게 주는 교훈과 책망을 통해 지금 나는 현재의 나를 다시 보고 있다. 과거와 현재라는 시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적 사명과 그 과업의 완수는 나에게 있어서도 사명자로서 살 것을 촉구하고 있다. 어찌 이것을 외면하랴.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듯(창4:10) 지금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의 피가 나에게도 외치고 있다. 일사각오를 부르짖고 있다.

과거 일제치하의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상황이 신사참배의 우상숭배의 문제였다면 오늘날 한국교회 앞에는 다른 모양의 우상숭배 문제가 놓여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탐심”과 “세속화”라는 우상이 바로 그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나라 곳곳에, 각 가정과 개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 문제 앞에 우리 모두가 서 있다. 총칼을 앞세우고 공격해오지는 않는다 해도 똑같은 목적, 곧 우리를 거룩한 믿음에서 넘어뜨리려고 공격해 오고 있다. 탐심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면, 세속화는 교회적 차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며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문제의 답이 여기 있으니, 그것은 우리 모두 살아있는 순교자로 사는 것이다! 살아있는 순교자! 그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정신을 이어 받아 사는 것이고, 일사각오의 다짐으로 사는 것이다. 나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사는 삶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물질만능의 세상 속에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붙들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바라기는 주기철 목사님의 하나님께서 오늘 나와 그리고 한국교회 위에 이러한 복된 믿음을 부어주셔서 살아있는 순교자로서, 순교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로서 우리 모두가 존재하게 하시기를……. 오늘 나는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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