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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사실 ‘사회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엄기호의 내공은 이미 전작에서 증명된 바 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에서 저자는 ‘청춘’들에게 섣불리 조언이나 훈계를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힐링’과 ‘스펙 경쟁’의 양 극단에서 정작 자신들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채 소외된 그들의 목소리를 담담히 들려준다. 요컨대 그는 ‘화자’가 아니라 ‘청자’로 자리하는데, ‘듣는’ 행위를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신작인 『단속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곁이 없는 사회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누구도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이 없고, 단지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사람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사람들은 ‘힐링’이나 ‘상담’처럼 단지 누군가 자기 말을 들어만 준다면 그것이 호통이라도 좋은, 요컨대 “돈 내고 야단맞으러 가는 세상”이 되었다(7쪽). 곁이 사라진 세상은 ‘편’이 대체했고, 끊임없이 서로를 편 아니면 적인 이분법적 대립으로 몰아간다. 타인의 경험(단지 성공담에 환호하는 게 아니라)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거나,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사회적 연대 책임 의식을 갖는 것은 먼 얘기가 되었다. 사람들 사이의 교류 역시 비슷한 취향에서만 가능할 뿐, 차이를 마주하게 되면 ‘취향 존중’을 핑계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구성원 사이의 유대나 소통, 일련의 관계망이 결여된 ‘사회 아닌 사회’, “타인의 고통 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외면하며 단속團束하는”(10쪽) 서로가 서로에게 빗장을 닫아 건 ‘단속사회’가 된 것이다.
공론空論장
근대사회는 본래 시민으로 인정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과연 공론公論장은 존재하는가? 역사적으로도 문제에 대한 공론화 대신 이해관계에 따른 억압이 지속되었던 우리 사회는, 공론장은 외면한 채 ‘폭로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사실 폭로란 본래 공론장에서 억압되거나 배제된 자가 권력이나 구조에 대해 저항하고 배제된 목소리를 다시금 공론장에 호출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만연한 ‘폭로’는 배제된 목소리를 공론장에 부활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마치 콜로세움에 죄수를 세우기 위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도 검투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도덕’을 어긴 이들을 공동체에서 축출해 사자 앞으로 내몰아 단죄하는(그리고 다수가 그것을 즐기는). 이러한 공동체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튀지 않는 것이고, 결국 개인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위축된다.
사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는 오로지 시장논리에 따른 ‘무한경쟁’이 되었고, ‘탈락’에 대한 공포의 만연은 모두를 우울증과 만성피로에 시달리게 만든다. 결국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와는 과잉연결되어 끝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를 호소하지만 누구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71쪽) 이렇게 타인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는 것은 곧 관계를 통한 ‘개인’의 성장 기회의 박탈을 의미한다. 본래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로지 관계 속에서, 즉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고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가 배제된 오늘날 ‘나’의 내면적 성찰과 성취는 이제 숫자로 대체되고, 기준에서 ‘탈락’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부여된 숫자(목표량)를 열심히 채워야만 한다.
이제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저자는 목소리를 내지 않던(또는 아무도 쉽게 귀 기울이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불러냄으로써 관계가 단절되고 고립된 개인과 사회의 결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결들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던져진다. 우리 모두가 자신이 고통 받고 힘겹다고 말할 때, 당신은 고개를 들어 타인의 얼굴을 마주한 적 있는가?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신도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266쪽)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소시오패스’가 되도록 권장하는 끔찍한 사회다. 그런 끔찍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바로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타인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청은 수동적인 청취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던 것, 말하지 않은 것,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276쪽)이다. 레비나스의 윤리학. 그리고 우리가 주체로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와 살아가야만 하는 구성원으로서 ‘나’와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제 모두 고개를 들고 서로의 고통스런 얼굴을 바라보며, 자기의 그리고 타인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바로 그 작은 행위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