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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의 도시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5
정진열.김형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는 창구인 오감(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중에서도 특히 눈을 통해서, 즉 '보는' 행위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한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외부의 시각 정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외부의 대상을 기존에 우리가 가진 인식 틀을 통해 읽고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 틀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 필수적인 것이며, 또한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의 것과는 달리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고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보는 행위를 통해 읽고 파악하는 것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전달되는 상(像, image)들은 때때로 우리가 미처 그 대상을 판단하기 전에,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압도하며 전율하게 만든다. 대개 스펙타클 또는 아우라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이것은 보는 이가 가진 공고한 인식 틀(프레임 또는 편견이라 부를 수 있는)을 순식간에 깨부수고(혹은 그것을 넘어), 하나의 ‘전체’ 그러니까 말 그대로 우리 존재 그 자체로서의 본질적 부분에 순식간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러한 스펙타클, 아우라의 경험은 대개 영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며, 우리가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기에 타인에게 그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두 사람이 같은 그림, 또는 같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더라도 그 지점이나 맥락이 완전히 일치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의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위축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능성은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의 처절하게 차가운 진실, 결국 인간은 혼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2.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시공간 속의 이미지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과 함께한 순간들이 지니는 의미들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드는 등의 행위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의 공유, 또는 전달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명확하고 간결한 표현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예컨대 우리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감동할 수 있어도, 그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평을 보고 같은 감동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실 언어는 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개념들을 추구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어는 영속된 시공간을 잘라 날짜와 시간을 만들고, 개념들을 쪼개고 나누어 정의한다. 예컨대 무지개의 색깔은 옛날 동양에서는 5개였지만, 서양 그리고 서양의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7개로 인식된다. 이것은 언어가 필연적으로 전체, 즉 영속적이고 구분할 수 없는 어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세계를 훼손한다는 것을 뜻한다.


3.

《이면의 도시》에서 소개된 작업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본연의 스펙타클/아우라를 또 다른 이미지들의 스펙타클을 통해 재현해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고대의 한 철학자는 모방을 이데아의 아우라를 훼손하는 것으로 여겼지만, 사실 모방이란 저급하게 따라하는 것(imitation)이 아니라 이데아의 경험을 그 스펙타클을 재현(re-presentation)하려는 시도다. 그 시도는 우리가 언어/관념을 통해 인식했던,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틈이 벌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물리적·관념적 공간들의 틈새 사이를 메우고 다시 조합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간과하고 지나쳤던 여백의 공간들을 강렬한 이미지로 나타낸다.


바로 위와 같은 맥락 속에서, 《이면의 도시》의 작업들은 또 다른 인식 틀들을 제공함으로써 지상으로는 고층빌딩들이 줄줄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지하로는 가스관, 배수관, 지하철 등으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콘크리트의 도시 서울을 새로운 의미들로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촛불집회, 지하철 지하상가, 주민등록증, 성매매 등 우리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거나 금기시했던 도시의 이면은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노골화됨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숨겨진 이미지들이 도시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본질적인 요소임을 폭로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본질 그 자체에 완전히 다가설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우리는 전보다 더 다양한 의미들을 생산해 낼 수 있고, 그 의미들을 통해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면서 또 다른 의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요컨대 이것은 일종의 영구적인 게릴라전이다.) 그리고 그렇게 폭로된, 우리의 시야에 드러난 것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종전까지 보이지 않던, 그러나 이제는 우리 눈앞에 드러난 것들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이면의 도시》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감춰져 있던 질문들은 이제 우리 앞에, 우리의 두 눈에 결코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이미지로 놓여졌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것에 어떤 답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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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열정 이산의 책 29
레이 초우 지음, 정재서 옮김 / 이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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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04년에서 1906년 사이, 루쉰(魯迅)은 가난한 유학생으로 일본의 센다이(仙台)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국가개혁이라는 시급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높은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루쉰의 계획은 하나의 구경거리(spectacle)를 접한 어느 날, 과감하게 바뀌었다.”(본문 20쪽)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아케이드(arcade)는 그야말로 근대의 대표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은 바로 상품들이 줄이어 진열된 공간, 즉 ‘구경거리’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근대는 이러한 시각문화(특히 집단적으로 ‘엿보는’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당대 가장 근대적인 도시였던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곳도 바로 모르그(morgue, 시체공시장)였다.


