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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아시아의 근대화를 읽는 서브 텍스트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임성모 옮김 / 산처럼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혹시 "근대화연쇄점"을 기억하시는가?

내가 어렸을 때 "근대화"는 오늘날의 세계화 혹은 지역화처럼 유행어였던 모양이다. 구멍가게보다는 조금 크고 오늘날 우리가 마트 혹은 수퍼마킷이라는 호칭으로 익숙한 잡화점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가게들 중에 일종의 체인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근대화연쇄점이라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굳이 "근대화의 역군"이라든지 하는 우리 주변의 떠들석했던 여러 구호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근대화""반공"과 함께 최고의 이데올로기였다. 근대화가 의도하고자 했던 숨겨진 정서는 아마도 "못 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더 못산다"던 이승만 정권 시절의 지긋지긋한 가난, 우리 민족 반만년을 억누른 배고픈 설움을 극복해보자는 것이었을 게다.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였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란 책에 대해 말하면서 왜 느닷없이 "근대화" 타령인가, 그것은 "만철", 아니 "만주국"이 우리 근대화의 실제 모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따라 "근대화(近代化, modernization)"는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쉽게 정의되기 어려운 말이면서 시대 상황과 그 말이 쓰이는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생각하는 근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근대화는 크게 두 가지을 의미한다. 그것은 '산업화와 민주화'이다. 막스 베버식의 관점을 차용했을 때 근대화란 봉건사회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아 혹은 다른 여타 후진 사회에 도입했을 때 근대화는 단순하게 보자면 서구화 혹은 서유럽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협소한 개념으로 보는 이들은 어느 한 사회가 다른 단계로 전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응당 겪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근대화는 단순하게 서구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 근대화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해 하는 과정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근대화는 어찌 보자면 서구화(경제적으로는 산업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와 착각하지 마시길 -  교수는 "대동아공영권, 쇼와 파시즘, 중일전쟁" 등 일제 침략사를 연구해온 일본의 중량급 역사학자다. 그의 연구 제목들이 알려주듯 그는 전쟁전 일본의 과거를 탐문하고 있다. 그의 저서 "만철"에서 종종 일본에 의해 피지배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묻어나는 것은 역시 그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탓이다. 스티븐 E. 앰브로스의 저서 "대륙횡단철도"는 미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서 남북전쟁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을 대륙횡단철도 부설에 놓고 있다.

1865년 미국에서 시작된 센트럴 퍼시픽과 유니온 퍼시픽의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는 대사업은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대의 삶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뀌게 되는 과정, 20세기 최대의 사건이랄 수 있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의 도화선이자 바탕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되는 초석을 놓아기 때문이다. 중국은 상해와 같은 동부 해안으로부터 옌안과 같은 내륙으로 100km 들어갈 때마다 시대적으로 10년씩 뒤로 밀려난다고 한다. 근대화가 동부 해안 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이다. 중국이 장강 삼협댐 건설과 같은 내륙의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우리는 얼마전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시간만에 주파한다는 고속철도는 그러나 서울에서 멈춰버렸다. 만약 이 열차가 평양을 거쳐, 신의주,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에서 파리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반도국가라는 지리점 잇점을 십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일제강점기였기는 하나 우리의 선조들이 열차를 타고 만주와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만주와 고구려사,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도 이 책은 재미난 도입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주국과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만철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서부개척의 총본부였던 것처럼, 만철이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일제의 만주경영을 맡은 사실상 식민기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일종의 모델하우스처럼 만들고 싶었던 나라 만주국의 실질적인 브레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화 모델 박정희의 사상적 뿌리와 모델이 바로 그곳 만주에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8·15광복 이전까지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만철보다는 만주국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저자 자신이 만철을 이야기하며 만철을 통해 만주국 경영 문제가 전쟁 전과 전쟁 후를 잇는 주요 맥락으로 살피고 있는 이유이다. 만주국은 전후인 1950년대 일본이 이룩한 경제기적의 기본 정책을 실험했던 곳이고, 현재 남북한의 지배 엘리트들의 양대 뿌리를 이룬 박정희와 김일성이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만주는 동북아 근/현대사의 블랙박스인 것이다. 박정희만 만주 출신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최장기 국무총리를 지냈던 최규하 전 대통령 역시 만주국 관리 출신이란 점에 주목해 보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원형이 시작된 곳,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벌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이 시작된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근대화의 두 얼굴 - 착취와 풍요