근대, 주체의 탄생


  근대란 곧 ‘주체’의 탄생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근대적) 주체란 사실 데카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체를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주체(Cogito ergo sum)가 아니라 단지 그것(의심할 수 없는 주체)을 '상상'하는 주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주변부(객체)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엿보는 주체다. 즉, ‘(근대적) 세계’란 결국 타인을 그 비밀스러운 곳까지 구석구석 엿보는 “당시증(瞠視症)”(31쪽)의 공간이며, 비서구 세계를 ‘야만’의 눈으로 구경거리로 ‘전시’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아케이드’이다. 저자인 레이 초우는 이에 대해 티모시 미첼을 인용하여 “세계 자체를 일종의 끊임없는 전시회로 정리하고 서열화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구경거리, 근대적 주체의 주변부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에서 ‘구경거리’가 된 이들, 즉 주체 바깥에 위치 지어진, 주체성을 박탈당하고 사물처럼 전시된 운명에 처한 이들(대표적으로 비서구 세계)에게 근대란 어떤 의미인가? 글의 서두에 인용했던 에피소드에서 루쉰은 어떤 영화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아 의학도(물질적 측면에서의 근대)로서의 길을 버리고 문학(정신적 측면에서의 근대)으로 전향한다. 그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은 어떤 중국인들이 일본인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장면이었는데, 레이 초우는 그가 받았던 충격이 단순히 처형에 대한 공포나 중국인들이 힘없이 처형당하는 모습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먼저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날 것”으로서의 힘, 그러니까 단순히 스크린에 보이는 것(화면, 그림자)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전체’를 그대로 전달하는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 바로 영화라는 ‘구경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야말로 하나의 스펙타클(Spectacle)이며, 이것은 언급한 공포와 분노를 아우름과 동시에, 영화를 바라보는 루쉰 자신에 대한 인식과 관계한다. 즉, “더 정확히 말하면 한 편의 영화로, 하나의 구경거리로, 이미 늘 보고 있던 존재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28쪽)


  그가 영화를 보며 느낀 공포는 단순히 스크린 속 핍박받는 중국인에 대한 인식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중국인의 모습―구경거리로 전락한―을 무기력하게 인정하며 바라보는 중국인(루쉰 자신을 포함한)에 대한 자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루쉰에게 있어 가장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봉건적 악습뿐만 아니라 중국인들 사이에 만연한 무기력증이었다. (대표적으로 전자에 대한 비판은 《광인일기》를 통해서 후자에 대한 비판은 《아Q정전》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자신의 문학 활동을 통해 전통적 질서(힘, 권력)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새로운 중국과 중국 민족을 만들기 위해,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해,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보여지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즉, “루쉰의 급진적 행동은 전통적 관행을 새로운 삶으로 부활시키려는 신경증적인 시도”이며, 그렇게 해서 탄생한 주체란 역설적이게도 결코 주체적이지 못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원시적 열정’


  그런데 사실 이것은 비단 루쉰 개인이나, 개항기 중국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세계’의 역사, 즉 모든 근대화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실제로 모든 ‘민족’, ‘전통’, ‘역사(민족사)’ 등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 또는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근대의 산물이다. 타자의 시선에 억압된 자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통’은 양가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레이 초우는 이를 ‘원시적 열정’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후진적’인 것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태고적’인 것으로서 긍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된 감정은 말 그대로 복합체이며 따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바로 근대 중국의 역사 속에서 개항기와 문혁시기 전근대적인 악습의 전형으로 부정되었던 ‘공자’가 오늘날 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러한 “악순환적 감정의 복합체”는 전자는 주로 공동체 내부에 대해, 후자는 외부에 대해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전제한다. 근대화 시기 분명한 피해자였던 중국이 민족주의적 팽창주의를 오히려 점차 강화하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근대의 역사는 곧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내부적으로) 스스로를 재정립하기 위해 이러한 ‘신경증’적 과정을 그대로 거쳐 왔다.


아케이드,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인가? 요컨대 근대화 이후, 제국주의적 침략의 ‘대상’이 되었던 비서구 문명에 있어 ‘신경증’은 악질적인 불치병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레이 초우는 다시 처음, 벤야민이 바라보았던 거리, ‘아케이드’로 돌아가 볼 것을 권유한다. 전통적 질서의 해체는 단순히 억압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적인 것에서 대중적인 것으로의 민주적 이동”을 수반한다. 그리고 아케이드는 ‘보여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이는 공간’이자 ‘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근대로서의 세계사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 ‘신경증’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은 단순히 그것을 감추고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케이드가 참여의 가능성이 열린 공간이라면, 제국주의적 시선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그 공간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즉 우리는 자신들을 끊임없이 타자(세계)와의 연속성 속에서 서로 내보이고,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폭력을 지양하고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는 ‘축제의 장으로서 아케이드’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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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나흐트 - 대학살의 전주곡
마틴 길버트 지음, 김세준 옮김 / 플래닛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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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은 아래로 떨어졌도다. 인류는 비웃음거리가 되었도다. 그 땅에는 진리도 동정도 자유도 없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오로지 이스라엘의 집을 모욕하고 파괴하느라 여념이 없구나."(마틴 길버트, 크리스탈나흐트, 플래닛, 156쪽)

1938년 11월 10일. 온 독일을 휘몰아치며 종일 지속된 광기와 폭력은 그 자체로도 가장 잔혹한 범죄이자, 인류사를 통틀어 자행된 죄악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라 할 ‘홀로코스트’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른바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 불리는 이 하루 동안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9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가게며 오랜 역사를 가진 회당들까지 공격받고 불탔다. 그들이 폭력과 증오의 대상이 된 데에는 그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나 근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었으며, 더욱 끔찍한 것은 이러한 중범죄에 다수의 독일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조직화된 나치당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상당수는 평소 자신의 마을에서 이웃인 유대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냈다. 그런데 왜, 어떻게 지극히 평범했던 이들이 불과 하룻밤 사이 마치 악마에게 홀린 듯이 집단적인 폭력과 증오의 광기에 휩싸여버린 것일까? 

‘수정의 밤’ 당시 벌어진 광기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크리스탈나흐트》의 저자 마틴 길버트는 그날의 사건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이전까지 존재하던 반유대주의 정서는 더욱 치밀하게 조직화되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지속된 경제공황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과 불만들은 반유대주의를 가속화시키는 연료의 역할을 했다. ‘수정의 밤’ 사건은 6년여에 가깝게 지속된 치밀한 차별과 박해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통찰은 매우 타당하다. 다만 이러한 견해는 지나치게 사람들의 수동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지점도 있다. ‘수정의 밤’과 그 이후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광기는 수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들은 10년 넘게,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일상적’으로 한 인종을 핍박하고 학살하고 증오했다. 선과 양심을 끝까지 지켰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수정의 밤’으로 상징되는 인류사 속 죄악들의 책임주체가 단순히 광기어린 소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악의 근원, 그 책임이 히틀러나 괴벨스, 나치당에게만 있다면, ‘수정의 밤’이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들은 인류사에 있어서 일회적인, 특수성을 가진 사건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폭력과 광기는, 특히 합리적 이성과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근대와 현대에도 빈번하게 그 모습을 나타냈다. 러시아 키시뇨프의 대학살,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 레이시즘,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역할만 바꾸어 되풀이되는 폭력... 인류 역사의 어두운 부분들인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특수하고 조직화된 소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이들의 지지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 되었다. ‘수정의 밤’이나 ‘홀로코스트’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던 이들 역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살인과 방화를 즐기는 악마나 적극적인 인종주의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갑작스런 증오와 히스테리가 평소에는 온화하기 그지없는 대중들을 완벽하게 사로잡은 것처럼 보였다. ...(중략)... 나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손뼉을 치며 들떠 소리 지르고, 품위 있어 보이는 중산층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걸 보았다.”(38쪽)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집단적 폭력과 증오의 광기, 즉 악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인류 최악의 범죄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악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약간의 어리석음과 무책임함, 그리고 올바른 것에 대한 사유의 무지에서 기인함을 지적했다. 악은 다름 아닌 선의 부재, 다시 말해 선에 대한 무지와 실천성-책임의식의 부재이다. 그들은 진실로 자기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고통 받는 유대인들을 본 어린 자녀의 물음에 답하는 한 어머니의 무지를 보라! “저들은 사람이 아니란다. 저들은 유대인이지.”(257쪽) 
따라서 우리가 ‘수정의 밤’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죄악의 책임을 일부에게 전가한 채 박제(剝製)하여 전시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의 역사가 남겨주는 겸허한 교훈은 인류는 끊임없는 반성, 즉 선에 대한 자각과 실천의지 없이는 누구나 언제든지 악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인 그날의 밤에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윤리와 도덕을 지켜냈던 이들은 인류가 어떻게 악에 맞서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해야만 하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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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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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이 흥미를 끌었다. 왠지 모르게 '어쩌다'라는 표현이 좋았다.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의 자서전이라는데, 노학자의 자서전이라는 묵직함ㅡ내지는 퀴퀴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던 점도 끌리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기대는 충족되었다.

 

저자가 80이 넘은 대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문체가 시종일관 경쾌하고 재기발랄했다. 자신이 선택하고 60년이 넘게 걸었던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무겁게 폼 잡지 않았다. 사실 이건 정말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는 자신에게 사회학이 자기 정체성의 3위쯤 된다고 말하는데, 이런 점이 그의 삶에 균형감각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닐까? 사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쩌다' 태어나고, '어쩌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모두 그렇게 '어쩌다' 산다(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국민' 모두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가져야 할 때도 있었지만(사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런 말은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다' 부여받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받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무겁게 생각할 필요 있나, '재밌게' 살면 그만이지. 저자는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부모님께 들은 얘기다. ...(중략)... 아주 정교한 장난감 전기 기차를 선물로 받았단다. 모형 풍경 사이로 여러 개의 철로와 터널이 설치돼 있고 거기로 기차가 통과하는 그런 장난감이었다. 부모님 말씀이, 나는 이 장난감의 놀라운 기술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중략)... 대신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는 기차에 탄 상상 속의 승객들과 얘기를 나누더란다. / 그 때 이후로 나는 내내 그런 대화를 나눠왔다고 할 수 있으리라. 후회하지 않는다. 아주 재미있었다. 아직도 그렇다." 그렇다. 재미있게 살자.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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