이 책을 읽노라면 종종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간과하고 있는 몇 가지가 느껴져서 개운하지가 못하다. 그것은 고바야시 히데오가 만철의 낭만적인 면모에 몰입한 나머지 만철의 기본적인 속성과 숨겨진 의도를 적절하게 노출시키지 못하거나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이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동인도회사를 건립한 뒤에 네덜란드를 식민지배했고, 영국인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뒤 인도를 식민지배했다. 만철은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일본은 민간회사를 가장해 제국주의적 침식의 한 수단으로서 만철을 이용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일본 정부는 만철이 주도한 식민 침탈을 단지 민간회사의 실수로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로 잡아 뗄 수 있었다.

앞서 우리 사회 근대화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고 말했다. 저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만철의 경제개발, 경제발전에 주목하면서 만주철도와 근대화가 지닌 다른 어두운 측면을 손쉽게 건너띈다. 오늘날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유통업체들이 지역 사회의 작은 구멍가게들을 질식시키듯, 지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대자본의 서점들이 지역 사회의 영세 서점들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철도를 통해 이룩한 근대화(산업화)는 지역 혹은 한 국가, 민족의 자급자족적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팽창을 좀더 손쉽게 만들어 준다. 조선의 근대화가 단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철도 부설을 위해 저임금과 비인간적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얼굴은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 시절의 근대화 역군들의 얼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우리는 경부고속도로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싼 값, 최단기간에 건설되었다는 근대화의 업적에 도취해 종종 그 뒤안길에서 살인적인 노동강도, 안전없이 강행된 공사로 인해 7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기존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를 '동북아시대위원회'로 개칭하고 그 구조와 기능을 크게 확대) 동북아시대위원회의 미래 비전은 종종 과거 만철과 일본이 추진하고자 했던 '대동아공영권'- 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았을 때 '동북아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 다른 성질의 유사한 지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북아네트워크 건설은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근대화의 두 가지 덕목 중 한 가지인 산업화는 분명하게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추진한 근대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절름발이 근대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통과해왔고, 이제는 극복의 대상이 된 "민족국가" 건설이란 측면에서 아직 절름발이 상태에 놓여 있고, 식민지 지배 마인드 속에 추진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화의 후유증 속에 놓여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민주화의 추진과정에서 끊임없이 박정희 모델이라는 이전의 망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싯점마다 되풀이 되는 과거 청산과 수구보수세력의 역공은 물론 그들 자체가 이땅의 견고한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지만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세력, 민주화를 성취하겠다는  개혁세력이 박정희 모델로 표현되는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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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눈에 안 들어와서 다른 책을 집어든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글을 잘 쓴다는 것"..

제목을 보는 순간,. (에코 식으로) "리폿 잘 쓰는 방법", 혹은 "리폿, 어떻게 쓸 것인가" 등의 제목으로 읽혀버리다.
과연 글을 잘 쓸 수 있는 혜안이 담겨 있나 함 보까.

길지도 않으니 몇 문장만 옮겨보자.
----------------------------------------------------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 (쓰다 보니 거의 전부를 옮겨 버렸다 ㅡㅡ;;)

우뛰! 그래.. 내가 글이 더디고. 말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
그런데 말야.
자기가 생각한 것만큼을 잘 말하는 것하고, 더 많이 생각하기 위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하고. 어느 게 더 좋을까?

이리저리 떠오르는 너무나 많은 생각에 길을 잃는 게 안 좋은 줄은 알거덩. 그러나 끝없이 갈라지는 그 가능성들을 잡아내기 위해, 아직 모르지만 더듬더듬. 머라도 잡아볼라꼬 욕심 부리는 거 아닌감?

당신도 글케 이야기하는구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생각하고 있는 만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실현(!)"이라고.
그 사고의 실현은 '생각한 그만큼'이 육화되는 건가?

난 오늘도 공을 못 칠지 몰라.
그래도 내 파워가 허락하는 한. 최대의 포즈로 스윙을 연습하는.
조악한 타자가 될테얌.  헤헤.. 우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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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즐겁게 MT 떠난 어느날, 나는 고작 빌어먹을 '개촌'을 잠깐 다녀왔을 뿐이다. 제길! 잘 모르는 곳이기 때문에 개촌'견문록'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나, 우리 동네와도 별 다를 바 없는 풍경에 아직도 혹하여 그냥 간단히 '일기'라 부르기로 한다.

사실 개촌은 그네들 말이고, 정식 명칭은 견촌(犬村)이다. 요즘은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도그빌Dogville'이라는 영어식 이름도 하나 지었나 보더라.

라스베가스에 주로 살다가 '눈을 크게 뜬 후' 요즘은 라스 폰 트리에로 옮겨갔다고 하는 泥骨 氣得滿 (각주1) 이 이곳에 잠깐 머물렀다는 풍문 외에는 그다지 세간에 알려진 바도 없기 때문에 이제껏 다녀간 사람도 별로 없는 듯 하였다.

나 또한 미리 관광 안내책자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소문만 듣고 마지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 대한 확신도 없이.


기차는 우리를 산꼭대기에 데려다 주었고 우선 몇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전해 주었다.

이 길의 끝에 개촌이 있다. 즉 개촌에 들어가던지, 똑같은 길을 거슬러 거기서 나오는 경우만을 상정할 수 있는 닫힌 공간이라는 말이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다보면 몇 가구 되지도 않고 동네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니 애시당초 동네 전체만이 아니라 집안 속속히 다 들여다보인다.

이런 촌동네는 살아봐서 아는데 사실상 있으되 없는 벽이다.

뉘집 자식이 어디서 사고를 쳤는지, 지난밤 부부싸움은 왜 일어났는지, 누구 집에서 오늘 무슨 들일을 할건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꾀고 있다. 담장이라고 해봐야 애들도 손 집고 뒤꿈치를 들면 집안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다.

앗, 잠깐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기차가 데려다 준 그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동네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벽도 없고 문도 없다. 그러나 개촌 주민들은 그 벽 너머를 볼 수 없는 듯하고, 문여는 동작을 하지 않고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벽.


변화가 거의 없는 동네지만 泥骨 氣得滿을 둘러싼 전설이 하나 전하긴 한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새로 생긴 五種의 '풀장' (각주2) 을 다녀가라는 광고문안이지만 우리 개촌 홍보용으로도 아주 적당하겠다.

전설 자체는 아는 이도 있고 아예 관심 밖인 사람도 있을 듯하나 그것을 그대로 옮기자면 에이포 한두 장이라는 우리 일기의 약속을 어기는 듯하야 생략하도록 한다.

이 전설에는 몇 가지 독법이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속성으로 읽는 것이겠다.

알레고리적 독법도 가능하다.

'개촌 주민-톰-그레이스-갱 두목(그레이스 父)'를 '노동자-지식인-종교-권력'이란 식으로 전치가 가능하다.

기이 전설을 듣고 나면 니체가 무지 읽고 싶어진다.

고진식의 '공동체-타자'의 논의로 들여다봐도 재미있을 법하다(사실은 이 영화를 볼 즈음 주관심사가 고진에 있어 상당히 그쪽으로 혹한 바 있다, 지금 풀어내기엔 고진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내 고민이 깊지 않다).

하여 짤막하게 우리 '벌거벗은 임금님' 몸매 구경이나 해보자.

....

 

(각주1) 泥骨 氣得滿: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氣得滿'이라는 이름으로 잘 드러난다. 언젠가 인기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창기답지 않은 기품 외에 자신의 몸매를 꼽은 바 있다. 때문에 '부드러운 몸매에 인기가 가득하네'는 그녀의 애칭이 되었다. 정확한 출신과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각주2) 프랑수와 오종의 '스위밍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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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썰렁함'이란 개념에 대해선 몇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다.

하나의 정책으로서의 썰렁함은, 이제 내 고유의 특질이 된 듯이 평가되는 느낌이다.
썰렁함이 정책인 이유는 이것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내 체질개선을 위한 하나의 의도가 깃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행위로서의 썰렁함이 나라는 인간을 대표하는 특질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그 내부에 은폐된 전도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하나의 동사가 하나의 명사로 굳어버린 것에 비유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나는 그다지 사람과 친해지지 못하고, 친해지더라도 미리 설정된 경계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에게 이런 경계는 있을 터이다.

오히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모든 경계를 허물고, 아니 경계 자체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더 접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분명 내가 미리 경계를 설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딱딱함 자체를 견딜 수 없다.

썰렁함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 선택된 타개책이다.
일견 썰렁함이 더 딱딱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썰렁함은 얼음이란 단어를 함장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견고한 언어에 약간의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전혀 의도하지 않은 '실소'를 터트리게 하는 의도적 행위는 분명 화기애애함으로 나가기 위한 한 과정이 될 수는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곧바로 화기애애해지고, 아주 따뜻한 분위기로 시종일관한다면 그보다 좋을수 없다.
그러나 사는게 그런가?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탐색전을 벌이는 그 애매한 공간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그 공간은 주인 없이 객만 존재하는, 그래서 그 애매함이 더 지속되는 공간이다.

석사학위 논문발표장에서, 선생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 어색한 분위기, 느껴본 사람은 알거다.
말쑥한 정장 입고서, '2% 부족한 논문이지만 잘 봐달라고 하면 선생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로 시작되는 몇마디를 터트리곤, '저 놈이 이런 자리에서도 정신 못 차리네~'라는 실소로 공간을 채우고 나니,
그 자리가 그렇게 편할 수 없더라.. 발표도 편하게 했고.

너무 익숙하게 사용되는 기표를 전혀 다른 기의와 연결시킴으로써 생기는 잠깐의 머뭇거림, 그 찰라의 공백이 팽팽한 긴장상태를 잊게 한다. 이어서 터지는 웃음. 물론 이 웃음 자체는 따뜻하지 않다. 자기가 순간 웃고도 나에게 화를 내는 (나로선) 황당함을 유발하는 웃음이다. 그러나 이 웃음 뒤에는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새로운 관계가 맺어진다. 나는 잠깐 그 사람과 가까와짐을 느끼는 것이다.

관계에서의 이 효과는 언어에 대한 '낯설게하기'로서 가능하다.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한 재고를 강요하기.
따라서 이는 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관계의 낯섬을 타개한다는 상당히 모순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愛了니'就'irony'!!

춥다 하면 추어탕 먹어러 가자하고, 에이 썰렁해~ 하면 설렁탕 먹어러 가자 하다가,
정말 추워 죽겠네~ 하면, 니가 추우면 나는 그저 부추어(不錯!!)지롱~~

이라고 연발해 상대를 꽁꽁 얼어붙게 하지만,
내 의도는 항상 상대와 가까워지기, 공간 자체의 화기애매함이었다.


이런 내 의도와는 달리 '썰렁함'을 하나의 행위가 아닌 특정인의 특질로 본다는 것은 비극이다.

언어라는 공통공간을 상정한 상태에서 이미 만들어진 사물들만 주고받으면서 서로 소통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것, 우리 시각이 보아낼 수 있는 그 정도에서 머물려는 게으름의 소산이기도 하다.
물론 거짓이나 게으름, 불감증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서로 소통되고 있다고 안심하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긴 하다.
전혀 새로운 사건이 벌어져도 그것은 그저 '화재'사건, 혹은 '강간'사건일 뿐이다. 그렇게 묘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르포르타주의 언어이다.

그러나, 똑같은 사물을 보고서도 전혀 다른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똑같은 언어에도 전혀 다른 감정을 담을 수도 있다.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다른가.
시인은 그저 예쁘기만 한 꽃에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감각하는가.

썰렁함은 분명 '언어 이전'을 추궁하고, 불가능하지만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시적 언어는 아니다.

그러나, 일단은 한발짝 발을 딛어 보자. 운동방향은 다를 수 있지만 썰렁함을 통해 나는 언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언어 이전의 생성을 생각하고자 한다.

내 이런 태도는 끝까지 밀고갈 터이지만, 내 이런 행위가 만약 나를 어떤 하나의 '명사'로 고정하는 것이라면 자제하도록 하겠다. 이 태도는 강요로 행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민음사.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작과비평사.
마루야마 게이자부로, <존재와 언어>, 민음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졸고, <썰렁어록>, 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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